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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흐테르가 증언하는 쇼스타코비치 그리고 「유로지비; holy fool」
    인용 2023. 12. 13. 05:57

    프로코피예프는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떼밀어 벽에 부딪히게 할 수 있는 위험한 인물이기도 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그의 면전에서 3번 협주곡을 연주하던 때의 일이다. 그 학생의 선생은 제2피아노로 반주를 넣고 있었다. 그런데 프로코피예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선생의 멱살을 움켜쥐고 이렇게 소리쳤다. “이 얼간이 같은 자식아! 연주도 할 줄 모르냐? 이 교실에서 나가!” 학생도 아니고 선생에게 말이다.

     

    그는 난폭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쇼스타코비치와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부지고 활기가 넘쳤다. 그런 특성은 내 마음에 들었다.

     

    *

     

    어느 날 오데사 오페라극장 앞에서 있었던 일이다. 거리의 가로등이 아직 켜지지 않은 해거름이었다. 어떤 남자와 마주쳤는데,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을 보니 눈동자가 없이 그냥 하얗게만 보였다. 나는 문득 그 남자가 쇼스타코비치임을 알아차렸다. 마음이 거북했다.

     

    내가 쇼스타코비치를 처음 보고서도 단박에 그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나에게 그의 사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오페라 「카테리나 이스마일로바」의 악보에 있는 사진이었다. 그 오페라에 대해서는 아무런 호감도 느낄 수 없었다. 대본의 자연주의적 특성 때문이었다. 물리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악보마저도 역겨운 접착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 악보를 떠올리면 아직도 냄새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가운데 당시에 내가 알고 있던 것으로는 교향곡과 현악 4중주곡, 그리고 비범한 풍자 오페라 「코」가 있었다. 이 오페라를 나는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보았다. 지휘자는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였다. 그는 프로 정신이 대단히 강한 지휘자였지만 나는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아내인 피아니스트 빅토리야 포스트니코바의 연주를 들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는 상당한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쇼스타코비치를 정식으로 만난 것은 나중에 그가 「유대 민속 시가로부터」 연작의 리허설을 위해 나의 집에 왔을 때였다. 니나 도를리아크와 자라 돌루하노바가 작곡가 자신의 피아노 반주로 그 작품의 초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차이코프스키가 우리를 방문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같은 시기, 1940년대 말에 나는 원고 상태에 있던 그의 9번 교향곡을 초견연주했다. 그의 집에서 한 대의 피아노를 그와 함께 치면서 말이다. 이 연탄은 고문이었다. 그는 일정한 템포로 시작을 하고서는 이내 더 빠르거나 느리게 속도를 바꾸기가 일쑤였다. 또 그가 저음부를 연주하고 있었으니까 페달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지만, 그는 페달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순전히 반주를 하는 대목까지 포함해서 줄곧 포르티시모로 연주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주요 동기들을 뚜렷하게 강조하기 위해 그보다 훨씬 더 세게 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페달을 사용하지 않고 소리에 입체감을 주려는 것은 부질없는 수고였다. 그가 “뚱…… 뚜루루…… 뚜루루룽!” 하는 소리를 계속 중얼대고 있었기 때문에, 그건 더더욱 헛된 노력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서로 알게 되었다. 어찌보면 처음부터 너무 가까이에서 사귄 셈이었다. 그 초견연주에는 친지 몇 사람만이 참관하였다. 연주가 끝나고 코냑으로 축배를 드는 시간이 되었다. 그건 끔찍한 시간이었다. 합석한 사람들이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해서 쇼스타코비치가 내 잔에 끊임없이 술을 따랐기 때문이다. 나는 한 병 이상의 코냑을 마셨다. 그저 예의를 차리느라고 그랬던 것이다. 그런 몹쓸 결함에 나는 너무나 자주 굴복한다. 파티가 늦게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자정 무렵에 기척도 없이 귀가한 그의 첫 번째 부인 니나 바릴리예브나가 문간에 나타났다. 그녀는 정말 미인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겁먹은 기색을 보이며, 우리에게 황망히 손을 내저었다. “어서들 가게, 어서들 가!” 나는 비틀거리며 그의 집을 나섰다가 길가 도랑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인사불성이 되어 거기에서 얼마간 밤을 보냈다. 그러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네이가우스의 집으로 쉬러 갔다. 부인은 새벽 5시면 기운을 돋우기 위해 으레 마시는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가 나를 맞아주었다. 그 뒤로 나는 온종일 잤다.

