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인용 2023. 12. 13. 05:58
[1]
해석자란 무엇일까? 그는 이미 존재하는 텍스트에 무언가를 더 보탤 수 있을까? 리흐테르가 보기에 해석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서 해석자, 즉 연주자란 악보를 반사하는 거울일 뿐이고 광신적이다 싶을 정도로 정확하고 세심하게 악보를 읽는 사람이다. 이것은 물론 비현실적인 견해다. 리흐테르 자신은 개성이 너무나 강해서 첫 음만 들어도 그의 연주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희귀한 피아니스트들 중의 하나이니 말이다. 굴드와 리흐테르는 그런 피아니스트인 것이다. (브뤼노 몽생종)
.
나에 관한 그녀의 평은 이러했다. “리흐테르? 글쎄, 라흐마니노프가 딱 어울리는 피아니스트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면 이건 별로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다.
마리야 베냐미노브나 유디나는 정말이지 굉장한 인물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악보에 씌여져 있는 대로 연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마리야 베냐미노브나, B♭ 단조 전주곡을 왜 그렇게 극적으로 연주했어요?”
“우리는 지금 전쟁 중이니까요!!!”
유디나다운 대답이었다. ‘지금은 전쟁 중이니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작품에 반드시 전쟁의 성격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존경할 만한 점도 없지는 않았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집으로 맞아들여 거두었으며, 스스로 부랑자처럼 생활했다. 참으로 기이한 여인이었다. 요컨대 그녀는 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싶어했던 비범한 예술가였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기분에는 충실했을지 몰라도 작곡가들에 대해서는 정직함이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장례식에서 연주를 했다.
라흐마니노프를…….
.
베데르니코프는 (...) 상당히 전위적인 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연주는 음색이 아름답지 않았다. 그는 지독한 고집불통이라서, 네이가우스의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몸을 움직이는 대신 오로지 손으로만 연주를 했다. 네이가우스는 그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그와 입씨름을 벌였다. 네이가우스로 말하자면 음색에 관한 한 누구보다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네이가우스의 논거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애석하게도 베데르니코프는 성격이 꽤나 까다로웠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심한 콤플렉스가 있는 친구였다. 청개구리 같은 성미 때문에 무슨 일에든 엇나갔고, 앞뒤를 따지지 않는 단호한 태도로 사람들의 신경을 거스르기가 일쑤였다. 그에게는 한 가지 이론이 있었다. 그 이론에 따르면, 그가 ‘예술가주의’라고 부른 예술적 개성은 음악에 장애가 된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내가 보기에 연주자는 자신을 전면에 내세워서도 안 되지만 뒤로 사라져서도 안 된다. 그러기보다는 작곡자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작곡자 안에서 스스로를 구현해야 하는 것이다.
.
악보를 무조건 다 외우려는 것은 건강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허영심의 발로이기도 하다. 물론 악보대에 악보를 놓아두고 연주하면 외워서 연주할 때만큼 완전히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또 그건 당장에 되는 게 아니라 많은 연습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제 그것에 익숙해지고 나니까 많은 장점이 있다는 것을 알겠다. 첫째로, 나는 실내악곡과 독주곡에 차이를 두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실내악을 연주할 때는 언제나 악보를 보면서 연주한다. 독주곡이라고 해서 굳이 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할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둘째로, 하이든의 소나타를 암보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외워서 연주하느라고 두 곡에 그치는 것보다는 악보를 보면서 20곡을 연주하는 편이 낫다. 현대 음악을 놓고 보자면, 일부 귀재들은 베베른의 작품이나 힌데미트의 「루두스 토날리스」를 암보할 수 있겠지만, 그건 시간 낭비일 뿐 <실용적>인 행위라고 볼 수 없다. 또한 음악에 어느 정도에 위험 요소는 있게 마련이라 해도 악보를 앞에 두고 있으면 한결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그럼으로써 더욱 잘 집중하게 된다. 끝으로 악보를 보는 것의 장점은 무엇보다 그런 연주가 더 정직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눈앞에 있으면 씌어진 대로 정확히 연주하게 마련이다. 연주자란 하나의 거울이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으로 음악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작곡가가 써놓은 <모든> 지시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것이 안 되니까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에 찬성할 수 없다.
