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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녀의 교육론 "학교 도서관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 (4/5)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10. 7. 13:15

    아까도 대기실에서 짧게 말씀을 나누었는데요, 하시모토 도오루가 오사카 부()지사*가 되고 나서, 도서관에 대한 그의 탄압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상 그는 우선 공무원 영역, 그 다음에는 교육과 의료, 그리고 분라쿠 같은 전통 문화 유산을 핀포인트로 겨냥해 망가뜨렸지요. 이런 분야 선별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정확했습니다. 그가 노렸던 것은 전부 ‘다른 세계로 통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세계로 통하는 길’은 뭐가 되었든 전부 가로막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건 돈과 욕정이라는 거죠. 권력과 재력을 모든 인간이 바라고 있는 거니까, 그것 말고는 이 세상에 존재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 가공할 만한 천박하고 격렬한 세상 안에 모든 사람을 가둬버렸습니다. 하시모토 도오루의 이런 열의를 띤 ‘다른 세계 파괴하기’는 상당히 공을 들인 작업물입니다.

    (* 오사카 시의 인구는 약 300만 명으로 이는 파리, 부산과 비슷함.

    오사카 부의 인구는 총 약 800만 명으로 이는 도쿄 23구와 비슷함.

    이러한 오사카 시와 오사카 부의 통합을 십수년 동안 주장하는 하시모토 도오루와 오사카 유신회는 2008~2010년 경 집권을 시작함. - 옮긴이)

     

    현재 학교 현장은 학생들에게 시험을 부과하고, 그 성과로 ‘줄세우기[格付け]’ 하는 평가 기관 비슷한 곳이 되어버린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교육기관의 목표는 학생들을 심사, 평가하고 줄세우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성숙을 지원하는 장()이라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라는 것은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봐도 도통 알 수 없는 존재’ 입니다. 그래도 됩니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학생들을 똑같은 테두리에 맞춰놓고, 똑같은 과제를 부여하여, 그 성과로 줄을 세우는 건,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잘못된 접근 방식입니다.

     

     

    옛날 옛적 일본에서는 어린이들이란 7세까지는 ‘성스러운 존재’로 다룬다는 법칙이 있었습니다. 와타나베 교지 씨(1930~2022. 사상사학자, 역사가, 평론가. - 옮긴이)의 책 <가버린 세상의 추억[逝きし世の面影]>를 보면, 개화기[幕末] 일본에 도래한 외국인들이, 귀여움 받고 자라는 일본 어린이들을 보고서 놀라워하는 묘사가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특별히 어린이들을 사랑해서 그런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애틋한 마음에 그러는 게 아니라, ‘아직 세상의 규칙을 적용해서는 아니 되는, 열외적인 존재’로서 어린이를 경원시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본은 그게 중세 이래로 전통적인 풍습이었습니다. 어린이는 7세 무렵까지는 ‘다른 세계’와 이어져 있는 ‘성스러운 존재’인 겁니다. 그런데 일정 연령에 이르면, 그 연결이 끊어지게 됩니다. 유년기의 끝이란, 다른 세계와의 연결이 끊어져버린 연령에 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사람은 ‘성스러운 존재’에서 ‘속된 존재’가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 세상 것이 아닌 것’과 이 세상에 다리를 놓는 존재에는 기본적으로 아명(兒名)을 붙이는 관습이 우리 일본인들에게는 있지 않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슈텐 동자’ ‘이바라키 동자’ (이상 “도깨비” - 옮긴이) ‘야세 동자’* 등 말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질서를 따르지 않습니다. 소 치는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당대 일본 열도에 서식하는 가장 큰 짐승인 소를 다루는 자이기 때문에, 성스러운 존재인 겁니다. 따라서 어른이 되어도 아이 모습을 하고, 아명을 썼습니다. 교 우와라베[京童]**도 마찬가지입니다. 딱 꼬집어서 아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다 큰 어른이지만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므로, 어린이 청소년으로 분류되었습니다.