     

    앞서 말했듯이 쇼스타코비치의 첫 번째 부인은 상당한 미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압적이었고, 음악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피아노 5중주」의 초연 때에 그녀가 보여주었던 표정이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이 빛나는 작품은 초연 때에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세 번째 줄에 앉아 있었다. 박수갈채가 우레와 같이 터져 나오는 동안, 그녀는 ‘이 사람들 미친 거 아냐?’ 하는 듯한 표정으로 홀을 휘휘 둘러보고 있었다.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구가 매우 강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쇼스타코비치의 모든 ‘부인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축에 드는 여자였음이 분명하다.

     

    쇼스타코비치 자신은 자존심이 강하고 마음을 잘 다치는 사람이었다. 므라빈스키가 12번 교향곡의 지휘를 거절했을 때 그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사실 그 곡은 신통치 않은 작품이기는 했다. 그는 나 때문에도 자존심을 다친 적이 있었다. 나는 5중주곡, 3중주곡, 「전주곡과 푸가」 24곡 가운데 16곡 등 그의 작품을 많이 연주했다. 내가 보기에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에 속한다 싶은 것은 모두 연주를 한 셈이다. 따지고 보면 쇼스타코비치는 말러와 차이코프스키를 거쳐 나온 베토벤의 후예이다. 그런데 그는 내가 「전주곡과 푸가」 24곡을 모두 연주하기를 바랐다. 나는 그냥 내가 좋아하는 곡들을 연주하는 것이니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곡들을 뺐다고 해서 그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선택을 언짢게 받아들였다.

     

    그는 신경과민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지극히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어느 날 밤, 네이가우스와 그가 나란히 콘서트 홀에 앉아 있었다. 알렉산드르 가우크가 어떤 교향곡인가를 신통치 않게 지휘하고 있던 연주회였다. 네이가우스가 몸을 기울여 쇼스타코비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내가 보기엔 이거 한심한 걸.” 그러자 쇼스타코비치는 네이가우스를 돌아보며, “맞아요, 겐리흐 구스타보비치. 멋지군요! 훌륭해요!” 네이가우스는 그가 자기 말을 잘못 알아들었음을 깨닫고 자신의 평을 다시 말했다. 그러자 쇼스타코비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 그래요, 정말이지 한심하군요, 한심해요!”

     

    쇼스타코비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벤저민 브리튼과 진정한 우정을 맺었던 것과는 달리, 나와 쇼스타코비치 사이에는 우정이 없었다. 우리가 그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다비트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초연할 때를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그와 함께 있는 것에 익숙해지는 데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는 신경이 너무 예민했고 만성적인 신경쇠약증에 걸려 있었다. 천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에게도 광기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그에게도”라고 말했을까?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나는 광인이 아니다.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다. 어쩌면 나는 광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늘 그런 식이다…….

     

     

    이 녹음(「바이올린 소나타」 - 인용자)(...) 솔직히 고백하건데, 내 마음에 썩 드는 작품이 아니라서 연습하는 동안 쉽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초연은 열렸고 청중의 호응은 굉장했다. 인사를 하러 무대에 올라온 쇼스타코비치는 걷다가 넘어질까 조심조심하면서 우리에게 속삭였다. “청중의 반응이 너무 좋아서 걱정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러다가 말썽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나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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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얀은 템포가 조금 빠르긴 했지만 쇼스타코비치의 10번 교향곡도 아주 훌륭하게 지휘했다. 므라빈스키는 카라얀에 비해서 한결 신중했다. 다른 작곡가에 대해서는 몰라도 쇼스타코비치에 대해서는 그의 해석이 가장 훌륭했다.