.
나는 음악을 들을 때 악보를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음악을 듣는 목적은 작품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껏 즐기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대목에 플루트나 오보에가 들어간다는 것을 미리 아는 것은 내가 보기에 음악을 즐기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연주회가 매력과 신비를 잃고 학습의 양상을 띠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신비를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다. 사실 나는 연구와 분석에 반대한다. 나는 내가 연주하는 협주곡의 오케스트라 파트 악보를 보지 않는다. 나는 보지 않고 듣는다. 그러면 나에게는 모든 것이 경이롭다. 나는 악보 전체를 머릿속에 넣을 수 있고 내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무릇 연주가란 하나의 실행자다. 작곡가의 의지를 정확하게 실행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작품 속에 이미 있는 것만 들려줄 뿐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 재능이 있는 연주가는 작품의 참모습을 언뜻언뜻 보게 해 준다. 그 자체로 천재적인 작품의 진실이 그를 통해 반영되는 것이다. 그는 음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 속에 녹아 들어가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의 연주 방식에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로 변화가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만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단지 어느 때부턴가 내 연주가 한결 자유로워진 점은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생활의 속박과 일체의 군더더기, 본질에서 마음을 돌리게 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말이다. 나는 스스로를 안에 가둠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나는 어떤 작품을 내가 이해한 대로 연주해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놓고 의심을 가져본 적은 있다. 하지만 어떤 작품을 다른 식이 아니라 이렇게 연주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나의 확신은 악보를 주의 깊게 보았던 데서 나온 것이다. 악보에 담긴 것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데에는 오로지 악보를 잘 보는 것만이 필요하다.
쿠르트 잔데를링이 어느 날 나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연주를 잘할 뿐만 아니라 음표를 읽는 법도 알고 있다.” [Er Kann nicht nur gut spielen, er kann auch Noten lesen.]
그건 나를 별로 나쁘지 않게 보아준 것이다.
[2]
나를 두고 연습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혹자는 내가 매일 10시간에서 12시간을 피아노를 치며 보낸다고 썼다. 어디를 가나 숱하게 들었던 소문 중에는 내가 연주회를 마치고 나면 이미 연주한 곡을 다시 연습하느라고 며칠 밤 내내 틀어박혀 지낸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런 소문들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우선 연주회를 끝내고 밤에 피아노를 치는 것은 이미 연주한 곡을 다시 연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음 날의 연주회를 위해 새로운 작품들을 연습하거나 마지막으로 점검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나는 오래 전에 게르만 식의 현학 취미를 드러내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렇게 결심한 바 있다. 하루에 세 시간씩 피아노 치는 것을 나의 순항속도로 삼으리라고 말이다. 그 뒤로 나는 지킬 수 있는 한 그 규칙을 지켜 왔다. (4장의 각주 10을 참조할 것. 우리가 연습을 화제에 올렸을 때, 나는 리흐테르가 이 주제를 놓고 정색을 하면서 열을 올리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그와 가장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의 증언을 포함한 모든 증언과 나 자신의 관찰에 비추어 보면, 예의 ‘3시간’은 현실성이 약하다. 하지만 리흐테르가 자신의 주장에 추가한 숱한 예외와 계산하기 미묘한 숱한 경우를 염두에 둔다면, 그가 자신의 말을 스스로 믿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으리라 확신한다. - 브뤼노 몽생종) 계산을 한번 해 보자. 365 곱하기 3은 1095. 그러니까 1년에 내가 필요로 하는 연습 시간은 1095시간이다. 그런데, 1년 중에는 자동차 여행을 하느라고 피아노를 치지 못하는 날들이나 콘서트 때문에 여러 시간의 리허설을 해야 하는 날들(나는 리허설을 악기 연습으로 치지 않는다)도 있고, 병에 걸리거나 몸이 불편한 때도 있으며, 5개월 내리 지속되는 연습 중단 기간도 있다. 