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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운 성장에 따르는 달콤한 대가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6. 15. 12:10
<복잡화의 교육론>에서 고도성장기에 행정비용이 가장 불어났음을 논했다. 다스리기에 까다로운 상태가 되면 경제가 성장하고 문화적 영향력도 높아진다. 한편 지금 일본처럼 ‘통치하기 쉬운 상태’가 되면 경기는 침체되고 문화도 힘을 잃는다. 그 ‘요점’을 조금이나마 써둔다.
지난 30년 동안 중산층의 몰락과 노동자 계급의 빈곤화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행정비용의 삭감은 반드시 ‘중산층의 도넛화 현상’을 의도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계 각국의 사례에 비추어 보아도 타당합니다.
근대사를 종단적으로 찬찬히 뜯어보면 알 수 있는데, 중산계급이 발흥하면 민주화투쟁이 일어납니다. 시민들이 어느정도 경제적으로 풍족해지면 권리의식이 싹트게 됩니다. 언론의 자유, 사상과 종교의 자유,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게 됩니다. 결국 시민혁명이 일어나 근대시민사회가 성립합니다. 이것은 정해진 수순입니다. 왕정이나 제정을 대신해 민주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혁명이라는 것은, 무너진 정치체제 입장에서 보면 ‘행정비용이 최대화된 상태’인 것입니다. 어쨌든 행정조직에서도 군대에서도 경찰에서도 상부의 명령이 하달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행정비용이 통치자의 부담능력을 초과하면 체제가 타도됩니다. 민주화의 진행이라는 것은 시민이 정부에 대한 요구를 점점 증대시켜가는 것이므로 기존의 정치체제로 치자면 그것은 ‘행정비용의 급증’이 됩니다.
일본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고도성장기라는 것은 일본의 국력이 급격히 신장된 시기입니다. 경제력도, 국제사회에서의 존재감도, 문화적 영향력도 모두 확대되었습니다. 그런데, 잊어버리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본 사회의 행정비용은 그때가 1945년 이래 가장 높았습니다. 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전 일본 국민의 중산층화’가 달성되면서 시민의 살림살이가 해를 거듭할수록 넉넉해져갔던 시기에 일본은 가장 혁명적이었습니다.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 그리고 학생운동 모두가 참으로 이 시기에 절정기를 맞았습니다. 혁신 지자체가 일본에 생기게 되었습니다. 행정부의 통제가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했던 시기가 일본의 고도성장기와 부합합니다. 이 사실을 많은 사람이 잊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는 중요한 법칙입니다. 국민이 잘살게 되고, 보다 많은 자유를 요구하게 되며, 권리의식에 눈뜨게 되면 행정비용이 불어납니다. 사회적 유동성이 높아지면 국민을 관리하기 어렵게 됩니다. 하지만 시민이 자유로이 활동하면서 모빌리티가 높아지는 시기에 국력이 급격히 증대합니다. 내가 그 시대를 몸소 체험해봤으므로 잘 알고 있습니다.
1966년부터 70년, 그러니까 학생운동 정국 때 말인데요. 일본 거의 모든 대학이 바리케이드로 봉쇄되고, 수업이 중단되었으며, 1969년에는 야스다 강당이 ‘함락’되었고, 도쿄대 입시가 취소되었습니다. 1970년 11월에는 미시마 유키오가 개인적인 ‘쿠데타’를 획책하며 할복자살했습니다. 이러한 5년 사이에 달성한 경제성장률은 10.9%. 전후 최고인 겁니다.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정치적 소란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에 일본인은 동시에 굉장한 기세로 경제활동을 영위했습니다. 그것은 이 시기에 십대 이십대를 보냈던 인간으로서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뜨거워져 있던 때에 사람들은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열광적이었습니다. 일본의 대학이 ‘사실상 무법 상태’였던 였던 때에 일본의 경제는 상상도 못할 기세로 급성장한 것입니다. 이 사실로부터 어떠한 법칙성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사람이 전에 존재했었는지의 여부를, 나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민적 자유를 구가하고 있는 사회는 통치자에게 있어서 관리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시민에게는 대단히 살기 편한 사회다’라는 것을 내 또래의 세대는 실감으로써 뼛속 깊이 주지하고 있습니다.
