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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으로부터 온 편지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6. 19. 16:35
옛 친구이자 프랑스인인 M***으로부터 오랜만에 메일이 왔다. 미스테리한 내용의 의뢰였다. 우리들은 예전에 어느 대학에서 함께 프랑스어를 가르쳤던 동료다. 우리 딸과 동갑내기인 따님이 있어서, 아이들끼리 서로 금방 친해졌다. 그런 것도 있고 해서 그 뒤로도 가족 단위로 사귀게 되었다. 내가 고베로 옮겨가게 된 해에는 ‘프랑스에 놀러오시게나’ 하며 초청을 해와 여름 내내 그의 고향 근처인 프랑스 남쪽 해안에서 보냈다.
그는 일본을 무대로 한 <이토 씨>라는 단편집을 써뒀는데 그것을 일본에서 출판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번역을 해 준 적이 있다. 그때 여름동안 해안가에서 둘이 초고를 살피며 ‘이 대목을 일본어로 어떻게 옮기면 좋을까’ 하는 식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토 씨>는 웰메이드 단편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명의 프랑스인 저자가 쓴 소설을 출판해줄 만한 곳이 일본에는 없어서 결국 프랑스 출판사에서 나오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 책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해서 M***이 품었던 작가의 꿈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교육학 학위를 취득한 뒤 일본의 대학에서 종신교수가 될 생각이었으나 잘되지 않았고, 그대로 평생 ‘외국인인 채로’ 어학강사가 되는 미래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일본을 떠났다. 그리고 아프리카로 이주해 영화산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종종 보내오는 편지를 통해, 이혼하고 나서 새 파트너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아프리카에서 정착하게 된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랬는데, 어느날 아래와 같은 메일이 왔다.
인생 황혼기에 접어들어, ‘만약 다른 인생을 살았더라면...’ 하고 가슴이 사무치는 일은 남녀를 불문하고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라고는 보지만, 그럼에도 M***이 보낸 편지는 애절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나서, 자신이 M***이 사랑했던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 연락해 주기 바란다. 물론, 알고서 모른채 한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 뭐가 어찌 되었든 M***은 자신의 편지를 그이에게 전달해 주고자 하는 바람만 있을 뿐이므로 그 목적만큼은 달성된 것이니까.
첫 편지는 내게 보낸 개인적인 것이고, 나머지는 그 여성에게 보낸 것이다. 비록 나에게 보낸 편지는 사적인 내용이기는 하지만, 올려두지 않으면 의미가 반감할 것을 염려하여 일부 고유명사를 가린 채 공개한다.
벗에게
자네에게 보내는 이 메시지는 아마 내가 이제까지 보내왔던 것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될 성싶네.
우선 자네가 몸 성히, 내가 알고 있던 자상하고 배려심 넘치는 인간적인 자네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으면 좋겠네.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말하는 것은, 자네는 내가 지금 고백하려고 하는 것을 들어줄만한 단 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네.
이 메일에는 한 통의 편지가 첨부되어 있어. 제목은 ‘게이코에게 보내는 편지’야. 나는 어느날, 꿈에서 깬 뒤에 이것을 썼다네. 그 꿈은 나를 깊이 뒤흔들어놓았지.
우선 자네는 이 편지부터 읽어주게나. 나는 이 편지를 게이코가 읽어주기를 바란다네. 나는 게이코가 이 편지를 읽었으면 해서 그녀에게 메일을 보냈어. 그러나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네.
게이코를 찾으려는 일을 도와주지 않겠는가. 그녀의 성은 ‘****’야. 올해 60이 되었겠지. 결혼하고 나서 아들인지 딸인지 한두명이 있어. 고향은 ****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음대 학생이었는데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었지. 정말로 재능있는 피아니스트였어.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이 편지를 일본어로 번역해서 자네 블로그에 올려주었으면 한다는 거야. 편지는 두 쪽째 써나가고 있는데, 좀 길어질지도 모르겠어.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네.
이 편지가 그녀 손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네. 그녀야말로 자네 글의 독자가 될 만한 이니까 말일세.
어찌되었든 나는 두 달만 있으면 71살이 된다네. 내가 꾼 꿈은 엄청난 명확함을 가지고서 나를 뒤흔들었어. 내가 살았을지도 모르는 인생, 그리고 내가 살지 못했던 인생에 대해 찍은 한 편의 영화와도 같았으니 말이야.
게이코는 단편집 <이토 씨>에 등장하는 ‘마리코’의 모델이 되었던 여성이야. 자네는 인생이 참으로 영원한 회귀같다고 느낀 적은 없나. 여러가지 일들은 다시금 반복된다네.
이런 어려운 부탁을 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자네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겠네.
애정을 담아
M***
게이코에게 보내는 편지
꿈이 아니었더라면…
하고서 잠에서 깼다. 꿈이 아니었으면 할 정도로 놀랄 만한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꿈을 꾸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흔히 보듯 ‘이야기 속의 이야기’같이. 이야기 속의 이야기, 인생 가운데 이야기. 지금도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혹은 꿈에서 깨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인생을 길게 살다 보니, 참으로 오래 살다 보니, 자그마치 사십 년이나 세월을 보낸 뒤에 나는 꿈 속에서 그대를 다시금 재회하고 나서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잠에서 깼다. 또렷하게 ‘만약 꿈이 아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게이코, 내가 사랑했던 이여. 일생 사랑해왔던 이여. 나는 이제서야 그대를 떠올려냈다. 아니, 떠올려내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싶었다. 나는 자신의 모험을 하며 살고 싶었다. 자신의 파란을 겪으며 살고 싶었다. 자신이 뻗어낸 가지에서 얻은 행복을 살고 싶었다. 자신의 끝없는 고통을 살고 싶었다. 나는 너무나 젊었다. 우리는 너무나 젊었다. 나는 나 자신의 불안을 잊고 싶었던 거야. 뭘 하든, 뭘 꾸미든, 언제나 불안은 떠나지 않았다. 그 탓에 우리들은 우리가 살았어야 했던 인생을, 살 수 있었던 인생을 살지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해. ‘만약’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택했더라면... 인생에 있어서의 이 ‘만약’ 이란 것이 우리들을 우리들의 세월 가운데 존재케 했고, 존속시켜왔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만약’ 그래야만 했던 것이었다면…
나는 그대와 인생을 함께할 수 있었다. 내가 그때 달리던 열차에서 뛰어내리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을 거야. 하지만 알다시피 나는 도망쳤다.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도피해 다른 운명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 꿈에서 깬 뒤에, 경탄해 마지않을 동시에 두려운 꿈에서 깬 뒤에, 나는 자신을 향해, 그리고 그대를 향해 고한다. ‘게이코, 나는 그대와 함께 살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바라건대는 그대와 함께 죽고자 한다.’
