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2|30 국제사회란 무엇인가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7. 21. 07:01
다음으로는 ‘세상에 관해’.
이 글은 상당히 옛날 일에 속하는데, 걸프전 뒤에 쓴 것 같다. 나도 때로는 국제정치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일이 있다. 내가 항상 ‘타자’라든가 ‘억압’이라든가 ‘극의’라든가 하는 고담준론만 생각하는 것으로 여겼던 학생 제군은 차제에 마음을 고쳐 먹을 것.
걸프전 무렵부터 ‘국제공헌’이라는 슬로건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국제사회에 있어서 명예로운 지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해야만 한다’는 논법이 마구잡이로 눈에 들어온다.
이러한 말을 염치도 없이 입에 담는 인간을 나는 믿지 않고 있다.
애초에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가 그것을 ‘공헌’이라든가 ‘명예’라든가 하는 설명하는 패거리는, ‘사리사욕’을 위해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자와 같다고 옛날부터 근수가 정해져 있다.
‘공헌’이란 원칙으로서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행하는 것일 터이다. 유엔 안보 상임 이사국에 추천을 받을만한 정치적 ‘대가’를 기대하고 행하는 정치적 행위는 보통 ‘엽관 활동’이라고 한다.
자기가 스스로 ‘칭찬해 줘, 칭찬해 줘’ 하며 세간에 요구하는 행위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명예’라고 말하지 않는다. 국제정치 용어로는, 그런 보상은 비스마르크식에 비교하면 그저 ‘사탕’으로 불린다.
그건 둘째치고, 문제는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국제사회’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국제사회’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선진국 클럽’이며, 보다 엄밀히 얘기하면 미국에 관한 것이다.
나는 단언하건대 지금 ‘국제공헌’을 소리 높여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국제 관계’란 ‘대미 관계’이며, ‘국제화’는 ‘어메리커나이즈’이고, ‘국제교류’란 ‘미국과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면 그 사람은 ‘국제적인 비즈니스맨’이다. 브로드웨이의 극장에서 한 번이라도 출연했다면 그 사람은 ‘국제적인 아티스트’이다. 뉴잉글랜드 근처의 대학에서 한 번이라도 교단에 선 경험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국제적인 문화인’이다.
그렇지만 파리에서 라멘집을 한다고 해도 ‘국제적인 비즈니스맨’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싱가포르의 소녀들이 열광한다고 해도 ‘국제적인 아티스트’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울란바토르에서 우물 파기의 지도를 해도 ‘국제적인 문화인’이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일본 이외의 나라와 연계되는 것이 ‘국제관계’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착각이다. 미국과 관계하는 것, 그것만이 일본에 있어서의 ‘국제’라는 호칭에 어울리는 행위인 것이다.
‘국제화’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국제학과’라는 명칭의 섹션이 최근 많이 생겨났다. 일본 이외의 나라들과 문화적인 풍성함을 배우고 흡수하는 것이 만약 ‘국제화’의 본래 의미라면, 그런 곳에서는 티벳의 명상법이라든가 발리의 가면무도라든가 가우초 목동의 기술이라든가를 가르쳐도 좋을 성싶다. 그러나, ‘국제학과’에서는 그러한 것을 절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거기에서 가르치는 것은 ‘영어 회화’뿐이다.
그런 것이다. ‘어쨌든 영어로 말하게 되는 것’이 현대 일본에 있어서의 ‘국제화’란 것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것을 합리화하는 근사한 로직. ‘왜냐면, 영어는 국제어니까 영어만 할 수 있다면 프랑스인과도 독일인과도 러시아인과도 중국인과도 세네갈인과도... 국제교류 할 수 있지 않나요!’
유감스럽습니다.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영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지금 일본에서는 모음 전부를 이중모음으로 발음하는 캘리포니아 사투리의 ‘미국어’와 미국인적인 리액션과 미국인적인 제스처와 미국인적 가치관을 습득한다는 것, 즉 ‘오하시 교센 되기’ ‘다카이치 사나에 되기’와 이콜인 것이다. (우치다 주: 옛날 사례라서 미안합니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이제 아무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당시에는 TV에 엄청 나왔는걸요.)
‘국제화’된 사람의 시선은 그저 미국과 일본을 신경증적으로 왕복하는 것뿐이다. ‘미국에서는 이런데, 일본에서는 이렇지 않다’는 것을 시시콜콜 들려주며, 일본인을 교화 계몽하는 것이 ‘국제화’라고 굳게 믿고 있다.
‘국제인’의 눈이 미국 이외의 나라로 향하는 일은 좀체 없다. 가령 그들이 미국 이외의 나라들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어도, 그것은 그들이 ‘미국인이 보듯이’ 프랑스나 독일, 러시아, 중국을 보는 방식을 습득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영어가 국제어가 아니라는 것은, 미국인이 영어를 술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게 전혀 ‘국제화’가 아니라는 것만 보아도 증명이 가능하다.
확실히 그들은 세계 어느 곳에 가도 자신의 나라에 있는 것과 같이 어려움 없이 의사소통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그 탓에 그들은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다른 나라들의 습속이나 가치관을 존중하는 것에 있어서, 스와힐리어 국민이나 랩어 국민에 비교해 봤을 때 탁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미국인은 프랑스 수도를 ‘파리스’라고 부른다. 그것을 듣게 되면 프랑스인은 그 무신경함에 전율한다. ‘어미의 자음은 발음하지 않는다’ 정도의 타문화 룰조차 지키지 않는 사람을 보통 ‘국제적’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시금 말하지만 ‘영어는 국제어가 아니다’. 영어는 그저 세계 최대 정치적 강국의 국어에 지나지 않는다. ‘영어를 습득하는 것은 국제화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강대국의 국어를 학습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세계 최강국의 정략에 따른다’는 것은 ‘국제사회에의 공헌’이 아니다.
나는 일본 정부의 대외 정책 그 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강대국에 아첨하는 것은 하나의 현명한 선택지이다. ‘영어 학습’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강자의 문화를 추종하는 것은 평범한 인간적 태도이다. 다만, 그것을 ‘국제’라는 미명으로 눙치는 것은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출처: http://www.tatsuru.com/columns/simple/01.html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이다나베紀伊田辺 성지순례 여행 (0) 2021.07.24 '직함은 어떻게 써드릴까요?' (우치다 타츠루) (0) 2021.07.24 01-1|30 내가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이유 (3) 2021.07.18 M으로부터 온 편지 (0) 2021.06.19 고통스러운 성장에 따르는 달콤한 대가 (2) 2021.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