행정비용이 높은 사회는 활동적이며, 행정비용이 낮은 사회는 비활동적입니다. 그러한 것은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입니다만, 조직 관리 비용을 ‘절대선’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심플한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혹 떼려다 하나 더 붙이고 온다’ 고 감히 말하려는 참입니다. 사소한 결점을 손보려다가 본질을 압살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60년대 후반은 나로 말하자면 중학생으로부터 대학 신입생 시대에 이르는 시기입니다만, 시민적 자유가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국가의 통제가 점점 약해져 가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국가 뿐만이 아니고, 여러가지 제도적 통제가 느슨해져가는 게 어린 눈에도 분명히 보였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일본 사회가 자유로워지기 시작해서, 고1부터 고2 시절에는 갑자기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래서 70년대에 학생운동이 종식된 후, 일단 정부에 의해 학생들의 정치적 자유를 제약하기 위한 정책이 차례로 쇄도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먼저 실시한 것이 ‘등록금 인상’이었습니다. 국립대의 등록금을 단숨에 세 배로 올렸습니다.
내가 입학한 1970년에 도쿄대의 입학금은 4000엔, 한 학기 수업료가 6000엔이었습니다. 그러니까 1만엔 권 한 장을 내고 입학수속을 끝낸 것입니다. 50여 년 전이므로 물가가 지금보다 훨씬 쌌습니다. 메밀국수가 60엔, 커피가 70엔, 고타르 담배 한 갑이 80엔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시급이 500엔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시간 일해서 한 달치 등록금을 낸 셈입니다.
수업료가 싸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고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고학생’이라는 것은 자신이 일해서 학비를 조달하는 학생을 의미합니다만, 내가 대학생이었던 시절에는 고학생이 잔뜩 있었습니다. 시급 500엔이라는 것은 상당히 조건이 좋은 아르바이트였으므로, 같이 일하던 친구들은 거의 모두 생활비를 자기가 해결하고, 수업료도 냈으며, 개중에는 부모님께 송금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지방에서 상경한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도쿄 태생이라 하더라도 집에서 나와 살았던 학생들은 부모님의 관리 하에 놓여 있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언제 일어나든, 언제 자든, 무슨 짓을 하든. 공부를 하든, 데모에 나가든, 아르바이트를 하든, 데이트를 하든 부모님은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학생운동이 그만큼 융성했던 것입니다. 부모님의 감독이 없었기 때문에요. 60년대에 운동권이 뿌리내리게 된 것은, 등록금이 굉장히 쌌던 것, 경제성장 덕에 시급이 점점 올라갔던 것, 말 안 듣는 학생들이 편하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던 것 등에 기인합니다. 고도성장이 운동권의 경제적인 기반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눈치 챈 명석한 이가 행정부 내부에 있었던 것이겠죠. 학생들이 이다지도 활동적일 수 있는 것은 ‘돈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돈을 거둬들이자. 그래서 등록금을 갑자기 세 배로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시점에 국립대의 등록금을 세 배로 올릴 필연성같은 건 전혀 없었다구요. 그도 그럴 것이, 고도성장기를 맞아 세입이 척척 국고에 흘러들어가고 있었으니 월 1000엔이라는 국립대 등록금을 3000엔으로 올려도 국가재정상으로 아쉬운 점이 생길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한 이유는 학생들을 고학 못 하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을 경제적으로 부모에게 의존케 해서 부모님의 관리 하에 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등록금은 그저 오르기만 했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향유해야 마땅한 취학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교육행정의 본래 목적으로 본다면, 그것에 역행했던 것입니다. 부모님들에게 학비가 상당히 부담이 되는 상황을 우선 만들어냈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모님에게 있어 학비는 ‘교육 투자’가 됩니다. 지출한 돈을 될 수 있는 한 빠르고 확실하게 회수하고 싶어집니다. 따라서 학생 당사자의 의향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돈이 될 만한 공부’를 목표로 하게 됩니다. 지금 세상에서 받아들여지는 가치관이나 매너에 부합한 인간상에 자신의 아이를 때려맞추는 것이 부모님에게 있어서 시급한 과제가 됩니다. 