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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내고 욕 먹기 "학교 도서관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 (3/5)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10. 5. 14:59
저는 도서관 관계자분들과 만날 기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말씀을 들어보면, 행정 당국이 ‘이용자 수를 늘려라’ 라든가 ‘열람 회수가 적은 책은 버려라’ 등 도서관 측에 이런저런 압력을 가한다고 합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인데요, 도서관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많지 않은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이 가득하고 너저분한 도서관이 이상적이라고는 아예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서관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없는 장소입니다.
<존 윅>에서도, 확실히 뉴욕 시립 도서관인지 어딘지에서 키아누 리브스와 킬러가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 있었지요. 서가 사이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몇 분 씩 치고받고 칼로 찌르고 하는데 그 사이에 개미 하나 얼씬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엄청난 소란입니다. 어머, 서가에 깔리겠어, 책상이 부서지겠어, 호들갑을 떨 법한데도 아무도 그럴 사람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서관 책 가운데에, 명백한 개인 물품을 은닉해두는 겁니다. 존 윅은 아무도 빌리지 않을 듯한 책을 도려내어, 무기로 추정되는 것을 숨기고 있습니다. 결국, 영화에서 상정하고 있는 도서관의 기본 설정은, ‘그곳에서 결투를 해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몇 년 간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책이 있는’ 게 됩니다. 저는 이 기본 설정이 ‘올바르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되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도서관이란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사람이 없는 서가 사이를 혼자서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걷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제가 개인적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던 도서관의 추억은 전부 그런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없는 도서관 곳곳을 혼자서 걸어보는 겁니다. 끝없이 서가가 이어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스스로가 전혀 알지 못하는 작가의, 거의 알지 못하는 제목의 서책이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스스로 그런 학문 분야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분야의 책이 수십 권씩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그랬구나. 여기에 있는 서책 가운데, 내 전 생애를 거쳐 읽을 수 있는 수는, 수십만 분의 일에 그치는 거구나. 나머지 서책들하고는 거의 남남인 채로 나는 인생을 마칠 것이다’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사람이 없는 도서관에서, 압도적인 양의 서책을 바라보았던 때에 느꼈던 것은, ‘아, 나는 앞으로 이만큼씩이나 책을 읽는 거다’가 아니라, ‘일생을 걸어도 읽지 못하는 책이 이만큼씩이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통감케 하는 것이 도서관이 가지는 가장 큰 교육적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서관의 사명은 ‘무지의 가시화’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무지하거니와, 죽을 때까지 공부해도 아마 아무것도 모른 채 끝날 지 모른다 하는 무한의 감각입니다. 그러한 자기 자신의 ‘가공할 만한 무지’ 앞에서 전율하는 것이, 도서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다양한 영화에서 도서관은 무한한 지(知)의 공간으로 표상되어 있습니다.
도서관이라는 것은 ‘장서가 무한하게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장서가 무한하므로, 당신은 이 도서관의 극히 일부를 살짝 맛보는 것만으로 일생을 마치는 것이며, 당신이 죽은 후에도, 이 거대한 도서관에는, 당신이 끝내 알 수 없었던 예지나 감정, 이야기가 잠들어 있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같은 게 딱 그렇지요.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도 마찬가지예요. 여기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거대한, 장서가 무한한 도서관이라는 설정이지요. 수도사들이 있지만, 누구 하나 장서를 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게 서가가 이어져 있어서, 안내를 받지 않으면 자칫 도서관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인터스텔라>도 그래요. 마지막 장면은 우주의 끝까지 이어진 무한한 도서관의 영상이었습니다. 도서관이란 본질적으로 무한입니다.
도서관이 그곳에 들어선 인간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한’이라는 개념입니다. 그곳에 발을 내디뎌 들어갔을 때에, 자기가 사는 인생의 유한성과 함께 자기가 알고 있는 지(知)의 유한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이상으로 교육적인 사건은 이 세상에 없다고 단언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세상을 알지 못하는가, 모르는 채로 인생을 마치는 것인가. 앞으로 일생을 걸고 아무리 똑똑해지려고 노력하더라도, 이 거대한 지(知)의 아카이브 가운데, 조각만한 것밖에 자신은 접촉할 수 없으며, 그 이상 스스로 습득하기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조각에 불과할지라도, 자신이 이 무한으로 이어지는 장소의 일부에는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며, 잘만 하면 그 일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 무한으로 이어지는 장소에, 자신이 무언가를 만들어내어 그것을 보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적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삼가는 것[慎ましさ]’ 입니다. 무한한 지(知)에 대한 ‘예의 바름’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물정을 모르는가, 자신의 지성이 닿는 범위가 얼마나 협소한가에 대한 유한성의 자각[覚知]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은, 눈 앞에 이렇게 ‘무한한 지(知)를 향해 열려 있는 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도서관으로부터 분명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저와 도서관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했습니다.
유럽을 무대로 하는 영화를 보면, 부자가 사는 저택 응접실 내부가 대체로 벽 전부 서가로 채워져 있습니다. 저는 그런 영화를 수십 개, 수백 개 보아왔습니다만, 그 영화에서 집 주인이 서가에서 책을 꺼내서 읽는 장면은 일단 없었습니다. 개중에는 이제 막 벼락 부자가 된 인간이, 옛날 귀족의 저택을 구입해 거기서 사는 듯한 설정도 있습니다만 그 경우, 이 서가의 책은 가구 집기의 일부로서 아마 ‘통째로 산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자기 소유의 장서도 아니고, 서가 채우기가 딱히 자신의 취미도 아닙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눈에 거슬리니 전부 치워서 헌책방에 팔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아마 ‘그런 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유럽에서는 입신양명하게 되어 오래되고 커다란 저택을 구매한 인간은 반드시 그 저택의 이전 주인들이 꾸민 장서에 둘러싸여 살아야만 한다는 암묵의 법칙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서재에서 일을 보면서 문득 고개를 들면, 거기에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이나 <로마 제국 쇠망사> 등의 가죽 표지 책이 늘어서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읽은 적이 없었겠지요. 이제까지 사업이나 정치 활동으로 바빴을 테니까요. 따라서, 서재에 있는 책은 전부 ‘읽지 않은 책’인 겁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읽지 않을 책이지요. 그러한 수천 권의 책이 매일 서재의 주인을 향해 ‘너는 정말로 무지하구나. 그러니 우쭐대면 못쓴다’는 메시지를 소리 없이 보내옵니다.