    (* 야세 동자: 어린이 모습을 한 그들은 세세손손 교토의 일정한 구역에 머물며 天皇의 가마를 졌다 한다. - 옮긴이)

    (** 옮긴이: 교토 젊은이. 일본의 버금가는 대학인 교토대에 다니는 학생들의 학풍 역시 지금도 유별나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아명을 붙이는 사례에는 선박*이 있습니다. ‘무슨 무슨 마루’ 하는 식으로요. (마루丸; 마로麻呂가 변한 말로, 이러한 작명법에 따른 유명인은 귀족이자 2차대전 직전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가 있다 – 옮긴이) 해양이나 하천과 같이 소용돌이치는 야생적인 에너지의 세계와 인간 세계 사이를 ‘중개하는’ 존재이므로, 선박 역시 어린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는 절반은 야생임과 동시에 절반은 문명이므로, 야생과 인간 세상 사이를 중개할 수 있습니다.

    (* 옮긴이: 보통 한국에서 우키시마 호라고 부르는 배의 원래 이름은 ‘우키시마 마루’.)

     

    도검의 사례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일본도에는 보통 아명이 붙습니다. ‘거미 베는 아해(즈치구모土蜘蛛 - 옮긴이)’나 ‘새끼 여우 아해(고카지小鍛冶 - 옮긴이)’와 같이, 이름난 일본도에는 무슨 무슨 ‘마루’라는 아명이 주어집니다.

     

    저는 무도 수행을 하고 있고, 그 일환으로 ‘이아이(발도술, 거합 - 옮긴이) 검술’을 수련하고 있어서 도검 소지 허가증이 있습니다만,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진검을 들고 한번 서 보면, 일본도는 이 세상 아닌 다른 세상과 통해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일본도를 뽑고 자세를 취하면, 자연의, 야생의 거대한 에너지가 일본도를 통해 발동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자신의 신체가 에너지의 통로가 되어있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도로, 일본 무장들이 착용했던 철제 투구를 벱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근력으로 투구를 벨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투구를 베어버린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일본도가 베어먹은 흔적이 있는 투구도 얼마든지 잔존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일본도를 갖고서는 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도를 통해 발동하는 무언가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다름 아닌 자연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진검을 갖고서 검술을 수련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바입니다. 일본도는 자연의 힘과 인간의 힘 사이를 가교합니다. 따라서 아명을 붙입니다. 그러한 전통적인 ‘어린이’관이 전통적으로 일본에는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 전혀 되새겨지지 않는 것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학교라는 것은 사실 이 ‘성스러운 존재’ 와 같은 어린이 청소년을 그 본래 의미대로 받아들여, 이 학생들을 천천히 천천히 ‘성스러운 존재’로부터 분리시켜 나가는 장소인 겁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와 결부되어 있는 학생들을 능숙한 솜씨로 외부 혹은 다른 세계로부터 분리시켜, 현세로 데리고 오는, 참으로 세심한 분리 작업 같은 것을 교사들은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교 교실도 무도 도장과 마찬가지로, ‘초월적인 존재’나 이세계와의 교류가 일어나는 장()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매우 신중하게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주례(周禮)>를 살펴보면 사대부가 익혀야 한다는, 군자의 ‘육예(六藝)’라는 전통관이 있습니다. 육예란 예(((((()를 이릅니다.

     

    여기서 첫째가 예()입니다. 군주가 학습해야 할 제일가는 학문이 예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귀신’을 섬길 때의 예법입니다. ‘귀신’이란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을 이릅니다. 다른 세계와 잇닿아 있는 존재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존재를 섬기기 위한 올바른 매너를 우선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는 악(), 다시 말해 음악을 익힙니다. 짧게 얘기하자면, 음악은 시간 의식의 확대를 의미합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양쪽의 영역에 촉수를 뻗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청취한다는 행위가 불가능합니다. 리듬과 멜로디 같은 요소로서의 ‘이제는 들리지 않는 소리’와 ‘아직은 들리지 않는 소리’를 지금 이곳에서 청취할 수 없으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 옮긴이: 매우 중요하므로 부디 함께 읽어주십시오. https://ogdb.tistory.com/418 )

     

    ()는 활쏘기입니다. 무도 전반을 가리킵니다. ()는 야생 동물을 다스려서 인간 세계에 유용한 노력을 시키는 능력을 이릅니다. 자고로 무()란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것’을 의미했는데, 이는 일본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사()와 어()는 무도에 해당합니다.