     

    므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는 궁합이 잘 맞는다(두 사람의 관계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슈탈의 관계와 비슷하다). 어느 작품과도 비교될 수 없는 이 강렬한 6번 교향곡을 이런 연주로 다시 듣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

    므라빈스키의 얼굴이 초췌하다. (1972- 인용자) 많이 늙은 모습이다... 그 역시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브뤼노 몽생종 엮음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 211~214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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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나는 어떤 탁월한 지휘자(예브게니 므라빈스키 - 인용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다. “, 그 유로지비 말인가? 그 사람은 어떤 연주를 들어도 ‘좋군, 아주 좋아!’라고 한다면서?”

     

    나는 그의 재능을 아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대단한 지휘자는 가끔 유로지비라고 불릴 만한 근거를 나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종교적 광신주의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의 이야기를 하지 말도록 하자. 참새에게 대포를 쏘는 게 전혀 쓸모 없는 낭비라는 건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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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로지비는 러시아 종교적 현상의 하나다. 신중한 소비에트 학자들조차 그것을 민족성이라고 말한다. 유로지비라는 러시아어 단어가 갖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말은 다른 언어에는 없다. 거기에는 다양한 역사적・문화적 뉘앙스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유로지비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렇지만 그는 일부러 모순된 방법, 말하자면 암호를 통하여 자기 예지의 내용을 세상에 말해준다. 그는 실제로 악과 부정을 끊임없이 폭로하면서도 스스로는 바보처럼 처신한다. 유로지비는 아나키스트이며 개인주의자다. 상식적 ‘도덕’ 규범을 파괴하고 관습을 조롱하는 것이 그의 공적 역할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에게는 엄격한 제약과 규범과 금기를 부과한다.

     

    유로지비적 존재(yurodstvo)라는 단어의 기원은 15세기 또는 그보다 더 이전까지 올라간다. 그것은 18세기까지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그 기간 내내 유로지비들은 상황을 폭로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안전할 수 있었다. 권력자들도 일정 한도 안에서는 비판을 하거나 궤도를 벗어나 행동하는 유로지비의 권한을 인정했다. 그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차르든 농민이든 모두가 그들이 뒤죽박죽으로 내뱉는 예언적 언사들을 경청했다. 유로지비적 존재는 대개 선천적으로 타고나지만 자의적으로 선택한 결과일 수도 있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지적 비판이나 항의의 표시로 유로지비가 되었다.

     

    러시아 문화의 구도에서는 스탈린과 쇼스타코비치의 특이한 관계는 지극히 전통적인 것이었다. 차르와 유로지비,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유로지비 역할을 하는 시인과 차르 사이의 양면성을 띤 ‘대화’는 비극적으로 새하얗게 타오르게 된다.

     

    그는 권력과 정면 대결할 수도 없었고 또 이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완전한 복종이 창작력을 죽음으로 몰고 갈 위험이 있음은 그도 분명 알 수 있었다. 그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쇼스타코비치는 두 번째의 위대한 ‘유로지비(yurodivy)’ 작곡가가 되었다. 첫 번째는 무소륵스키였다.

     

    유로지비적 존재의 길로 들어섬으로써 쇼스타코비치는 자기가 하는 모든 이야기에 대한 책임을 포기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가장 고매하고 아름다운 단어들조차 그러했다. 귀에 익은 진리의 선언은 조롱이었음이 드러났다. 반면 조롱은 종종 비극적 진리를 담고 있었다. 그의 음악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작곡가는 의도적으로 ‘종결구가 없는’ 오라토리오를 하나 작곡했다. 처음에는 별로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성악곡 같은 작품에서 청중들이 메시지를 찾아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의 결정이 갑자기 내려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수없는 방황과 주저의 결과였다. 쇼스타코비치의 일상 행동은 어떤 때는 좀 너그럽고 어떤 때는 덜 너그러운 권력자들의 반응에 크게 좌우되었다.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한 과거의 진정한 유로지비들의 행동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쇼스타코비치와 그 친구들의 입장은 대부분 자기 방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었다.

