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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토리의 '기스이 구코汽水空港' 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2. 11. 20:40
【옮긴이: 아래 글은 박 선생님 번역으로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에 수록되었습니다. 2024-05-15】
2021년 1월 17일에 '기스이 구코' 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서점에 초청받아 이야기와 질의응답을 했다. 강연부분만을 채록함.
여기 기스이 구코汽水空港가 지역의 문화적 발신 거점이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만, 비슷한 일이 지금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공통점으로는, 책꽂이가 있고, 커피 마시는 목조 공간쯤 될까요. 새시대의 모델이라는 것은 이데올로기라든지 이념이 아니라, 사실 이미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손의 감촉, 향기라든가 그런 것에 현실감이 있으면 거기에 이미지가 침투력을 갖고 현실 변성력을 발휘합니다.
무엇인가 트렌드가 형성될 때에는, 이미지가 선행합니다. 박사연구원이 되어 처음으로 수업에 들어간 날, 나는 트위드 재킷에 데님 셔츠, 검은색 니트 타이에 보스턴 안경 차림으로 교단에 섰습니다. 그 수업이 끝나자 어떤 학생이 '그렇게 입고 안 더우세요?' 라고 묻기에, 왜 4월 중순 경에 나란 놈은 이런 꼴을 하고 있는지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인디애나 존스 1>(1981) 에서 박사가 모험을 하고 돌아온 뒤,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학생 앞에서 고고학 수업을 하던 때의 스타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저런 모습으로 수업하고 싶다' 고 강렬히 바랐던 탓에, 나는 대학 강사가 되었습니다. 이미지에 끌려서 직업을 고르고 만 것입니다. 이미지에는 그런 현실 변성력이 있습니다.
기스이 구코의 모리 군은 2011년 지진이 일어나자 수도권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서쪽을 향해 도망쳤는데, 돗토리 현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그곳에서 서점을 열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내 젊은 벗님네 아오키 신페이•미아코 부부가 나라현에서 운영하고 있는 'Lucha Libro' 도, 내 친구인 히라카와 가쓰미 군이 도쿄에서 벌이고 있는 '도나리마치 가배' 도 기스이 구코와 이미지가 비슷합니다. 벽 한 쪽에 책꽂이, 나무 탁자, 커피향. 내가 주재하는 '개풍관' 2층도 똑같은 구조입니다. 벽 한 쪽에 책꽂이, 나무 탁자입니다. 거기가 모두에게 열린 공간입니다. 서책이라는 것은 사유재산이 아닌, 공공재입니다. 서책은 읽어도 줄지 않으며, 소유물로써 독점한다 해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책을 중핵으로 하는 공간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개방의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공공성을 갖고 있는 시설로서 도서관 이외에, 사찰 교회당 등의 종교시설 혹은 옛날로 치면 서당 등이 있습니다. 그러한 시설은 기본적으로 항상 찾아오는 사람에게 문이 열려있습니다. 그 안에 발을 들이려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장소에 대한 경의입니다. 열려있는 장에 대한 경의를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받아줍니다.
이를테면, 우리 도장에는 위패단지가 있습니다. 신주는 외부와 통하는 '회로' 입니다. 바깥 세계에 나 있는 문입니다. 공공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지금 이곳 현실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닌, 지금과는 별개의 시간, 별개의 장소와 얽혀있는 회로가 존재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기스이 구코나 Lucha Libro, 도나리마치 가배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열려있는 공공적인 공간' 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공간이 전부 사유화되어 타자의 접근을 불허하는 '퍼스널 스페이스' 로 분단된 사회에 살고 있는 숨막힘에 대항하여, 조금은 바람이 통해도 좋을 공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그것을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공유지란 것은 영어에서 '커먼(common)' 이라고 불립니다. 중세 시절부터 19세기까지 영국의 시골 어디에나 있었던 촌락 공동체의 공유지를 일컫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가축을 방목하고, 고기를 낚으며, 사냥을 하고, 과일이나 버섯을 채취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코뮌(commune)', 이태리에서는 '코무네(comune)' 라고 해서, 발생적으로는 영국 커먼과 동일한 기초공동체가 있었던 것입니다. 공통되는 토지, 종교, 언어, 생활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입니다. 공공을 공동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공동체를 재구축하기 위한 작업이 지금 세계적 규모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들' 이라는 일인칭 복수형이 명백한 리얼리티와 촉감으로 되돌아오는 공동체를 세워나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시라이 사토시, 사이토 고헤이라는 두 젊은 사람들(각각 1977년, 1987년생 -옮긴이) 이 잇달아 '커먼' 을 주제로 한 책을 썼습니다. 나도 비슷한 시기에 <커먼의 재생> 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우연하게도, 공공재를 어떻게 공동적으로 관리할 것인가, 공공재를 공동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공동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 라는 질문들이 높은 긴급성을 띠고 동시다발적으로 전경화했습니다.
