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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2> 중국어판 서문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3. 27. 10:18

    중국에 계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제 2권의 중국어 번역본을 내게 되었습니다. 출판에 힘써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이 시리즈는 마르크스의 대표적인 텍스트를 <공산당선언> 에서 <자본론> 까지 추려서, 경제학자 이시카와 야스히로 선생과 내가 이래저래 해설하는 것인데, 전 4권으로 완결될 예정입니다(지금, 나와 이시카와 씨가 제 4권에 쓸 <자본론> 을 두고 편지를 주고받는 중입니다).

    이 책의 기획의도에 대해서는 제 1권에 제법 상세히 써 두었습니다. 중요한 것만 한 번 더 확인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이 책은 일본의 고등학생을 상정 독자로 썼습니다. 부디 일본 고등학생들이 마르크스를 읽어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반 세기 정도 전에, 일본에서 마르크스를 읽는다는 것은 '지적으로 되고자 하는 젊은이' 에게 있어서 일종의 '의무'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지적 습관을 어느 순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전통의 소멸을 이시카와 선생과 나는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디 한 번 더 젊은이들이 마르크스를 손에 들어주기를 바라며 이 시리즈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들이 그저 아무리 힘쓴다 하더라도, 일본에서 다시금 젊은이들이 '지적 의무' 로써 마르크스를 읽는 시대가 돌아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과거 일본 젊은 세대가 기초교양으로 마르크스를 읽었던 것은, 나름대로의 역사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를 읽어야만 하는 역사적 요청이 있어서, 거기에 응해 청년들은 마르크스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기부터 그 역사적 조건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읽지 않게 되었습니다. 딱히 일본의 젊은이들이 지적으로 나태해졌다든가, 독해력이 약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대가 변한 것입니다. 근데,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다는 것일까요? 중국어판 서문에 부쳐, 그것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가설을 쓰고자 합니다.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까지 약 1세기에 걸쳐, 마르크스를 읽는 것은 일본의 청년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지적인 통과의례이자 의무였습니다. 마르크스를 읽지 않으면 '어른 대접' 을 못 받았습니다.

    다만, 이것은 약간 별종의 '의무' 였습니다. 그것은 '마르크스를 읽고 이해하는' 의무이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의무' 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에서의 마르크스 수용은 성서의 수용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지적 청년들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읽을 의무' 가 부과된 도서는 신약성서였습니다. 그때까지 사서오경이 젊은 독서인들에게 필독문헌이었기 때문에, 이는 참으로 커다란 전환이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인에게 있어서 자기 조형의 롤 모델이 중국에서 서양으로 옮아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청년들에게 성서를 읽는 것이란 크리스트 교도가 되기 위한 훈련은 아니었습니다. 어떠한 종교라고 할지라도, 경전을 읽는 것만으로는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의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기도를 올리고, 복식이나 식사의 의례를 지키고, 성무일과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메이지 시대의 지적 청년들에게 요구된 사항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성서를 읽고, 그 가르침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갖는 게 아니라, 우선 학습하는 것이었습니다. 서양인들은 도대체 어떠한 사생관이나 윤리규범으로 자신을 추스르는 것인가, 그것을 아는 것이 후진국 지식인 청년에게 있어서 화급한 과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와 거의 같은 시기에 필독문헌으로 권장된 것이, J.S. 밀의 <자유론> 이나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었던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 책들은 참으로 종교성이 없는 서책입니다. 그렇지만, 성서와 같은 정도로 의무적인 독서목록이었습니다. 그것은 서구의 정치지도자들이 어떠한 통치이념에 기반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인가, 그들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알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제사회에 '신참' 으로 나서게 된 메이지 시대 일본인에게 그것은 필수 정보였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를 읽는 것이 권장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지배하는 자들' 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배웠다면, 이제는 '지배받는 민중들' 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려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당연한 얘기입니다. 만약 서구의 민중 사이에 현행 통치 시스템을 위협할만한, 무언가 커다란 변동이 일어날만한 이론과 운동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 또한 배워둬야만 합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인은 대강 이런 순서로 서구 열강이라는 '국가의 뼈대' 를 알고자 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추론합니다.

    우선 크리스트 교를 학습했습니다. 그것이 서구 국가들의 판단과 행동의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종교로 구축된 세계관. 그것이 여러 문화권에서의 '상수constant' 에 해당합니다. 긴 역사적 시간을 거쳐 천천히 성숙해 온 것이므로 쉬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깊은 층위에서 각 나라 국민의 심성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 문화적 '상수' 라는 궤도상에 이번에는 여러가지 '변수' 가 개입하게 됩니다. 정치•경제 시스템이나 과학 기술, 학문 그리고 예술이 그 '변수' 에 해당합니다.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은, 이들 '변수' 가운데 그 '국가의 뼈대' 에 결정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상수' 의 궤도 위를 운행하는 것에 한정된다는 사실입니다.