     

    그들은 살아남기를 원했지만 어떠한 대가라도 치르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유로지비의 가면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중요한 것은 쇼스타코비치 자신이 스스로를 유로지비라고 여겼을 뿐 아니라 가까운 친지들에게도 그렇게 통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 음악계에서 ‘유로지비’란 흔히 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증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40~4, 48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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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스타코비치는 무소륵스키와의 이러한 연관성을 대단히 중시했다. 음악학자 아사피예프(Boris Vladimirovich Asafiev)가 쓴 바에 따르면 무소륵스키는 “내면의 모순으로부터 탈출하여 반쯤은 설교적이고 반쯤은 유로지비적인 영역으로 들어가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적 차원에서 스스로를 무소륵스키의 계승자로 간주했었는데, 이제는 가끔 ‘백치’ 노릇을 함으로써 인간적 차원에서도 자신을 무소륵스키와 단단히 묶어놓고 있었다. ‘백치’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 불려지는 무소륵스키의 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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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음악인들은 무소륵스키를 입에 올리기를 정말 좋아한다. 차이콥스키의 애정생활 다음으로 인기 있는 이야깃거리인 게 사실이다. 누구든 마음만 내키면 얼마든지 떠들어대며 그를 비판했다. 동료들은 그를 멍청한 녀석, 심지어는 천치 바보라고도 불렀다. 발라키레프는 “그는 머리가 나빠”라고 했고 스타소프는 “그의 머리는 텅 비었어”라고 했으며 쿠이도 물론 똑같은 노선을 따랐다. “물론 나는 그의 작품이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무소륵스키에게는 사생활이든 음악창작 과정이든 혼란스럽고 불분명한 데가 정말 많다. 그의 전기에는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굉장히 많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 내용도 많이 있다. 그의 인생 많은 부분을 우리는 모르고 있다. 그의 친구 중에는 이름밖에 모르는 사람도 많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이름들도 아마 잘못 알려진 이름들일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알려지지 않은 관계들. 그는 역사의 추적을 교묘하게 피해 달아났다. 그런 점도 아주 마음에 든다.

     

     

     

    무소륵스키는 아마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작곡가 중 최고의 유로지비가 아닐까 싶다. 그의 편지 문체는 끔찍하다. 엄청나게 끔찍하다. 그런데도 그 속에는 놀랄 만큼 진실하고 새로운 생각들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의 어법은 아주 괴상하고 부자연스럽고 읽기 피곤하다. 그의 말투에는 겉치레가 너무 많다. 그런 편지의 핵심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죽죽 읽어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 속에는 보석 같은 표현들도 많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보자. “하늘은 청회색 헌병 제복 바지를 입고 있다.” 이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풍경이다. 또 무소륵스키가 불평하는 방식도 마음에 든다. “음향의 세계는 무한하다. 하지만 두뇌는 유한하지 않은가!” 아니면 이런 표현을 보라. “망치질이 잘된 머리(well-hammered head).” 그런 표현을 찾아내려면 진부한 장광설들을 한참씩 뒤져 그 속에서 끄집어내야 한다.

     

    그가 실제 생활에서 난폭한 군주나 시시한 싸움꾼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기분이 좋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자기 작품을 놓고 다른 사람과 싸우거나 항의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비판받으면 그는 침묵을 지켰고 거의 동의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런 동의는 문턱을 넘어서면 무효가 된다. 일단 밖에 나가면 그는 마치 오뚝이처럼 다시 자기 일을 시작한다. 나는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 있고, 또 아주 좋아한다!

     

     

    <증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520~522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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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그녀(마리야 유디나 - 인용자)는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녀의 구애에 응하지 않았다. 그 가엾은 남자를 이해할 만하다. 그는 겁을 먹었을 게 틀림없다. 결국 그녀는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나는 그녀의 연주회에 참석하고 나면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그토록 심하게 청중을 학대했다. 그건 엄청난 폭력이었다! 무대에 등장하는 방식부터가 그랬다. 그녀는 마치 빗속을 걷는 사람처럼 무대에 등장했다. 또 언제나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녔고 성호를 그은 다음에야 연주를 시작했다. 나로서는 그런 것에 반대할 까닭이 전혀 없다. 하지만 당시 소비예트 러시아에서는…….

