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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1|30 내가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이유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7. 18. 14:57

    엄선 멍청이 잡문집 Simple man simple dream

     

    90년대를 통틀어 여기저기에 써놓은 ‘바보 에세이’가 100편 이상 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그대로 폐지가 되어 사라질 운명의 텍스트가 되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제법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고로(우리 형이라든가가 그렇습니다만) 서랍 저 깊숙한 곳에서 꺼내온 옛 원고를 인터넷 상에 복각하려는 참입니다. 이름하여 Simple man simple dream. 제가 좋아하는 J.D. 사우저의 작품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바보같은 남자의 한심한 꿈’입니다. updated 10 February 1999

     

    ○ 내가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이유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 싫다.

     

    뭔가 남에게 폐를 끼치면서,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다’ 하고 굳게 믿는데 한 점 의심도 없는 사람만큼 무척 성가신 자도 없다.

     

    ‘정의로운 사람’은 금세 분노한다. ‘정의로운 사람’의 분노는 사적인 분노가 아닌, 공적인 분노이므로 손쓸 새도 없이 ‘정의로운 사람’은 분노한다.

     

    ‘정의로운 사람’은 타인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의로운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곧 ‘비판자’가 무지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사악하다는 증거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또한 ‘세상의 작동 원리를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정의로운 사람’에게 이해하지 못할 일은 없다.

     

    생각해보면, 이제까지의 내 인생은 (이라고 하면 과장이지만) ‘정의로운 사람’과 싸워온 역사였다.

     

    처음에 나를 철저히라고까지 해도 좋을 정도로 때려댄 것은 6~70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당시 세상에는 부정이 만연하기에 이르러, 많은 젊은이들이 (그리고 ‘젊은이들’을 두둔함으로서 ‘젊음’을 증명하려던 ‘아저씨’들의 일부가) 엄청나게 ‘화를 냈다’. 그 무렵의 나는 발랄하면서도 경쾌한 대학생이었던 탓에, 공부같은 건 전혀 하지 않고 알바로 번 돈을 여자에게 바치는 (지금의 나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의) 퇴폐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치다 주: 지금도 ‘공부따윈 안 하는’ 것만은 변하지 않았지만, 일하며 번 돈을 수련에 아낌없이 쓰고, 학생들에게 뜯긴다는 건설적인 패턴으로 옮아갔다.)

     

    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쳐들어와서는 호되게 몰아부치곤 했다. 그들은 사실 간단히 나를 ‘쁘띠 부르주아 향락주의자’라는 것으로 분류해두고서는,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얼마나 도덕성을 결여했으며, 얼마나 ‘체제’에 봉사하고 있는지를 논리정연하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나 자신이 ‘칠칠치 못한 놈’이라는 것 정도는 남에게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비판을 전부 반론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순진한 구석도 있어서 그 비판을 받아들여 나 자신을 ‘프롤레타리아적’으로 다시금 형성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마르크스 같은 것을 읽었다.

     

    왈가왈부하는 것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보면 마르크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독일인 철학자는 독일어로 사고하고, 독일 풍의 음식을 먹고, 독일 풍의 옷 등을 입으며 살고 있기 때문에 ‘독일적인 사고방식’에 흠뻑 젖어있는 바보 멍청이들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오오, 이 무슨 과격한 주장이더냐’ 하고 감격한 나머지, 어째서 마르크스는 독일어로 생각하고, 독일 풍의 생활을 하는데도 ‘독일적인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았는가, 하는 당연한 의문에 봉착했다. 답을 찾으려 했지만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언젠가 엥겔스가 ‘자본론’ 서문인가 어딘가에 ‘마르크스가 당대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그가 천재였기 때문이다’라고 쓴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악마와도 같은 지략이다. 과연, ‘자신은 현명하고, 타인은 어리석다’는 것을 우선 전제로 해 두면, 타인이 틀렸다는 것은 ‘증명’할 필요도 없이 자명하리라. 하지만, 분명히 그런 것을 ‘논점 선취’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이렇게 말하며 ‘마르크스주의자’에게 흠칫흠칫 반론을 제기해 보았더니, 더욱 추궁당하고 말았다.

     

    ‘마르크스를 의심하는 것 자체가 우선 네놈이 ‘쁘띠 부르주아’라는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이다’라는 것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와 결별했다. 이것이 내가 ‘정의로운 사람’에게 진저리치게 된 최초의 경험이다.

     

    그 다음에 나를 심문한 것은 ‘페미니스트’들이었다.

     

    나는 정숙한 여성이 좋다. (그다지 정숙하지 않아도 좋다.)

    (우치다 주: 이건 옛날 얘기이므로 착각하지 말 것. 지금은 어떠한 여성 앞이라고 할지라도 내 마음은 금강불괴입니다.)

     

    여성에게 밥을 해준다든가, 술을 따라준다든가 하는 데에 인색한 것은 아니다. 여성을 위해 무거운 짐을 들어준다든가, 자리를 양보한다든가, 문을 열어준다든가 하고 있다.

     

    하면 페미니스트들이 쳐들어와서 나를 ‘가부장주의자’라고 분석하고서는 실컷 매도해주었다. 여성을 비호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여성 혐오의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남자라는 권력성에 취해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자각이 없는 거야’.