지속 가능한 공동체라는 것은, 사적 이해를 기준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이만큼의 재화나 용역을 공동체에 출자하고 있으니 그것에 걸맞는 '보상' 을 요구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만으로는 커먼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커먼을 존립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풍부한 공공재를, '모두가 쓸 수 있는 공공재' 를 제대로 확보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커먼을 형성하고자 한다면 '투자' 가 필요합니다. 구성원 전부가 사재의 일부를 갹출하고, 사적 권리의 일부를 단념하는 것으로써 비로소 공공은 만들어집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내어준 몫보다 더 많은 것을 공공재로부터 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만, 본전을 거두려는 사람들이 과반수를 점하게 된다면 커먼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70 평생을 살면서 세상이 몇 번 뒤집히는 것을 목도해 온 입장에서 말하자면, 1950년대의 도쿄 살이에는 아직 공동성이 남아있었습니다. 가정끼리 왕래가 있었고,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자주 비치는 것처럼 반찬이나 조미료의 품앗이가 일상적이었습니다. 방범, 소방, 공중보건도 지역사회의 책무였습니다. 행정이 아직 충분히 기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역의 안전을 위해 순찰하는 것도, 하수구 청소도 자신들의 생활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게 내가 중학생 때 일인데, 도쿄올림픽 무렵부터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위에서 말했던 느슨한 공동체가 사라졌습니다. 처음으로 벽돌담이 등장해 집과 집 사이의 경계선이 확정되었습니다. 옆집에 놀러가는 것도 뜸해졌습니다.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빈부격차가 생겨난 탓입니다. 전자제품이나 자가용이 있는 집과 없는 집 사이의 차이가 생기니,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퍼스널 스페이스' 를 숨기려 들었습니다. 남들의 질시를 피하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이 부자나라가 되어갈수록 지역사회는 맥없이 해체되어 갔습니다. 이리 간단히 지역 공동성이라는 게 무너지는 것인가 하고 나는 놀랐습니다.
그 뒤, 80년대에는 지역사회에 이어 가족도 해체되었습니다. 무라카미 류와 이토이 시게사토 등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각각 <최후의 가족> <가족 해방> 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내면서, 가족이라는 제도는 이제 유통기한이 다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누군가와 공간이나 생활 습관을 공유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라고 말이죠. 자기가 좋아하는 방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가구를 갖추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좋을 대로 잠자리에 들고 좋을 대로 일어나서, 좋아하는 것을 먹고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여러 미디어가 선전했습니다.
가족 해체는 소비생활을 가속시켰습니다. 이제까지 가족이 '커먼' 으로써 공유하고, 돌려쓰던 모든 물건이 개인화되었습니다. 4인 가족이 집 한 채에서 살던 것이 4개의 부동산 상품이라는 수요가 되고, 냉장고도 세탁기도 TV도 전부 머릿수대로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시장에 '빅 뱅' 이 도래했습니다. '이건 내꺼다. 절대 만지지 마' 라며 공유를 거부하는 마인드 그 자체가 GDP를 끌어올리고, 고도성장의 추진력이 되었습니다. 누구와도 무엇인가를 공유하지 않고, 누구와도 지지고 볶지 않으며 '자기 자신다움' 을 추구하는 '거의 모든 것의 사유화' 가 자본주의에 있어서는 '절대 선' 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결과가 이겁니다.
버블 붕괴 후, 이제 30여 년 째. 일본은 그동안 그저 가난해져만 갔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와 물건을 나눠 갖지 않는다' 라는 마인드만큼은 바뀌지 않았어요. 커먼이라는 것은 한 명 한 명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공공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모든 것에 소유자의 딱지가 붙어있는 고로,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커먼이 없습니다.