     

    그녀는 많은 예찬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대중이 그녀를 좋아했던 것은 그녀의 예술적인 개성 때문이기도 하고 그녀가 자신의 종교적 감정을 공공연하게 드러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녀의 행동이 지나치게 연극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그녀의 신앙심은 약간 거짓되고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몇 차례 무대에 섰을 때, 그녀는 기어코 파스테르나크의 시를 낭송했다. 이미 그녀의 연주회는 관계당국에 의해 숱하게 취소된 바 있었다. 그 때마다 당국은 공연을 계속하고 싶으면 그런 종류의 도발을 삼가라고 요구했고 그녀로부터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계속 시를 낭송했다. 그 광경은 끔찍했다. 이가 다 빠진 그녀의 모습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물론 존경할 만한 점도 없지는 않았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집으로 맞아들여 거두었으며, 스스로 부랑자처럼 생활했다. 참으로 기이한 여인이었다. 요컨대 그녀는 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싶어했던 비범한 예술가였다. (…)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 1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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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나는 또 다른 끈질긴 학생 유디나와 함께 2인용 연탄곡으로 편곡된 악보를 도서관에서 빌려 와 피아노를 치며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유디나는 지독한 외톨이였고 좀 기이한 성격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레닌그라드, 다음에는 모스크바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무엇보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이 특출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절대 노골적 반()종교주의자는 아니다. 당신이 믿는다면, 믿어라. 그런데 유디나는 자기가 성자 또는 여성 예언자라고 실제로 믿었던 게 분명하다. 유디나는 늘 설교를 하듯 연주했다. 그것은 괜찮다. 유디나가 음악을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파악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예를 들어 그녀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성서의 삽화 시리즈로 파악했다. 그런 게 끔찍하게 짜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유디나는 무소륵스키를 순수하게 종교적인 작곡가로 보았다. 그러나 무소륵스키는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바흐일 수는 없으며, 그를 그렇게 파악하면 논란의 소지가 있다.

     

    유디나는 평생 똑같은 검은 드레스만 입은 것 같다. 그 옷은 지독히 낡아빠지고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나이가 들자, 밑창에 고무를 댄 운동화 스니커가 그런 차림에 보태졌다. 그녀는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스니커를 신고 돌아다녔다. 1962, 스트라빈스키가 소련에 왔을 때 열린 리셉션에서도 유디나는 그 스니커를 신고 왔다. “그에게 러시아의 아방가르드가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자고.” 스트라빈스키가 보았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유디나의 스니커가 기대했던 만큼의 인상을 그에게 남겨준 것 같지는 않았다.

     

    대체로 나는 유디나를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만나면 항상 무언가 불쾌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에 끌려 들어가곤 했으니까. 그녀에게는 기이한 일이 계속 일어났다. 한번은 레닌그라드의 모스크바 역에서 유디나와 마주쳤다. “, 안녕, 어디 가니?” 나는 대답했다. “모스크바.” “아니, 이럴 수가! 정말 잘 됐네. 내가 모스크바에서 연주회를 열기로 되어 있는데 갈 수가 없게 됐어. 그러니 부탁하건대, 나 대신 가서 연주를 좀 해줘.”

     

    유디나의 행동에는 의도적인 히스테리가 너무 많다. 정말 지겨울 정도로. 한번은 그녀가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자기는 일도 할 수 없고 쉬지도 못할 만큼 형편없이 작은 방에 살고 있다고. 그래서 나는 청원을 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유디나는 다시 나를 찾아와서 아파트를 하나 얻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아니, 우리가 아파트를 얻어주지 않았던가? 왜 또 필요하지?” “그 아파트는 어떤 불쌍한 노파에게 주었어.”

     

    어떤가, 사람이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금욕에도 이성적 한계가 있어야 한다. 이런 행동에는 유로지비같은 기미가 있다. 유디나 교수가 유로지비였는가? 아니다. 그녀는 유로지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유로지비처럼 행동하는 거지?

     

     

    (<증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170~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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