이렇게 허송한 시간들은 어떻게든 만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피아노 위에 스톱워치를 올려놓고 실제로 연습한 시간을 정직하게 기록해 나가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때로 이런 경우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예컨대 프로코피예프의 7번 소나타를 나흘 만에 외운다든가 라흐마니노프의 2번 협주곡을 8일 만에 암보하느라고(이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연습을 많이 했던 날들 말이다. 특히 콘서트 전날이 그런 날이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그러지 않았다. 하루에 12시간씩 연습한다는 건 헛소문이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악보를 욀 때 피아노와 접촉할 필요를 느낀다. 소리를 실제로 내보지 않고 연습한다는 건 나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연습에 할애하는 세 시간을 온전히 피아노를 치는 데에만 사용한다. 나는 아주 간단한 원칙에서 출발한다. 쉬운 것은 빨리 익힐 수 있지만, 어려운 것을 익히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원칙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새로운 작품을 익힐 때면 순전히 반복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나는 우선 까다롭고 미묘한 대목들을 찾아내어 기계적으로 익힌다. 한 페이지씩 잡아 필요한 만큼 반복해서 연습하되, 각각의 페이지를 완전히 익히지 않고는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않는다. 아무리 까다로운 대목이라도 백 번을 되풀이해서 연습하면 연주하기 쉬워지게 마련이다. 이따금 느리게 연습할 때도 있지만 그건 아주 드문 일이다. 나는 처음부터 진짜 템포로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한 작품을 그렇게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보일 수도 있다. 나 역시 그게 어리석음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런 어리석음의 해독제로는 새로운 작품을 계속 연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나는 닷새 후에 이러저러한 장소에서 연주를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받으면, 그 참에 내가 아직 연주한 적이 없는 소나타를 기존의 프로그램에 집어넣는다. 예를 들면 하이든의 소나타 같은 곡을 말이다. 하이든의 소나타는 언제나 좋은 효과를 낸다. 덕분에 나는 활력이 되살아나는 기분을 느낀다. 똑같은 작품을 계속 되풀이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나는 매번 신선함을 느끼고 싶다.
나는 각 페이지를 따로따로 익혀보지 않고서는 한 곡을 전체적으로 연주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연주하는 것은 종종 마지막 순간까지 남겨 놓는다ー아주 나쁜 방식인데도 그러는 것이다. 연주회가 임박해서 압박감이 느껴져야 비로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무대에 올라가서야 처음으로 한 작품을 온전히 연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슈만의 「후모레스케」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어떤 리사이틀의 프로그램에 그 곡을 넣었는데, 어쩌다 보니 시간에 쫓기게 되었다. 나는 연주회를 일주일 남겨 놓고 그 곡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기교의 측면에서 대단히 까다롭다. 그래도 피날레는 쉬운 편이라서 따로 미뤄 놓았다. 악보의 나머지 부분을 연습하는 데에 일주일을 다 쓰고 나니, 피날레는 마지막날 밤이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그 부분은 익히기가 한결 쉬웠다. 연주회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
나는 이렇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익혔을까? 이 작품이 그토록 애를 써서 익힐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을 다 하고 다 읽고 다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걸작들은 너무나 많다. 게다가 나는 게으름과 수동성의 화신이다. 나는 모두가 연주하는 작품보다는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는 작품을 연주함으로써 약간의 신선함을 느끼게 하고 싶을 뿐이다. 계산을 한번 해 보았더니, 내 레퍼토리는 실내악을 제외하고도 약 80종의 서로 다른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식욕이 왕성한 잡식동물이다. 나는 그 식욕을 채우고자 했고, 내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변화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60년대 말까지 새로운 작품들을 축적해 왔다. 콘서트에서 어떤 곡을 연주했는데 그것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도 있다. 나는 그렇다고 해서 그 곡을 프로그램에서 빼지 않는다. 연주자가 나아가는 길은 직선이 아니라 나선이 아닌가 싶다. 나는 참고 기다릴 줄 안다. 어떤 곡이 만족스럽게 연주되지 않았다면, 다시 연습해서 몇 번이고 다시 연주한다.
[3]
소련에서는 내가 최초로 슈베르트의 소나타를 연주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나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왜 슈베르트를 연주하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그거 아주 따분하다네. 차라리 슈만을 연주하게.”
