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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가 학교 교육에 묻고 있는 것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2. 22. 17:43

    팬데믹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단계에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사회상 변화' 를 묻는 것에는 적잖이 조심스러워진다. 그런데, 그러한 미래예측을 행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시점에서 '전조' 로 보이는 것 가운데 몇 가지는 현실화되고, 나머지는 그대로 사라진다. 어떤 것은 실현되고, 어떤 것은 실현되지 않는다. '일어날 법한 일' 가운데 몇 가지는 일어나지 않는다. 어째서 '일어날 법한 일' 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것을 사료해보는 것은 우리들 사회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의 구조' 를 더듬어 보기 위해서 유효한 작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가는 '일어난 일' 에 대해 '그것이 왜 일어났는가' 을 설명해 주지만, '일어났을 법한데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 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역사가의 소관이 아니기에 상관은 없지만, 나는 생각해본다. 지금 코로나 감염 폭증 와중에 있는데, 몇 가지 사회적 변화의 전조가 보인다. 좋은 전조도 있고, 나쁜 전조도 있다. 여기서 그것이 어떻게 될지를 예측해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부터 쓰는 문장은 될 수 있으면 코로나 마무리 후, 1년이나 2년 쯤 뒤에 읽는 것이 흥미로울지도 모른다.

    좋은 전조란 몇 가지 제도가 '약자 기반' 으로 설계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계기가 된 것은 대학의 수업이 2020년 4월부터 온라인화된 것이었다.

    대부분의 대학은 온라인 수업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준비에 힘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지 않은 교원이 '대학 수업은 대면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스승의 헛기침 소리를 가까이서 듣는> 일 없이도 가르침이 성립할 수 있으리오' 라고 깊은 의혹을 품고 있다. 그렇지만, 어쨌든 4월부터 수업을 더듬더듬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버가 다운되고, 소리가 나오지 않는 등 기술적 문제가 있었지만, 수 주에 걸쳐 그러한 문제는 대부분 해결되었다. 그리고 2개월 정도 지났을 때쯤 교원들은 어떤 변화를 느꼈다. 그것은 탈락하는 학생이 적었다는 점이었다.

    이제까지는 5월 연휴(일본은 4월 둘째 주에 개학함 -옮긴이) 가 지나게 되면 수업을 따라갈 수 없어 흥미를 갖지 못하는 학생이 탈락한다. 과목에 따라서는 이수자의 30%가 자취를 감춘다. 이 현상이 온라인 수업에서는 격감했다. 그것에 대해 대학 교원들로부터 흥미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까지 대학이라는 것은 '학생이 주체적으로 배우는 곳' 이었다. 사실이 어찌되었든, 명목상 그랬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배울 의지가 없는 학생에게 교원측이 '손을 뻗어주는' 일이란 것은 없었다. 등교 거부나 학업부진 학생을 케어하는 것은 '학생상담실' 이나 '심리상담실' 의 일이라서, 교원이 수십 수백명 되는 이수자의 출결을 신경쓰는 일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온라인화되자, 결석자에게 유인물을 나눠준다든가, 다음 주 마감인 과제를 전달해줄 수 있었다. '질문이 있으면 이메일을 보내세요' 식으로 메시지를 발신할 수 있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랬더니, 결석자가 다음주에는 나타나게 되었다. 이로써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수업 들을 의욕을 잃은 한 가지 요인에는 '교원에게 개체식별되지 않는다' 는 의식이 있었다는 점이다. 자신이 교실에 있든 없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희박한 존재감과 낮은 자기평가가 그들의 학습의욕을 죽였던 것이다. 그래서 교원이 (온라인이기는 하지만) 고유명으로 이름을 불러준 것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사회적 승인을 얻게 되어, 다소 구원받은 것이다. 그 결과, 1학기가 끝나고 보니 시험 친 학생 수나 과제 제출 건수가 전년도를 상회했고, 평균점수도 높아졌다는 말을 들었다.

    온라인 수업이 이렇게까지 성공적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놀라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오히려 이제까지 우리들 대학 교원이 얼마나 학생들을 대함에 있어 '무자비'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확실히 큰 교실에서 있는 수업의 경우, 교원은 학생을 고유명으로 인지하지 않으며, 대단히 적극적인 학생이 아닌 이상, 복도에서 교원에게 말을 건다든가, 근무시간에 연구실 문을 두드리며 질문하러 오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정도 기초학력이 있고, 수업에 어느정도 흥미도 있으면서, 딱 한 가지 의욕이 없다는 학생들은 사소한 계기로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다지만, 그런 학생을 수업에 '불러들이기' 위한 장치를 대학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대학은 '학습 강자 베이스' 로 제도설계되어 있다. '학습 강자' 는 자신의 흥미를 좇아 과목을 고르고, 연구실에 찾아와 질문하며, 대학이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는 여러가지 교육자원을 활용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고등교육이라는 것이다. 허나, 자신감 부족이나 망설임으로 인해, '그런 것' 을 아무리 해도 할 수 없는 '학습 약자' 인 학생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다수파인 것이다. 우리들은 그들을 대학의 정회원으로서 대우해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학교에는 '학습 약자' 를 위한 학습 트랙도 필요하다. 팬데믹에 의해 강제당한 온라인 수업을 계기로 그것을 많은 대학 교원이 깨달았다. 물론, 이제까지 해왔던 대로 '학습 강자' 가 아카데미아를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구조는 바뀌지 않겠지만, '학습 약자' 를 '불러들이는' 구조를 표준적으로 구비해두는 일에 많은 대학이 이제부터 씨름하게 되리라. 대면수업이 금지되고, 친구를 만들 수 없으며, 동아리 활동도 쉴 수밖에 없게 된 대학교육은 지난 1년 간 커다란 아픔을 겪었지만, 그로부터 배운 것도 있었다.

    한편 고등학생의 자살이 늘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때문에, 고등학생에게 있어서 '즐거운 것' 이 전부 사라졌다. 수학여행도 축제도 운동회도 동아리도 모두 없어졌다. 게다가 전국 일제 휴교의 여파로, 그들은 그 뒤의 '보충수업' 을 강제당하고 있다. 7할까지 수업을 하지 못할 경우 학습지도요령의 요구를 채울 수 없다. 학생들이 수업 내용을 이해했는지 아닌지보다도 학기를 끝내고자 하는 쪽을 우선한다. 지쳐버린 교원들에게도 수업을 이해할 수 없는 학생들을 개별적으로 케어할 여력이 없다. 이렇게 해서 낙오한 학생들은 교실에 남을 이유가 없어진다. 그것이 자살이 늘어난 한 가지 요인이 아닐까 한다는 이야기를 고등학교 현장의 교원으로부터 들었다. 후생성은 고등학생의 자살 증가 주요 원인을 '진로 고민 및 학업 부진' 으로 들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다지 설명이 부족한 게 아닐까.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사태가 역전된 것으로 내게는 보인다. 학교에 있어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회가 알은체를 해주고, 필요로 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닐까. 자신이 이 집단의 정회원이라는 자존감을 맛보게 하는 일이 아닐까.
    전대미문의 코로나는 모처럼 우리들에게 학교교육에 있어서 우리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가일층 근원적으로 바로잡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생각한다.

    (2021-02-21 09:10)

    출처: http://blog.tatsuru.com/2021/02/21_0910.html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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