그대와 함께 죽는다는 것. 참으로 슬픈 말이며, 참으로 드라마틱한 말이다. 보통 사람은 꺼내지 않는 말이다. 보통은 ‘사랑하는 이여, 그대와 함께 살고 싶소’ 라고 하지. 그리고, 나는 분명히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단언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날, 꿈에서 깬 그 아침에.
꿈에서 나는 그대와 재회했다. 신주쿠의 카페에 앉아있는 젊은 일본인 여성으로서가 아닌, 그대가 훗날 그렇게 될 법한 아름다운 여성으로.
내가 지금 이 나이에 이르러 말하는 것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대와 함께 죽고 싶다는 것뿐이다. 긴 세월이 지난, 굉장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긴 세월이 지난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다. 게이코, 그것은 내가 영혼의 저 깊은 곳에서부터 바라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5월 16일이다. 오늘은 그대의 생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어도 상관 없다. 오늘은 그대의 생일이며 우리의 생일이다. 지금 나는 케냐에 있다. 아프리카에 있는 케냐다. 그리고, 스무 살 때의 게이코가 내게 말했던 것을 떠올린다. ‘언니 요코는 유럽에 가고 싶어해. 파리나 런던에. 하지만, 나는 아프리카에 가고 싶어.’
그대의 여린 입술에서 나온 그 말은 예언과도 같았다. 그리하여 그대의 입술은 나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운명 그 자체에 대해 말했다.
꿈일까, 아니면 꿈의 잔향일까.
나는 그다지 꿈이란 걸 꾸지 않는다. 아주 가끔 꾼다. 기억나는 꿈의 내용은 자신이 어디 있었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멍하게 떠올리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나는 정말이지 실제 영화와도 같은 꿈을 꾸고 난 뒤 잠에서 깼다. 꿈 속은 일본이었는데, 우리들은 아프리카의 케냐에서 출발해 막 도착한 참이었다. 막스와 함께 있었는데, 내가 ‘일본 경험자’로서 그에게 가이드 역할 같은 것을 해주게 되었다. 막스는 동그란 안경을 쓴 장신의 남자인데, 케냐에서 나와 애니메이션 영화제작 프로젝트를 했다. 그 테마 중 하나가 일본이었는데, 꿈과의 관련은 딱 거기까지다. 우리들이 프로젝트를 위해 활용한 것은 직업적인 커넥션과 내 친구들이 서로 엮인 것으로, 그때 후쿠오카 선생이라는 전문가가 개발한 흙덩어리를 사용해 케냐산 식물을 기르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꿈 속에서 우리들, 우리들은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에서 일본으로 초대받은 듯했다. 어쨌든 우리들의 프로젝트는 일본에서 얼마간 호평을 들은 것 같았다. 아무튼 꿈이니까 자세한 건 모른다.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도로나 레스토랑, 호텔 같은 장면의 세부사항으로써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애매하고 뒤섞인 채로 산란되어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기억이 갑자기 선명해져서 훤히 트이게 되었다. 나는 연단같은 곳 옆에 앉아있다. 방 안에는 많은 청중들이 있다. 어쨌든 나는 이 주의 깊은 일본인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한 모양이다. 분명 나를 일본에 방문케 한 프로젝트와 관련된 기자회견같은 것이 있었으리라. 일본은 내가 청춘을 보낸 땅이다. 청년으로서 처음으로 싸운 곳이며, 어른으로서의 진정한 인생이 시작된 땅이기도 하다.
박수가 있었다. 아마 얘기가 다 끝난 것이다. 사람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그대가 보였다.
처음에는 내가 바라다보이는 쪽에 여성이 한 사람 앉아있다는 것밖에는 알지 못했다. 연단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여성은 이제 더 이상 젊지는 않았지만, 무척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인사를 하러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에게 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보냈다. 그때, 나는 그것이 그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이코, 머나먼 옛 연인. 순간 그대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까지 긴 세월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채우며 내 안에서 흘러넘쳐 내 숨을 멎게 만들었다. 나는 정신이 들고 보니 그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방 안의 소음도, 사람들의 말소리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은 윤곽을 잃었다. 그리고, 웃음을 지은 채로 다가가는 나를 그대는 바라보았다. 나는 그때 거의 그대의 가까이에 다가가 분명치 못한, 쉰 목소리로 ‘게이코’ 하고 그대의 이름을 불렀다. 나를 올려다보는 그대의 눈이 빛났다. 그대의 입술이 살짝 열리며, ‘노오오오오’ 하고 가라앉은 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기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마음의 한가운데에서 솟아오르는, 사랑이 담긴 헐떡댐이었다.
(2021-06-15 14:51)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http://blog.tatsuru.com/2021/06/15_1451.html'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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