어쨌거나 내가 연주를 하는 것은 청중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연주한다. 내가 내 연주에 만족하면, 청중 역시 만족한다. 연주를 하는 동안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건 작품과 관련된 것이지 청중이나 성공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 또한 내가 청중과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 관계는 작품을 통해서 맺어진 것이다. 약간 거칠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청중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다. 이렇게 말한다고 화를 내지 않기를 바란다. 내 말을 나쁜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나는 단지 내가 청중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청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청중과 나 사이에는 일종의 벽이 존재한다. 내가 청중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않을수록, 나는 더욱더 연주를 잘 한다.
사실 나의 첫 슈베르트 콘서트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모스크바에서뿐만 아니라 훨씬 뒤에는 파리에서도 그러했다.
[4]
미국에서 나에게 쏟아 부어졌던 그 모든 찬사들은 오늘날까지도 나와 청중의 관계를 해치고 있을 뿐이다. 연주회는 청중에게 뜻밖의 기쁨을 선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청중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라고 미리 알려주게 되면 연주회는 일체의 신선함을 잃게 된다. 청중이 듣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내가 이제 어둠 속에서 연주를 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내 머릿속에 음악과 상관없는 잡념이 끼여들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청중으로 하여금 연주자보다는 음악 그 자체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피아니스트의 손이나 얼굴을 바라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의 손이나 얼굴은 그저 어떤 작품을 연주하는 데에 들이는 정성과 노력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내가 미국에서 그토록 연주를 잘하지 못했던 것은 내 피아노를 선택할 권리가 나 자신에게 주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나에게 피아노를 수십 대나 보여주었다. 그토록 많은 것 중에서 하나를 고르다 보니 좋은 피아노를 고르지 못했다는 생각이 줄곧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피아니스트에게 자신이 연주할 악기를 선택하는 것보다 더 해로운 일은 없다. 피아니스트는 그저 홀에 있는 피아노로 연주를 해야 한다. 그것이 운명이다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심리적으로 모든 게 한결 편해진다.
언젠가 이굼노프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당신은 피아노를 좋아하지 않는군요.” 나는 그 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나는 음악을 더 좋아하니까요.”
.
나는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음악제를 주재했다. 이 음악제들 또한 평소에 듣기 어려운 신선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것도 연주자와 청중 모두에게 풍부한 영감을 주는 장소에서 말이다. 프랑스의 투렌 지방에서 열린 음악제는 몇 년 동안 내 인생의 큰 즐거움이었다. 60년대 초 프랑스에서 연주 여행을 하던 중에, 연주회가 없는 시간을 틈타 투렌 지방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의 유명한 성들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성들에 완전히 매료되어 거기에서 연주회를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음향 면에서 결함이 있었고, 사람들이 나에게 보여준 아름다운 성관의 방들은 크기가 적당하지 않았다. 나는 꿈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건축가 피에르 부알이 13세기에 지어졌다는 어떤 곡물 창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랑주 드 멜레라는 그 건물이 내 기준에 적합하리라는 것이었다. 거기에 가보니, 그 해에 베어들인 건초가 가득 쌓여 있고 닭과 오리 따위가 사방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찾던 건물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음향을 고려한 약간의 개선이 불가피했다. 나는 그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음악제 준비에 들어갔다.
.