     

    도서관의 임무를 꼽자면 저는 이러한 육예 가운데 ‘예()’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여러분은 ‘게이트 키퍼’, 문지기라고 제가 방금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학교라는 장(), 말인 즉 학생들을 ‘저쪽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이동시키는, 매우 민감한 작업이 이루어지는 장()입니다. 반쯤은 야생의 존재인 우리 아이들을 문명화시켜 가는 겁니다. 물론, 그들 입장에서는 고통을 수반하는 과정입니다. 그 성장 과정을 교원들은 지원합니다. 그게 여러분들의 임무입니다.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현재 굉장히 많습니다. 왜 학교를 안 가는 걸까요? 제가 보기에는 학생들 내면에 존재하는 ‘수수께끼같은 것’, ‘미스테리한 것’을 0점 처리하는 현행 학교 교육을 그 아이들은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근대적이고 현실적인 교육 이론은 어린이 청소년을 그저 ‘작은 어른’ ‘무능한 어른’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아이들에게 어떤 외경의 염, 다시 말해 경의를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양호실 등교라는 것이 있는 세상입니다. 교실에는 출석하지 않지만, 양호실에는 갑니다. 학생들은 직감적으로 아는 겁니다. 의료 분야는, 그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학교 교육과는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하는 활동이라는 것을요. 보건교사는 대개 여성분이 맡습니다. 보건교사는 간호사 계통입니다. 그리고 간호사는 그 기원을 따져보면 마녀 계통으로 이어집니다. 프랑스어로 산파를 sage femme라고 일컫습니다. ‘지혜 있는 여자’ 라는 뜻입니다. 전근대까지 이러한 ‘지혜 있는 여자’들이 약을 짓고, 병을 다스리며, 출산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은 여러 차례 교황청으로부터 ‘이단을 신봉하는 마녀’로 정죄받아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와 청소년만큼은 아는 겁니다. ‘! 양호실에 마녀가 산다’ 는 걸요. 마녀이니 오히려 안심이 됩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머글’ 이지만, 보건실에는 마녀, 세속의 가치관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움직이는 마녀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사서 교사의 경우도 ‘도서관에 마녀가 산다’고 학생들이 느끼게 되면, ‘도서실 등교’ 역시 일어날 법한 일입니다. 교실로 향하지 않는 학생이 등교해서는 곧장 도서실로 가는 겁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얘기입니다. 양호실로 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서관으로 직행하여, 거기서 하루 종일 책을 읽는 아이가 나와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아이들을 환대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여러분은 게이트 키퍼, 즉 문지기이기 때문입니다.

     

    게이트 키퍼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외부로 통하는 문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사회의 현실적인 가치관이 적용되지 않는 세상이 있는 법입니다. 그런 세상으로의 접근은 말하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일과도 같은데, 거기서 ‘이 세상 것이 아닌 것’과 조우하는 일이 학생들에게도 가능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런 지하 2층에 푹 빠져들면 그것 역시 위험한 일이므로, 제한 시간이 초과되면 현실 세계로 다시 끌어냅니다. 그 점, 문지기로서의 수완을 잘 발휘해야 할 부분입니다.