내가 꼬마였을 적의 일본은 '공화적인 가난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가난하기는 했지만, 모두가 많은 것을 공유했습니다. 필요한 것은 모두가 돌려쓰고, 순번을 정해 옆집 아이들을 보살펴줬어요. 일본은 다시금 가난해졌습니다. 그러니 그때처럼 물건이나 서비스를 공공의 장에 공탁하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쓰게끔 하는 체제를 다시 한 번 다듬을 때가 왔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한 시대의 변화를 주도해 가는 것은 글월이나 이념이 아니라, 보다 막연한,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입니다. 그 이미지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그것이 결과적으로 커다란 트렌드를 형성한다는 것을 처음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태동하기 시작한 새로운 '커먼' 은 서책을 중심으로 움직여나가는 게 아닐까 하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Lucha Libro 측에서 시작하고 내가 뒤에 가담한 '산가쿠인' 이라는 활동이 있습니다. 재작년 모임이 나라 현에서 있었을 때, '독립서점' '독립출판사' 를 꾸리고 있는 사람들이 몇 명 참가했습니다. 그 중 어촌에서 '나홀로 서점' 을 여신 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서점이 한 곳도 없는 것이 갑갑해서, 스스로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평일에는 다른 생업에 종사하고 주말만 서점을 엽니다. 이쯤되면 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찾아오니, 이야기를 나눕니다.
세토 내해에 위치한, 겨우 150명이 사는 섬에 사설도서관을 여신 분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섬에는 젊은 이주자가 줄을 이어, 인구가 V자 반등을 했다는 모양입니다.
위 사례 모두 공통점은 서책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책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모두와 공유하겠다는 의지가 공통되고 있어요. 서책이라는 것은 외부와의 회로입니다. 책은 독자를 '지금과는 다른 시대' '이곳과는 다른 장소' 에 데려다 주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야기책이 한 권 있는 것만으로도 닫혀있는 공간에 숨구멍이 열리고, 거기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바람의 냄새를 느껴본 사람들이 서책 주위로, 서책이 끌어당기는 흡인력에 의해 모이고 있어요. 21세기 커먼의 재생은 그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외부와 통하는 회로가 열리는 장소에는 독특한 활기가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알아요. 내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야마가타 현의 쓰루오카에는 하구로 산의 야마부시(입산해 특별한 수행을 하는 이로서 인간과 산의 영기를 중재하는 민속신앙과도 결부됨 -옮긴이) 가 지역 곳곳에서 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그 호시노 씨라는 야마부시의 부름을 받아 매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만, 그분이 모여든 젊은이에게 '어째서 이런 곳까지 왔는가?' 라고 물으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재밌어 보이는 느낌이 들어서요'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장소에는 독특한 냄새가 납니다. 그것을 감지한 사람이 모이게 됩니다.
내가 명예교수로 있는 고베여학원대학은 메이지 시대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파송된 2명의 여성 선교사가 개교한 학교입니다. 기독교 금지령이 해제된 직후에 고베에 도착한 이 두 젊은 여성이 연 사설 강습소에 7명의 신입생이 들어왔습니다. 이 7명은 도대체 무엇을 느껴서 그곳으로 간 것일까요? '원어민에게 영어를 배우면 취직에 유리하겠지' 하는 시대는 아니었겠지요. 두 명의 여성 선교사가 가르친 과목인 신학도 영어도 세계사도, 개화기 일본 사회가 요구했던 절박한 '시장 수요' 와는 상관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가르쳐주는 학원이 문을 열자 '거기서 공부하고 싶다' 는 아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분명 '뭔가 잘 모르겠지만, 거기에는 색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를 느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기 일본 사회 어디에도 없는 '세계로 통하는 회로' 를 느낀 것이지요.
앞으로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커먼' 이 생겨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핵심이 되는 것 중의 한 가지는 서책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서책은 사유재가 되기에는 어색한 물건이며, 그래서 새로운 커먼의 기초가 될 수 있습니다. 서책을 통해 우리들은 먼 나라의, 머나먼 시대의 사람들과 잠시나마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서책을 매개로 해 죽은 이와 만나고, 죽은 이들의 삶이나 그 감정을 상상하며 추체험하게 됩니다. 죽은 이와의 연결감, 그것이 여러 공동체의 골격을 이룹니다. 유럽의 커먼이나 코뮌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옛사람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 물건이나 지혜, 기술을 받아들여 다음 세대에게 '패스' 해 나가는 것을 사명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 의해 공동체의 기반이 다져집니다. 21세기의 일본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지방의 거점을 형성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21-02-08 11:25)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http://blog.tatsuru.com/2021/02/08_1125.html'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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