나는 로안이나 몽뤼송이나 프로방스 지방의 한 귀퉁이에서 연주를 한다. 연주회장은 극장이 될 수도 있고, 예배당이나 교정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연주회에는 적어도 한 가지 장점이 있다. 사람들이 거기에 오는 것은 속물 근성 때문이 아니라 음악을 듣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
나는 음악 활동과 관련된 일체의 계획을 싫어한다. 준비된 작품이 있고 연주할 마음이 있으면 장소는 아무데라도 상관없다. 학교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무상으로 하라 해도 기꺼이 한다. 홀이 크건 작건 나에겐 마찬가지다. 내가 작은 연주회장을 좋아한다는 얘기가 널리 퍼져 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큰 연주회장은 오래 전에 예약을 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식의 장기적인 계획에 알레르기가 있을 뿐이다. 큰 홀에서 연주하는 것 자체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내가 연주하고 싶어하는 날에 문제의 홀을 필립 앙트르몽이나 모라 림퍼니 같은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내가 어쩌겠는가?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사전에 계획된 일들은 무산되기가 일쑤다. 갑자기 병이 나거나 뜻밖의 장애가 생겨서 일이 어긋나 버린다. 반면에 이틀 후 또는 부득이한 경우 일주일 후 정도로 날을 잡아서 즉흥적으로 연주회를 결정하면 일이 잘 풀린다. 오늘은 내가 컨디션이 좋지만, 몇 달 뒤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5]
프로코피예프가 소년 같은 면모를 보였던 다른 경우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이상한 현상이나 범상치 않은 것에 대해서 늘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에게는 어린아이나 여행자의 호기심이 있었다. 1943년 내가 처음으로 그의 제1번 협주곡을 연주했을 때, 그는 리허설을 지켜보았다. 리허설이 끝나자 마자 그가 느닷없이 내게 말했다. “내가 놀라운 현상을 목격했는데 그게 뭔 줄 아나? 자네가 종결부의 옥타브들을 연주하기 시작하던 찰나에 내 주위의 의자들이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네……. 마치 의자들이 음악에 반응을 보이는 듯했어……. 정말 굉장하지 않나?”
.
7번 소나타의 초연은 노동조합 회관의 ‘10월 홀’에서 열렸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내가 첫 번째 연주자로 나섰다. 이 곡은 대단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
프로코피예프는 연주회에 참석해 있다가 무대 위로 불려나왔다. 청중이 떠나고 음악가들만 남게 되었을 때(오이스트라흐, 셰발린 등 많은 음악가들이 있었다), 모두가 그 곡을 다시 듣고 싶어했다. 홀에는 흥분과 엄숙함이 뒤섞인 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는 연주다운 연주를 했다.
그들은 연주곡의 숨결을 매우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감정과 영혼이 실린 그 숨결은 그들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느끼고 있던 것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같은 시기에 쇼스타코비치의 제7번 교향곡 역시 그런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소나타를 듣고 있으면, 우리는 평형을 잃은 어떤 세계의 불안한 분위기 속으로 빠져든다. 혼돈과 미지가 지배하는 분위기다. 힘들이 광란한다. 이 힘들은 위협적이고 때로 살인적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 힘들이 있기에 살아간다. 이 힘들은 계속 존재하며, 인간은 느끼고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이제 인간에게는 세상 만물이 인간을 충만하게 하기 위한 대상이다. 인간은 서로 힘을 합쳐 항의의 목소리를 내고 만인의 비탄을 서로 나누어 가진다. 그리고 승리하려는 욕구에 불타서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휩쓸어 간다. 인간은 그 대대적인 투쟁을 통해서 생명의 억누를 수 없는 힘을 확인한다.
[6]
1957년에는 로베르트 팔크의 작품만으로 또 다른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는 한 달 반 동안 이어졌다. 장소는 내 아파트였다. 이 화가의 작품을 다른 곳에서 공개적으로 전시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로베르트 팔크는 러시아에서 아주 유명했다. 하지만 파리에서 오랫동안 살았는데도 외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나는 그의 유화들을 무척 좋아했다. 그의 작품들 중에는 젊은 시절의 나를 그린 초상화도 들어 있다. 나는 때때로 그림을 연습하러 그의 집에 가곤 했다. 그런 기회에 그가 나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었고, 나는 이내 그것을 피아노에 적용했다. “회화에서 가장 어려운 게 뭔 줄 알아요? 완전한 원을 그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두 손을 사용해서 두 개의 원을 동시에 그리면 그게 덜 어렵지요.” 그것은 피아노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칭! 모든 게 대칭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중에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연습을 많이 하다 보면 ‘물이 끓기 시작하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고, 바로 그 순간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
나는 다비트 오이스트라흐를 오랜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나의 아버지가 오데사에서 그를 만나게 해 주었다. 당시에 나는 열두 살이었고 오이스트라흐는 열일곱 살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단히 매력적인 청년이었다. 얼굴도 잘 생겼을 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아주 고왔다. 그 뒤로 나는 그의 연주에 숱하게 참석했다.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연주를 들어 보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가 가장 훌륭했다. 그에게는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음색과 일체의 긴장이 배제된 힘이 있었다. 그는 연주를 하면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바이올린은 완전히 몸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의 두 다리와 횡경막이 그 모든 것의 바탕이 되고 있는 듯했다. 나중에 나는 그의 수제자인 올레크 카간과 연주를 한 적이 있었다. 카간은 최고 수준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음악과 상관없는 우여곡절을 많이 겪기는 했지만, 진정한 음악가였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와 연주할 때 나는 늘 배와 다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키곤 했다.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좋은 음색은 배와 다리에서 나온다.