     

    나는 (아직까지는 순진한 마음이 남아있는 탓에) 곧바로 우에노 치즈코나 줄리아 크리스테바나 뤼스 이리가레의 책을 읽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진짜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남성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흠뻑 젖어있는 한편, 여성은 억압받고 있으므로 이러한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우며, 그 덕분에 남성보다도 세상의 작동 원리를 잘 알고 있다’고 어딘가에서 이미 읽었던 로직이 쓰여져 있었다.

     

    같은 변호를 하는 상황에 두 번 말려들 정도로 나는 어리석지 않다. 아무튼 페미니즘과의 전쟁에 대해 쓰는 것은 이쯤 해 두고 다음 주에 이어서 쓰겠다.

     

     

    전주에 얘기가 도중에 끝나버려서 이어서 쓴다. ‘정의로운 페미니스트’가 가져다주는 재앙에 대한 얘기를 계속하겠다.

     

    ‘정의로운 페미니스트’의 특징은 우선 화가 나 있다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명확한 것은, 화가 나 있는 사람을 상대로 하는 토론에서는 이길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올바르다고 딱 잘라 믿으며 신념을 가지고 화내는 사람에게 조곤조곤 이유를 들려주고, 그 신념에 대해 재고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악어에게 다이어트의 필요성을 설명해주기만큼이나 어렵다.

     

    ‘정의로운 페미니스트’는 다음과 같은 전제를 채용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남성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고, 여성은 그 압제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다’.

     

    집에서 밥을 한다든가, 취사 세탁을 한다든가,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준다든가 하는 게 ‘노예 노동’이고, 회사에서 상사에게 알랑거린다든가, 거래처에서 갑질을 한다든가, 자금 마련에 분주한다든가, 여사원에게 경멸받는다든가 하는 일들이 ‘특권적 활동’이라는 전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니, 백 보 양보해서 인정하기로 하자.

    과연 가사노동에는 임금이 지불되지 않으므로,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인 흐름과 선연한 연관을 갖고 있지 않다. 따분하기만 하고, 달성감도 없다. 그렇게 보면 타당하다.

     

    그래서 임금노동에 취로하려고 해 보아도, 여성의 고용조건은 남성에 비해 확연히 나쁘다. 출세길도 상당히 막혀 있고, 여러 지원도 거의 받을 수 없다. 그것은 사실이다. 남성은 열맞춰 일을 척척 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여성에게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하면 화가 날 법하다.

     

    그러나, 사회적인 불평등이 있다는 것과 ‘피억압자인 여성은 이 틀려먹은 세상의 구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특권 향유층인 남성들은, 이 세상의 원리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연관이 없다.

     

    내 분명치 않은 기억에 의하면, 이 논법의 원형은 죄르지 루카치의 고전적 명저 <역사와 계급의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의 눈에 세계는 계급적으로 보이고, 부르주아의 눈에는 세계가 비계급적으로 보인다’고 썼다. 그리고 물론 ‘프롤레타리아’의 눈에 비친 것이 세계의 진짜 모습인 것이다.

     

    이것과 페미니스트의 로직은 같다.

     

    페미니스트의 눈에 사회는 ‘가부장주의적’으로 보이는데, 내 눈에 사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가부장주의자 바보 멍청이여서 사회의 진상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룰에 따라 게임을 하고 있을 때, 누구는 계속 지기만 하고 누구는 이기기만 한다면, 룰의 구조에 불평등이 있다고 추론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패배자는 룰을 잘 이해하고 있지만, 이기기만 하는 자는 룰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추론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세상의 작동 원리’를 통찰할 만한 지성을 결여하고 있다든가, 자신의 눈에 ‘비늘’이 씌워져 있다는 것은 깨끗이 인정해두기로 하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눈에는 비늘따윈 씌워져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타인의 말을 내가 신뢰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루카치의 ‘프롤레타리아’가 그렇듯이, 페미니스트도 또한 ‘페미니스트 색안경’으로 세상을 본다. 검은 안경을 쓰고 보면 세상이 검게 보이고, 녹색 안경을 쓰고 보면 녹색으로 보인다. 어느 쪽이 ‘바르게 보이는가’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모두 자기 좋을 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현상을 해석하는 것이다. 어떠한 해석도 ‘진리’를 참칭할 권리는 없다.

     

    <다케시의 TV 태클>이라는 토크쇼에서 다지마 요코라는 유명한 페미니스트 학자가 곧잘 호통을 친다. 내가 아는 한, 그녀를 설득해 그 주장을 철회케 하는 데 성공한 대담자는 한 사람도 없다.

    (우치다 주: 저번주에 이 방송에서 아라시야마 고자부로가 다지마 요코를 비판했더니 다지마 씨가 화나서 스튜디오를 나가버렸다. 여전히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음미하는 능력이 없는 지성은 불모의 지성이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는 결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들이 ‘정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 싫다.

     

    앞으로, 많은 남자들은 남녀차별의 철폐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 노력을, 남자들을 호통친다든가 바보 취급하는 것으로써 경주케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관두는 편이 좋다.

     

    나는 예언한다. 성차별은 확실히 해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는 그 ‘필승 불패의 논법’과 그 ‘정의로움’ 탓에,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반드시 망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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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http://www.tatsuru.com/columns/simple/01.html

     

    Simple man simple dream

    : updated 10 February 1999 Simple man simple dream -1 「研究史」に書き記したとおり、この10年ほど、あちこちに書き散らした「バカ・エッセイ」が100篇以上あります。ほんらいは、そのまま反古とな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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