확실히 그러한 고전을 가죽으로 두르고 금박 제목을 입혀 세워두는 이유는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한 인간은 자신이 읽지 않은 서책을 올려다볼 적에, 서책으로부터 ‘너는 성공한 자로서 잘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에 집약되어 있는 지적 아카이브의 일부조차 읽지 않았다. 스스로 이 세상을 거의 모르는 인간이라는 점을 깨닫거라’ 하고 설교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한 설교를 서책으로부터 듣는 것을 일과로 하는 것, 그것이 유럽에서의 사회적 성공자에게 부과된 조건이 아니었을까,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일본의 경우 ‘단나게이*[旦那芸]’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습니다만, 어느 정도 사회적 위신을 갖추게 되면 ‘게이고 고토**[お稽古事]’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저는 간제류 노(能)를 수련한 지 이제 30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게이고 고토’에는 어지간한 돈이 듭니다. 사회 초년생은 불가능합니다. 예전 같으면 부장님 정도가 되지 않으면 월사금이나 사례금을 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일정 지위에 오르면 ‘게이고 고토’를 하기로 거의 의무화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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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나게이: ‘단나’란, 남편을 이르는 ‘서방’이나 속된 ‘사장님’에 가까운 말. 이러한 ‘단나’가 익히는 기예. 일본은 중세 시대에 상업이 융성했는데 이런 ‘사장님’들을 단나라고 하였다.
** 게이고 고토: 다도, 꽃꽂이 등의 소양을 이르는 말.
수련을 쌓는다 하면 뭘 하느냐, 여하간 선생님한테 욕먹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선생님으로부터 욕을 들어먹습니다. 초심자 때는 물론 그렇지만, 십 년을 해도 이십 년을 해도, 변함 없이 욕을 먹습니다.
어제도 저는 노(能) 수련을 행하였습니다만, 선생님에게 혼나고 또 혼났습니다. 저도 이제는 고희를 넘겼으니, 나이가 지긋합니다. 그런 저를 보고 ‘노력이 부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무한 일입니다. 이제는 노력할 수 있는 체력이 남아있지도 않은데, 72세인 저를 80세 선생님이 계속 꾸짖는 것입니다. 순서가 틀렸다, 박자가 틀렸다, 부채를 잘 못 펼친다든가, 좀 더 천천히, 좀 더 빠르게라든가, 계속 혼나기만 하는 겁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혼내는 것은 굳이 말하자면 전부 ‘내가 할 법한 실수’입니다. 저라는 인간의 본성이 드러내었던 실패입니다. 그저 서툴다든가 기억력이 부족하다든가 하는 게 아닙니다. 제 실패에 노정되어 있는 것은, ‘세상을 허투루 대하는 태도’라든가 ‘급한 성질’ 같이, 정말 제 인간적인 결함이 노정되어 있는 부분인 겁니다. 그곳을 핀포인트로 지적당했습니다.
어제 같은 경우도 우타이[謡]에서 ‘잰체 하지 마라. 잘 보이려고 하지 마라’고 꾸지람 들었습니다. ‘이 파트가 창(唱)에서 <절정>이니, 조금 목소리를 떠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 제가 질문하니, ‘여태껏 연습했는데도 여전히 그런 바보 같은 소리나 하고’ 라며 꾸지람 들었습니다.
그때, 수련은 ‘혼나기 위해 돈을 내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라고 통절하게 느꼈습니다. 가창이나 무용적인 기술을 익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원래의 의미는 잘난 체하는 남자들에게 ‘자만하지 마라. 우쭐해하지 마라’고 머리를 때리는 교육적인 장치가 아닌가, 그런 느낌이 듭니다.
서책 이야기로 돌아가면, 도서관도 그런 게 아닐까 합니다. 도서관도 우쭐댐을 책망하는 교육적 기능을 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도서관에 갔는데 만약 ‘자신이 읽었던 책’과 ‘자신이 앞으로 읽을 예정인 책’만으로 서가가 메워져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만으로 가득찬 도서관은, 도서관으로서 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도서관이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빌리러 가는 장소가 아니며, 참고자료를 조사하러 가는 장소가 아닙니다. 확실히 그런 기능도 있습니다만, 가장 큰 기능은 ‘무지를 가시화하는 것’입니다. ‘잘난 체하지 마라’ 하고, 이용자의 콧대를 꺾으며, ‘정수리의 일침’을 가합니다. 그것이 아마도 도서관이 갖고 있는 가장 큰 교육적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므로, 전문가가 보호해야만 합니다. 오늘 참석해주신 사서 여러분 모두 사실은, ‘게이트 키퍼’라는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알아채지 못하셨겠지만, 그런 겁니다. 사서 여러분은 게이트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게이트 저편에는 상당히 ‘위험한 것’이 펼쳐져 있습니다. 따라서 초보가 비무장으로 들어가면 위험합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문지기가 있습니다. 이 앞에는 이세계가 펼쳐져 있으므로 전문가의 안내가 필요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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