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과 지성-윤리의 상관성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 레비나스에 의한 후설 시간론 비판인용 2023. 10. 6. 07:16
제일 첫 음이 울리기 시작하고 그러고 나서 두 번째 음이 도래하고 그러고 나서 세 번째 음이 도래한다. 이하 계속(...) 두 번째 음이 울리기 시작할 때 나는 (...) 첫 번째 음은 더는 듣지 않는다. 이하 똑같다. 그러므로 (...) 지각에서는 나는 멜로디를 듣지 않고 단지 개개의 현재에 울리는 음을 들을 뿐이다. 멜로디를 경험하고 사라진 부분이 나에게 대상적이라는 것은 (...) 기억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이고 또한 내가 그때마다 음이 도래했을 때 그것으로 모든 것이다 (...) 라고 전제하지 않는 것은 앞을 내다보는 예기 덕분이다.
후설이 말한 대로 멜로디나 리듬, 그루브나 스윙 등 대략 우리가 맛볼 수 있는 모든 음악적 기쁨은 '더는 들리지 않는 음'이 아직 들리고(점유retention) '아직 들리지 않은 음'이 벌써 들리는(예지protention) 훌륭한 능력 빼고는 있을 수 없다. 현전하지 않는 것을 생생하게 감지할 수 있는 능력 없이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도 감상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마도 인류는 그 여명기의 어느 시점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감상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그 기쁨을 증폭하기 위해서는 '이미 지나가버린 음'을 가능한 한 길게 머물게 하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음'을 가능한 한 멀리까지 예측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인류가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임박해 오는 것, 즉 '사자'라는 개념을 손에 넣고 장송의례를 시작한 것도 '초월자'라는 개념을 손에 넣고 기도를 시작한 것도, 이러한 행위는 모두 '존재하지 않은 것'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감지하는 능력을 빼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사람과'의 영장류들 중에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이외에는 현재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존재는 없다. 그것은 인간 이외에 사자를 애도하는 존재도, 귀신을 섬기는 존재도 없다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 의한다.
인간의 지성과 윤리성을 구성하는 것은 성숙한 시간 의식이다. 시간 의식의 깊이와 폭이 지성과 윤리성을 한계 짓는다. 그러나 후설은 시간 의식의 구조를 해명하기 위해서 음악을 듣는 경험을 가져오면서도 '음악을 누리는 방법에는 개인차가 있는 것 아닐까'하는 물음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똑같은 음악을 들어도 거기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음악적 기쁨에는 개인마다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곡을 오랫동안 들어온 청자라고 하면 처음에 울린 악음의 기억과 지휘자가 마지막에 지휘봉을 놓은 후 침묵의 예기를 연결하는 몇 분을, 악음으로 가득차고 무수한 화음이 중첩하고 무수한 리듬이 몰려드는 두텁고 풍부한 음악적 시간으로서 누릴 수 있다. 나아가 음악적 소양이 깊으면 그 곡이 어떠한 음악사적 원천으로부터 아이디어를 길어냈는지, 지휘자와 연주자가 어떠한 선행 사례를 염두에 두어 어떻게 오리지널리티를 만들어내려고 했는지까지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훈련을 받지 않은 청자가 경험할 수 있는 쾌락은 그것보다도 훨씬 적다. 음악을 기억하는 능력이 불충분하면 어떤 선율이 앞에서 연주된 악장에 담긴 선율의 변주라는 것도 앞 절에서 설정된 물음에 대한 회답이라는 것도 알 수 없다. 악음을 예측하는 능력이 불충분하면 예상한 악음이 출현한 것을 기뻐할 수도 없고 예측을 미묘하게 벗어난 악음이 출현한 것에 경탄할 수도 없다.
이처럼 음악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가 인간의 지적 능력 전반의 차이와 상관하고 있다는 것을 고대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대 사람들은 음악을 누리는 능력을 향상하는 것을 우선적인 교육 과제로 들었다.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교양인의 필수과목이었던 '자유 7과'에서도, 고대 중국의 '군자의 육예(六藝)'에서도 음악을 빼놓지 않고 있다.
시라가와 시즈카(白川静)의 『자통[字通]』에 따르면 '樂'(악)은 '무늬가 있는 손방울(手鈴) 모양'의 상형문자다. 이 글자는 '고대 샤먼이 방울을 울려 신을 부르고 신을 즐겁게 하고 병을 낫게 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음악이 종교적・주술적 의례에 꼭 필요한 것은 '음악을 듣는 능력'과 '신령을 섬기는 능력', '귀신의 임박을 감지하는 능력'이 같은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 인용자)
우치다 다쓰루, 『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 시간론: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 흐르는 시간에 관하여』, 박동섭 옮김, 갈라파고스, 300~303쪽.'인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게 무슨 냄새야? (1) 2023.10.10 병법의 달인, 무도의 이치 (0) 2023.10.06 Twice Born (0) 2023.10.01 비밀스럽게 움직이기 (0) 2023.10.01 형세의 전환 (0) 2023.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