애써 지불한 등록금을 허사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줄기차게 출결사항과 성적을 모니터하게 됩니다. 딱히 부모님의 마인드셋이 바뀐 게 아니라, 사실 돈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자기 돈이 나가지 않을 때는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마음이 그다지 생기지 않지만, 호주머니에서 상당히 큰 금액을 지출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임박하게 되면 ‘야, 내 돈 낭비하지 마라’고 하고싶어지는 기분이 무럭무럭 자랍니다. ‘학점 땄냐’ ‘졸업은 할 수 있겠냐’ ‘취업준비 하고 있냐’ 고 예전에는 그다지 하지 않던 말(말해도 소극적으로 하던 말)을 소리높여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학생들의 일상생활에 강한 의구심을 갖게 된 부모님에게 감시의 유인을 제공하고자 꾸민 것이 ‘등록금 인상’이었던 것입니다. 이 정책이 참으로 짭짤한 성과를 거두어 학생운동은 단숨에 불길이 사그라들게 되었습니다. 물론 다른 여러가지 역사적 이유가 있을 겁니다만, 가장 주효했던 것은 ‘등록금 인상’ 이었습니다.
경찰이든 공안이든, 공적 기관을 활용해 과격파 학생을 관리하려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듭니다. 수십만이나 되는 과격파 학생만 감시할 인적자원같은 것은 정부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자신의 아이를 밀착 감시케 하는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이게 일본인의 멘털리티에 찰떡같이 들어맞은 덕분에 학생운동 진압에 성공한 겁니다.
현재 국립대의 입학금은 282,000 엔이고 수업료는 535,800 엔입니다. 입학금에다가 중간고사 때까지의 수업료만으로 55만 엔을 준비해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50년 전의 55배입니다. 그때는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수험생이 세뱃돈을 모아둔 ‘돼지저금통’을 깨면 1만엔 정도가 나왔습니다. 요즘 합격발표 시점에 55만 엔을 현금으로 갖고 있는 수험생은 일단 없겠지요. 그래서 지원할 곳에 대한 운신 범위를 ‘물주’인 부모님에게 일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서접수의 결정 권한을 자기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일입니다. ‘고학’을 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부모님이 ‘그딴 거 배워서 어따 써먹겠냐!’고 격노할 만한 전문 분야를 선택해도 ‘내가 학비를 대니 상관 마세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원하지 않았던 입학’을 하게 된 학생이 급격히 늘었습니다. 흥미가 없는데도 부모님이 ‘여기 안 가면 돈 안 준다’고 하니 부득불 진학한 학문 분야에서 학생이 지적 돌파구를 일궈낼 것이라고는 아예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한술 더 떠서, 아이들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으며 부모님의 판단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부모님에게 ‘돈을 하수구에 처박았다’고 후회를 안겨주고자 무의식적인 행동을 합니다. 따분한 얼굴로 통학하고, 최저한도의 공부만 하며, 최하 성적으로 졸업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 두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놀랄만큼 많은 대학생이 이렇게 합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왕 이렇게 될 바에는 본인이 ‘하고싶은’ 걸 하게 해주면 어떨까 하는데요.
어쨌든 등록금 인상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고등학생은 진로결정권을 잃고 대학생은 ‘고학’이라는 선택지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그로 인해 대학생은 자유로움과 패기를 잃고, 학생운동은 일거에 시들해졌으며, 대학은 대단히 관리가 용이해진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야흐로 동시에 일본의 학술적 생산력은 깊은 상처를 입어야만 했습니다.
한 번 더 소리 높여 말씀드립니다만, 조직의 관리비용을 삭감하면 거기에 속한 멤버들은 자유로이 행동하는 것을 금지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단기적으로 조직에 해가 되는 ‘버그’를 제거했으니 컨트롤하기 쉬워져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장기적으로는 집단의 생산력을 사실상 불가역적으로 빼앗게 됩니다.
(2021-06-10 16:29)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등.원제: 成長と統治コスト
출처: http://blog.tatsuru.com/2021/06/10_162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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