    19세기 말에 국제사회에 등장한 후진국 일본이 서구 열강에 의해 식민지화하는 것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속히 서양 국가들의 '상수' 를 발견해야만 했습니다. 메이지 일본의 '근대화' 라는 것은 그 노력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서양 국가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필수적인 정보로써 일본인이 수용했습니다. 서구 각국이 앞으로 극적인 정치경제 시스템의 변동을 겪게 된다면, 그것을 영도하는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이외에는 없을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어째서 일본에서의 마르크스 수용이 '실천' 보다 '학습' 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구와 다른 점은 연구의 깊이나 넓이가 아닙니다. 마르크스 이해가 실천을 위해서였는가, 학습을 위해서였는가, 그 차이입니다.

    서구에서는 노동자든 지식인이든, 마르크스를 '지적 의무' 로써 읽는 사람이 우선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가 마르크스를 손에 든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해야 할 실천사항을 기술 및 설명해주는 것으로써, 입니다. 자신이 행해야 할 행동 지침을 기대하며 읽습니다. 그러한 매우 실천적인 읽기 방식입니다. 거기에 '자신의 일' 이 쓰여져 있다고 생각하는 노동자가 마르크스를 읽습니다. 거기에 '자신의 일' 이 쓰여져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생시몽, 크로포트킨, 바쿠닌 등 마르크스 이외의 서책을 읽습니다. 노동자들은 거기에 '자신의 일' 이 쓰여져 있는 책을 손에 쥡니다. '자신의 일' 이 쓰여져 있지 않는 책은 읽지 않습니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딱히 도덕적 의무라든가 지적 통과의례로써 마르크스를 읽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력이 서구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마르크스를 손에 든 노동자는 그 시점에서 이미 선구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마르크스를 읽습니다. 마치 산상수훈에 귀를 기울이는 유대인들은 그 시점에서 이미 선구적으로 기독교도이며, 기독교도로서 예수의 말을 듣는 것과 같은 구조입니다.

    반대로 자본가나 부르주아에게 마르크스는 독사와도 같이 꺼려 마땅한 것입니다. 그들의 머리 위에 '철퇴' 가 가해질 것이라는 역사적 필연성을 서술해 놓았기 때문에, 읽기는커녕 될 수 있으면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부르주아 지식인 서가에 마르크스 책이 꽂혀 있는 일은 서재 주인의 더없이 시니컬한 태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신사에게는 용납되지 않을 '매너 위반' 으로 간주될 만한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인생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도 도대체 무엇이 쓰여져 있는가 하는 순수한 지적 흥미에 끌려 마르크스를 읽는 경우는, 서양 국가에서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있다고 해도 예외적인 소수에 그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구의 19세기, 20세기 소설 가운데 자신의 출신성분과는 전혀 무관하게, 순수히 지적 호기심으로 마르크스나 크로폿킨 등 혁명가의 책을 읽는 등장인물은, 과문한 탓이지만 본 적이 없습니다.

    일본에서의 마르크스 수용은 그 점이 다릅니다. 일본인은, 마르크스를 손에 들기에 앞서 자신이 선구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인가 반 마르크스주의자인가, 입장을 결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계급투쟁이란 일단 '남 얘기' 였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선언> 은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합니다. 유령이 돌아다니는 무대는 유럽이지, 일본 열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를 '자기 일' 로 읽는 절박한 독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메이지-다이쇼-쇼와 시대에 걸쳐 지적인 젊은이들은 성서, 밀과 스펜서와 밴덤과 로크와 루소를 읽는 것처럼, 같은 맥락에서, 결국 서양 각국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관한 지정학적 관심에 기반해, 마르크스나 크로폿킨을 읽었습니다. 서구의 심층에 깔려 있는 '상수' 를 발굴해내 그 '궤도' 위에 전개될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서입니다. 마르크스 독해의 첫 번째 의의란, 일본식 혁명이론이라기보다는 우선, 살아남기 위한 정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2차대전 이전 일본의 경우, 청년기에 마르크스 키드였던 사람들조차 나중에는 자본가, 리버럴, 불교도, 천황주의자... 등 다채로운 이력들로 분기한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1925년부터 45년까지 시행된 치안유지법으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체포, 투옥되면서 '전향' 을 했습니다. '전향' 이란 고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정치적 신념을 버리는 비통한 결단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인 갑론을박은 둘째치고서, 이 정치 이념은 일본 사회에 적용시킬 수 없다고 인정하는 정관적이면서도 지적인 태도입니다. '전향' 자에게 필요한 일은, 마르크스주의란 결국 '남 얘기' 임을 커밍아웃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 성실한 활동가에게 있어서도, 전향은 심리적으로 결코 곤란한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전향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 뒤 심각한 갈등을 겪지 않은 채, 누구는 천황주의자가 되었고, 누구는 불교에 귀의했고, 누구는 일본 고전이나 고대사 연구에 침잠했으며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아시아 방면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2차대전 이전의 일본 공산당 지도자였던 사노 마나부•나베야마 사다치카는 1933년, 옥중전향에 이르러 코민테른 지휘를 벗어나, '일본 독자적인 일국 사회주의 혁명의 제창'으로 노선 변경할 것을 동지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일본에서의 혁명은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일본적으로, 독창적으로, 개성적으로, 극히 질서적으로 개척' 해야만 한다는 이 성명은 놀랄 만한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즉각 많은 당 간부나 동반 지식인이 여기에 응해 눈사태처럼 우르르 전향했기 때문입니다.