     

     

    제가 도장에서 설파하는 내용도 사실은 이런 맥락입니다. 저희 유소년부는 이르면 4세부터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여기서 무엇을 배우는 걸까요? 무도를 수행하면 예의범절을 익힐 수 있다든지 애국심이 함양된다고 지껄이는 궐자가 있습니다만, 그런 걸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애국심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국민국가 따위의 잡된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라, 어떻게 해서 ‘귀신’을 섬길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도장에서 배워갈 것은 극론하자면 단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은 우리 아이들에게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경의를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도장에 들어올 때, 정면을 향해 제대로 ‘자레이[座禮]’를 행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도장을 차린다는 게 여간한 일이 아닙니다. 저는 대학에서 아이키도부를 지도하였을 적에 공설 체육관을 빌리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일장기나 비상구 표지가 있으면 있었지, ‘가미다나(神棚; 신주단지와 비슷한 개념 - 옮긴이)’는 없었습니다. 물론 저희 가이후칸 도장에는 ‘가미다나’를 마련했습니다. ‘가미다나’도 좋고, 불단이나 십자가도 좋은데 이는 외부로 향하는 통로와도 같은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이런 것들이 공설 체육관보다도 높은 공공적 성격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미다나 류에는 세속의 가치관이 통하지 않는 것이 존재합니다. 여기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자신의 이해나 공감이 닿지 않는 대상에는 우선 적절한 거리를 둔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예의범절을 몸에 익히는 것, 그것이 무도를 배운다는 것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도장에 들어서서, 수련을 시작하기에 앞서, 반드시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읍하며, 수련을 마치면 ‘감사합니다’라고 소리 내어 말합니다. 사범인 제가 먼저 제창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제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제자가 되겠습니다만, 이들이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리니 제가 ‘오냐. 가르쳐주마’ 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시키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제가 하는 ‘잘 부탁드립니다’는 도장을 향해 하는 말입니다. 앞으로 잠시동안 이 도장에서 수련하겠사오니 수련을 잘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아무도 부상을 입지 않도록, 부디 이 자리에 있는 문인들을 지켜주십시오, 하고 도장에게 간원하는 것입니다.

     

    이는 야구 경기가 시작되기에 앞서 투수가 모자를 벗고서 홈에 예를 표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건 심판에게 짐짓 공손히 스트라이크 판정을 잘 좀 봐달라고 부탁하는 게 아닙니다. 이 의식은 to the ball, to the field 의식입니다. 이제부터 9회까지 시합을 합니다, 부디 훌륭한 게임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겁니다.

     

    도장에서 행하는 인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부디 수련을 잘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하고 읍하는 겁니다. 그런 식의 절대적인 ‘장()에 대한 경의’를 필요로 합니다. 이것 하나만큼은 유소년부 문인들에게도 귀가 따갑도록 가르칩니다. 저에게 경의를 표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도장에 부속하는 게이트 키퍼, 즉 문지기입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과 엮이는 때에 어떻게 해야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선학으로부터 전수받은 방식을 다소나마 압니다. 따라서, 제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얘기입니다. 산을 오를 적에, 안내인이 하는 말을 들으라는 것과도 같습니다. 초심자가 함부로 행동하면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자택 바로 아래에 있는 1층 도장으로 내려와서, 간밤에 닫혀 있던 도장 문을 열고 의식을 행합니다. 축문, 반야심경, 부동명왕의 진언을 차례로 읊은 다음, ‘린 표 도 샤 가이 진 레쓰 자이 젠’* 하고 주문을 외우며 표식을 긋습니다. 이리하여 도장은 영적으로 정화됩니다. 이게 제가 매일 행하는 성무일과입니다. 저 역시 게이트 키퍼니까요.

    (* 원문 臨兵闘者皆陣烈在前. 아홉 자로 이루어진 호신법이라 이를 또한 九字라고도 한다. 뜻은 “임한 병사와 싸우는 자, 모두 진열하여 앞에 선다”. 아이키도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는 대동류 합기 유술의 창시자인 다케다 소가쿠는 이러한 수행도를 수행하였다 한다. - 옮긴이)

     

     