[7]
(...) 내가 분명하게 마음을 정하고 있던 것은 단 한가지였다. 즉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B♭ 장조) 중에서 느린 악장의 처음 몇 소절이 흐르는 가운데 영화가 시작되고 같은 악장의 마지막 몇 소절이 흐르는 가운데 영화가 끝나리라는 것이었다. 당초부터 이런 확신이 들었던 것은 듣는 이의 마음을 옥죄는 이 소나타야말로 작곡가 슈베르트와 연주자 리흐테르의 가장 숭고한 성취에 해당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한편 나는 마지막 장면에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분위기가 감돌도록 하기 위해, 바로 앞에 짤막한 에피소드 하나를 삽입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청중의 대변인 역할을 맡은 내가 카메라의 시야 속으로 들어가 리흐테르의 두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는 장면을 말이다.
“이 촬영이 선생님께는 고역이었죠?”
“끔찍했지요…….”
“감사합니다, 마에스트로…….”
그러면 리흐테르의 한없이 쓸쓸해 보이는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중심 주제의 애끓는 우수를 받쳐주기 위해 제2악장의 말미에 덧붙인 저음부의 음울한 16분 음표들이 연주된다. 그러고 나서 리흐테르가 클로즈업된다. 약 20년 전의 콘서트에서 슈베르트의 그 소나타를 연주하는 모습이다. (브뤼노 몽생종)
.
나보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하라고 한다면, 하이든의 현악 4중주(B♭장조 op. 76 no. 4 - 인용자)를 더 자주 들으라고 하겠다. 거기에는 기쁨의 샘이 있다. 그것들을 많이 들어서 건강에 도움이 되었다고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슈베르트의 가곡에 대해서도 거의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 듯하다.
[8]
글렌 굴드, ‘바흐의 가장 위대한 해석자’. 그는 자기만의 바흐를 발견했고, 그런 점에서 명성을 누릴 만하다. 내가 보기에 그의 주된 장점은 음색 쪽에 있다. 그의 음색은 바흐와 딱 어울린다. 하지만 바흐의 음악은 더 깊은 통찰과 더 많은 엄격함을 요구한다. 굴드의 연주에서는 모든 게 조금은 지나치게 반짝이고 지나치게 외향적이다. 특히 그는 반복구를 일체 연주하지 않는다. 나는 그 점을 용서할 수 없다. 그건 굴드가 바흐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리흐테르를 기다리면서, 나는 연습용 피아노(야마하의 클라비노바)의 악보대에서 편지 싸개에 들어있는 종이를 발견하고 거기에 적힌 것을 읽어보았다. ‘아침저녁으로 이를 잘 닦을 것, 프루스트나 토마스 만을 매일 약간씩 읽을 것…….’ 자신이 일상적으로 해야 할 일을 상기시키기 위해 작성된 일종의 메모였다. 그는 앞날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있음에도, 대단히 정확하고 꼼꼼한 사람이다. (브뤼노 몽생종)
'인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치다 다쓰루의 기적 같은 프랑스어 (0) 2023.12.14 갸또쇼콜라에 관한 명상 (오다지마 다카시를 추억하며) (0) 2023.12.13 리흐테르가 증언하는 쇼스타코비치 그리고 「유로지비; holy fool」 (0) 2023.12.13 텍스트로 만드는 영화, 영화로 만드는 텍스트 (브뤼노 몽생종) (0) 2023.12.13 I owe you. (0) 2023.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