    '눈사태처럼 우르르' 전향한 것은, 그것이 심각한 내적 갈등을 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향자들이 딱히 신의가 부족하다든가 의지가 약한 인간이었다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자였을 때도 아니었을 때도, 본질적으로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정치적 목표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사회를 좀 더 공정하게, 자유로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것을 희망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는 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는 쪽을 우선해보지 않겠나? 나라가 망한다면 공정도 자유도 없을 테니까' 라는 말을 검사가 내세우면, 뭐라고 반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메이지 시대 이래, 일본의 지적 청년들이 서구의 종교나 사상, 학술을 필사적으로 학습한 것은, 서양 각국의 '상수' 를 이해하지 않으면 일본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 일본이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사회모순 해결은 '다음' 문제입니다. 전향자들은 그 순서를 납득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선해야 할 것은 '전쟁에 이겨서 살아남는 것' 이라는 말에 수긍했을 때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자임을 멈추고, 애국자로 '복귀' 했습니다.

    전후에도 사정은 같습니다. 패전의 폐허 위에 서게 된 일본인들은, 미국의 '속국' 신분으로 전락한 일본이 앞으로 주권을 되찾을 찬스가 있을지 자문하기 시작했을 때, 다시금 마르크스를 읽었습니다. 세계 최대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사회논리는 마르크시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960년대 끝자락 당시, 일본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후방 지원기지를 맡은 베트남 특수로 경제적 윤택함을 얻었을 때, 속국민으로서 아시아 농민 학살에 가담했다는 굴욕감과 양심의 가책을 느낀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게걸스럽게 마르크스를 탐독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경이로운 경제성장을 거쳐 미국에 버금가는 경제대국으로 자본주의 '종주국' 의 지위를 위협하게 된 일본인은 마르크스를 읽는 습관을 잃어버렸습니다. '재팬 애즈 넘버 원' 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판국에, 일본인은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쳐주는' 입장으로 옮아갔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서구의 '상수' 를 학습할 필요가 없어젔다고 생각했을 때 일본인들이 마르크스를 읽을 필연성은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사반세기 정도 세월이 흘러, 또다시 마르크스를 읽는 젊은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노골적으로 말하면, 일본은 예전처럼 가난해졌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에서 생생히 묘사한 바와 같이 노동자의 절대적 빈곤화, 계층 양극화, 부르주아의 윤리적 타락이 눈 뜨고는 못 볼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부조리한 사회가 출현했는가. 그것을 제법 시원하게 설명해주는 이론을 찾자니 지금 당장은 마르크스밖에 없다고 젊은이들이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상, 일본 마르크스 수용의 역사적 조건에 대해, 후딱 사견을 써 보았습니다. 복잡한 얘기라서 분량을 상당히 초과해버렸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일본에는 100년에 걸친 풍부하고 농밀한 마르크스 학술 연구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의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어느 정도 이상의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두 사실 가운데는 명확한 모순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중국에서의 마르크스주의가 걸어온 궤적과는 많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순이야말로 일본인의 마르크스 수용이 가진 고유한 역사적 조건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가설입니다.

    일본의 독자는 다른 나라 독자들과 다른 입장에서 마르크스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이점입니다. 동시에, 일본인의 독해 방식으로밖에는 마르크스를 읽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제약입니다. 그래도, 그냥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제 몫을 짊어지고,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세계사적 사업에 참가한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우리 모두의 마르크스 독해 노력이 중국 독자의 마르크스 이해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2021년 3월
    우치다 타츠루

    (2021-03-15 17:50)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http://blog.tatsuru.com/2021/03/15_1750.html

     

    『若者よマルクスを読もう2』中国語版への序文 - 内田樹の研究室

     中国のみなさん、こんにちは。内田樹です。 『若者よマルクスを読もう』第二巻の中国語訳が出ることになりました。翻訳出版の労をとってくださった方々にまずお礼を申し上げます。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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