    제가 생각하기로는 여러분도 지극히 자연스레 저와 비슷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아침이 되어 여러분이 담당하고 있는 도서실 문을 열 때, 열 몇 시간 정도 아무도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던 곳에 들어서면,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기 마련입니다. 고요히 아무 말 없는 서가를 향해, 저도 모르게 손을 모으고 싶은 마음이 든 적 없으신가요. 엄청난 수의 서책이 끝없이 세워져 있는 장소에는 그러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신사나 사찰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 비슷한 분위기입니다. 도서관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을 때, 저도 모르게 예를 표하고 싶어지는, 저도 모르게 합장을 하고 싶어지는, 그러한 느낌을 학생들이 가져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도서관의 존재 의의를 다 한 게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도서관은 유용한 지식을 얻기 위한 시설이 아닙니다. 결과론적으로는 물론 다양한 정보나 지식을 얻게 됩니다만, 그에 한 박자 앞서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서, 조금이라도 슬기롭게, 조금이라도 성장하고 싶다는 마음이 발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다음 볼 시험 범위에 나오니까, 과제를 써야 하니까 읽는 건,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현세적인 이익에 봉사하기 위한 독서를 하려거든 도서관이 필요하지 않으며, 사서도 필요없습니다. 그래, 읽지 않는 것보단 장하지만, 그것은 서책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서책은 통념보다 신성한 것이기 마련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흔치 않습니다만, 저는 줄기차게 이와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성스러운 서책을 섬기는 일종의 성직자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사서와 교사 모두 오늘에 와서는 모두 노동자가 되어 놓아서, 성직자라는 자각들이 없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노동자입니다. 여러분은 응당 고용환경의 개선 등 노동자로서 투쟁해야 하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성직자와 노동자의 이중화를 사명으로 하고 있음을 유념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교육이나 의료 세계에 몸담게 되는 사람들은, 역시 어떤 종류의 경향성을 띠고 있습니다. 선택할 만 하니까 선택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게이트를 지키게 됩니다.

     

    따라서, 하시모토 도오루 같은 사람은 그걸 눈치챘던 겁니다. 교육, 의료 등의 분야에는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이 열려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강자, 경쟁에서 이긴 자가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반면에 약자, 경쟁의 패자는 쭈그리고 살라는 게 그들의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현세의 권위나 가치와는 관련 없는 것이 이 사회에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용납치 않습니다. 따라서 문을 전부 닫습니다. 닫을 뿐만이 아니고, 용접한 뒤 철문까지 달아서, 다시는 ‘초월적인 것’이 이 세상에 새어들어와 우리 아이들이 지적 성숙에 이르게 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 듭니다.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감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까지 핀포인트로 인간의 감정 생활과 종교적 감수성을 풍양케 만드는 기관을 닥치는 대로 망가뜨릴 수가 없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오직 현세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기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승부 난 게 모든 걸 결정합니다. 상대적인 우열, 승패, 강약만이 문제시됩니다. 여기까지 오면 영락 없는 반지성주의입니다만, 그 이상으로 ‘외부’에 대한 증오심에 의해 그들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에 많은 일본인들이 박수 갈채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성적, 감성적, 영성적인 성숙을 거부하겠다는 선언에 동의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말세적인 풍경입니다.

     

     

    출처: http://blog.tatsuru.com/2023/09/09_092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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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九字 호신법에 대한 참고문헌:

     

    (...) 한 명 친하게 지내고 있는 치료가인 삼축수정법의 이케가미 로쿠로 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요, 이케가미 선생에게 때때로 대학병원에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게 된’ 환자가 온다고 합니다. 대학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의료 행위는 다 해 보았는데도 전혀 차도가 없는 환자라도 이케가미 선생은 ‘어쩐지 낫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받는다고 합니다.

     

    물론 이케가미 선생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언젠가 대학병원으로부터 전신이 마비된 여고생이 실려 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케가미 선생은 그때 일단 9자 주문을 외면서 손가락으로 허공에 세로 4, 가로 5줄을 긋고 주술을 부렸다고 합니다. 임병투자개진열재전 하고 말이지요. 그러자 그 소녀의 마비가 풀렸다고 합니다.” (<배움엔 끝이 없다> 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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