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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만드는 영화, 영화로 만드는 텍스트 (브뤼노 몽생종)인용 2023. 12. 13. 05:56
우리의 대담을 그냥 옮겨 적기만 해도 된다면 좋겠지만, 그건 도무지 안될 일이었다. 화제들이 두서가 없고 연속성이 전혀 없게 다루어진 데다가, 리흐테르의 대답이 단순한 감탄사이거나 내 질문의 맥락을 벗어난 요령부득의 토막 말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거의 일관성이 없는 천여 쪽의 대담 기록을 바탕으로 연속성이 있어 보이는 하나의 이야기를 재구성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영화 편집 기법이 동원되었다. 글은 비물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터라, 영화를 편집할 때에 비해서 작업에 한결 융통성이 있었다. 예컨대 몇 달 간격을 두고 녹음된 말들을 하나로 합치는 경우, 음향의 분위기에 차이가 많이 나면 영화에서는 그 둘을 연결할 수 없겠지만 나는 그 차이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분명치 않게 발음된 단어가 더러 있어도 괘념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사람을 가리킬 때 이름 대신 ‘그’나 ‘그녀’로 부름으로써 그것들을 실명으로 바꾸지 않으면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한 손을 이따금 힘차게 놀리는 바람에 생긴 마이크의 소음도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 책의 1부에 해당하는 ‘리흐테르 자신이 말하는 리흐테르’는 제목 그대로 오로지 그에게서만 나온 이야기일까? 나 자신에게서 나온 부분, 달리 말해서 리흐테르를 빙자한 나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질문에 어떤 방향을 설정함으로써 오랜 기간에 걸쳐 그를 괴롭혔다. 또 그의 이야기를 대화에서 독백으로, 구두에서 문서로 옮김으로써, 다시 말하면 혼돈한 무더기를 그런대로 일관성을 지닌 하나의 구조로 변화시키면서 나 나름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요컨대 나는 이 모험에 열정적으로 관여했고, 그럼으로써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의 몇몇 관심사를 이 독백 속에 옮겨놓았다. 내가 최종적인 집필 단계에서 강조한 에피소드들 중에는 리흐테르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도 있을지 모른다(그는 이러저러한 일화를 들려준 뒤에, ‘하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아요. 음악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요’ 하고 웃으면서 말하곤 했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고 아마도 그의 편에서는 내가 대단히 흥미롭게 여기는 질문들을 그냥 흘려 버린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앎으로써 더 풍요로운 사고를 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야말로 그와 내가 벌인 게임의 가장 만족스러운 측면 중의 하나가 아닐까? 어쨌거나 나는 내가 지어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작업의 최종적인 결과를 놓고 볼 때, 나는 나 자신이 리흐테르에게 충실했다고 확신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진정으로 그렇게 믿는다. (브뤼노 몽생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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