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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흐테르가 증언하는 쇼스타코비치 그리고 「유로지비; holy fool」인용 2023. 12. 13. 05:57
프로코피예프는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떼밀어 벽에 부딪히게 할 수 있는 위험한 인물이기도 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그의 면전에서 3번 협주곡을 연주하던 때의 일이다. 그 학생의 선생은 제2피아노로 반주를 넣고 있었다. 그런데 프로코피예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선생의 멱살을 움켜쥐고 이렇게 소리쳤다. “이 얼간이 같은 자식아! 연주도 할 줄 모르냐? 이 교실에서 나가!” 학생도 아니고 선생에게 말이다. 그는 난폭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쇼스타코비치와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부지고 활기가 넘쳤다. 그런 특성은 내 마음에 들었다. * 어느 날 오데사 오페라극장 앞에서 있었던 일이다. 거리의 가로등이 아직 켜지지 않은 해거름이었다. 어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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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만드는 영화, 영화로 만드는 텍스트 (브뤼노 몽생종)인용 2023. 12. 13. 05:56
우리의 대담을 그냥 옮겨 적기만 해도 된다면 좋겠지만, 그건 도무지 안될 일이었다. 화제들이 두서가 없고 연속성이 전혀 없게 다루어진 데다가, 리흐테르의 대답이 단순한 감탄사이거나 내 질문의 맥락을 벗어난 요령부득의 토막 말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거의 일관성이 없는 천여 쪽의 대담 기록을 바탕으로 연속성이 있어 보이는 하나의 이야기를 재구성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영화 편집 기법이 동원되었다. 글은 비물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터라, 영화를 편집할 때에 비해서 작업에 한결 융통성이 있었다. 예컨대 몇 달 간격을 두고 녹음된 말들을 하나로 합치는 경우, 음향의 분위기에 차이가 많이 나면 영화에서는 그 둘을 연결할 수 없겠지만 나는 그 차이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분명치 않게 발음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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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파에게조차 ‘경계선’을 긋지 말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놓고 우치다 다쓰루가 고찰하는 “폭력을 다스리는 지혜”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12. 5. 12:44
‘폭력’에 관한 물음에 내가 답한 글이 ‘문예춘추 인터넷판’에 올라갔다. 지금 공개되어 있으나, 머지않아 새로운 인터넷 기사에 묻힐 게 자명하므로 이곳 개인 블로그에 남겨 둔다. ー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연일 언론과 SNS에 소름 끼치는 광경이 지나가고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전쟁의 희생자는 언제나 어린이와 병든 이 같은 약자들입니다.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윤리와 도덕은 무력하기만 한 걸까요? ‘압도적인 폭력’을 앞에 두었을 때 우리가 우선 해야 할 일은 ‘압도적인 폭력’을 ‘제어 가능한 폭력’으로 감소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질의 전환이 아니고, 양을 규제하는 것입니다. 국제관계론에서는 ‘위기’를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danger와 risk가 그것입니다. danger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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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owe you.인용 2023. 11. 30. 12:12
그렇다면 세상이 이처럼 발전했는데도 여전히 힘들게 고통받는 사람들이 생기는 까닭이 무엇일까? 왜 세상에서 불행이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네 나이에 이런 문제들을 똑바로 판단하고 이해하기란 무척 어려워. 다만 네가 지금 당장 알아야 할 것이 있단다. 이처럼 불공평한 세상에서 너는 별다른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껏 공부하면서 네가 타고난 재능을 조금씩 키워 나가고 있는데,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은 없다는 거야. 코페르! ‘고마움’에 담긴 진짜 뜻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렴. 흔히들 ‘고맙다.’,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 는 뜻으로 ‘고마움’이라는 말을 쓰고는 하는데, 그 말은 본디 ‘그렇게 되기 어렵다.’, ‘웬만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는 상황에서 쓰는 말이란다. [일본어 有難う 아리가토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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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에 관한 암묵지적 논의인용 2023. 11. 30. 11:21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잘 이해하려면 무의식의 세계를 그려 볼 필요가 있다. 뇌를 커다란 호두처럼 반으로 쪼갠다고 생각해 보자. 위쪽 절반은 의식이 자리하고, 흘러가는 생각들이 담겨 있다. 아래쪽 절반은 무의식이 있고, 호흡과 소화처럼 타고난 프로그램과 걷기와 말하기처럼 창조해 낸 프로그램이 섞여 있다. 운전을 배운다고 상상해 보자. 모퉁이에 접근할 때마다 뇌 위쪽 부위에서 의식적으로 생각한다. “오른 다리를 올려서 왼쪽으로 12센티미터 옮겨 가 페달을 가볍게 눌러라.” 이렇게 몇 달간 의식적인 생각을 이어 나가다 보면 자동 프로그램이 생성되어 생각 없이도 브레이크를 밟게 된다. 브레이크 프로그램이 뇌의 아래쪽 부위, 즉 무의식 속에 정착한 것이다. 그래서 숙련된 운전자는 5시간 동안 운전을 해서 집에 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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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대통령 덴쓰 『電通』 (2/3)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3. 11. 28. 12:33
2012년에 출간된 어떤 책에서 저자 혼마 류(本間龍)는 덴쓰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모습에 대해 다소간 폭로하는 글을 썼다. 덴쓰의 주요 고객사 중 하나인 도쿄전력의 이익을 위해 덴쓰가 행하는 엄격한 언론 통제에 대해서다. 혼마는 광고대행사 구중궁궐의 외부에 있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업계 2위인 하쿠호도에서 18년 동안이나 일하고 있었다. 사기죄로 1년 간 금고형을 선고받고 나서 그는 작가 생활에 몸을 던졌다. 처음에 그는 우선 자신의 감옥 체험을 썼고, 이어서 그가 광고 업계에서 보냈던 나날들에 대해 썼다. 그가 언론을 떡 주무르듯 하기 위해 썼던 여러가지 방법에 대해서다. 2012년 그가 저서 를 냈을 때 대부분의 언론이 일절 보도하지 않았음에도 이 책은 수 개월 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혼마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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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월간일본 인터뷰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11. 24. 14:23
ーー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충돌을 반복해 왔습니다만, 이번에는 폭력성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슬람 조직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자치구 가자에서 공격을 감행했고, 이에 이스라엘은 ‘전시 상황’을 선언한 이래, 철저한 보복 공격을 행하고 있습니다. 서구는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하고 있지만, ‘자위의 범위를 넘어섰다’고 비판하는 나라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저도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 사태는 근대적인 국민국가 사이의 전쟁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포스트모던적인 비국가 집단에 의해 벌어진 테러도 아니거니와, 단순한 민족전쟁이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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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봉건제의 등장: 전 세계 중산층을 향한 경고』 서평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11. 21. 19:40
조엘 코트킨 지음, 데라시타 다키로 옮김, 동양경제신보사 펴냄 제목과 같은 신간의 서평을 동양경제온라인 측에서 의뢰하였으므로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다. 책 제목으로부터 두 가지 사항을 유추해낼 수 있다. 하나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봉건제’가 임박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에 따른 부정적인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부류가 중산층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필자가 얼마 전에 동양경제 지면상에서 소개한 바 있는 서적 『의식 깨인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기만한다』 와 문제의식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부가 극소수 부유층으로 집중되고, 테크자이언트가 국가의 위상을 차지하고, 좌와 우를 막론하고 포퓰리즘이 흥왕하며, 중산층이 몰락하고 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되는 등, 이 모든 의제들은 최근 미국에서 출판되는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