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우치다 타츠루 『일본변경론』 머리말
    인용 2026. 4. 8. 14:22
    머리말의 머리말 (인용자)
    정말 중요한 문건인데 아직 사이버 상에 등재되지 않은 듯하여 올립니다. 선생님의 명문 중 명문입니다. 더욱이...
    이 책은 일본에서는 2009년, 한국에서는 2012년에 각각 출간되었는데, 한국어판은 절판된 지 꽤 오래된 거로 알고 있고, A모 중고서점에도 몇 권 없는 실정입니다. (대신 본서를 출간한 갈라파고스사는 꽤 나중에 선생의 "레비나스 시간론"도 펴냄)
    사람들의 손을 잘 안 타는 것 같으면서도, (현재 원문 포함) 한국 내 191개 도서관이 현재 소장 중에 있는 다행함도 있습니다.
    (대학 도서관은 세지도 않은 수입니다. 사서 분들끼리 몰래 돌려 읽는 책 같은 분위기를 풍풍 풍깁니다.)

    옮긴이 김경원 선생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우치다 선생님이 손수 고르신 10선 가운데 초기의 중요한 4권의 번역자로 자기매김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얼리버드이고, 오늘날 한국의 우치다 독서 풀에 일조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왜 한국에 우치다 타츠루를 소개하셨는지, 애초에 어떻게 주목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집니다. (이렇게 김 선생님은 인식론상 언성 히어로의 지위에서 벗어나셨습니다.)
    제 모든 목적은 우치다 타츠루의 묵묵한 독자이자 실천자로 남는 것, 그리고 배울 만한 어른을 따라 배우는 일일 따름입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드디어 '일본변경론'을 선보이게 되었군요. 미국론, 중국론에 이어 이번에는 일본론입니다. 이 책에 쓴 내 주장은 바로 일본은 변경(邊境)이라는 것, 그리고 일본인에게 고유한 사고나 행동은 변경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의 주변성이나 변경성, 후진성 같은 개념으로 일본문화의 특수성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이제까지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집필을 고사했습니다. 사실 이 책에는 그다지 (혹은 거의) 새로운 내용이 없답니다. 「변경인의 성격론」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변경인의 시간론」은 다쿠앙 선사(澤庵禪師), 「변경인의 언어론」은 요로 다케시(養老孟司)의 논의를 그대로 옮겨 쓴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선현들께 고개 숙여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새로움이 있든 없든, 되풀이해서 확인해두어야 할 명제는 있는 법이죠. 우리는 어떠한 고유문화를 지녔는가? 우리 사고나 행동에는 어떠한 '민족지(民族誌)적 습관'이 깔려 있는가? 그것 때문에 우리 눈에 비치는 세계상은 어떻게 비틀어져 있는가? 이런 일에 대해 '이 정도면 충분하고 말고...' 하면서 손을 탁탁 털고 일어서면 곤란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이를 닦는 것처럼 늘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저께 씻었다고 오늘 안 씻을 수는 없잖아요.

     

    그냥 두면 금방 뿌옇게 흐려지는 세계상을 매일같이 바로잡는 일,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티도 안 나는 작업이지만('눈 쓸기'나 '도랑 치기'와 같다고 할까요?), 제대로 해두지 않으면 벽 틈으로 끈적한 것이 스며 들어와서 점점 사는 곳을 더럽히겠지요. 난 그게 싫어요. 사는 곳은 원칙대로 깔끔하게 해놓고 싶거든요. 날림공사로 지었다거나 좀 좁고 불편한 것은 상관없지만, 집이란 모름지기 구석구석 꺠끗이 쓸고 닦아놓고 소박한 가구일지언정 정성 들여 반짝반짝 훔쳐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어질러놓은 방에 있어야 편하다는 사람도 있겠죠. 적당히 자기가 내놓은 오물과 섞여 있어야 '나답고 편한' 기분이 든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집에 '손님'을 들일 수 없습니다. 뭐랄까요, 티끌 하나 없이 쓸고 닦아 반짝반짝 광을 내놓고는 다른 사람이 와서 더럽히는 것이 싫다고 아무도 집에 불러들이지 않는 신경증적인 결벽증과 다를 바 없습니다. 청결 결벽증이나 집안을 지저분하게 해놓는 것이나, 배타적이라는 점에서는 쌍둥이처럼 똑 닮았지요.

     

     

    '깨끗이 청소를 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씀을 왜 드리는가 하면, 그건 언제나 '손님'을 맞이할 수 있게 해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손님'이란 다른 말로 '타자'를 가리킵니다.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일단 '타자'의 뜻은 남이라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한마디로 이 책의 집필 목적은 '손님'을 집에 맞이하기 위해 '청소'를 해두려는 것입니다.

     

    그래요. 이 책은 어디까지나 '청소' 역할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조직적이지 않습니다. 청소는 원래 조직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지요. 아무리 청소를 철저하게 제대로 하자고 마음먹은들, 청소할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서 자꾸 나중으로 미루잖아요. 청소의 핵심은 '철저하게 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우선 되는 대로 '발 밑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치워버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지요.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한 장소를 치워본 경험이 있는 분은 금방 아시겠지만, 발밑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버리는 일부터 하지 않으면 카오스를 정돈하는 건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완벽하게 작업 공정표를 짜고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청소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런 계획을 짤 만한 여력이 있는 사태라면 애초에 '카오스'라고 부르지도 않겠지요.

     

     

    이 책도 그렇습니다. '청소 책'이니까 우선 '발밑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버리는' 일에서 시작할 생각이에요. 하나를 버리고 나서 눈에 띄는 다음 쓰레기를 버릴 겁니다. 첫 쓰레기가 깡통이고 다음 쓰레기가 종이상자라고 해서 "버리는 방식에 체계성이 없군" 또는 "크기를 맞춰서 갖고 오라구" 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런 말은 청소같은 것을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나 할 만한 이야기들이겠죠.

     

    '민족지적 습관의 교정' 같은 것은 본질적으로 끝이 없는 작업입니다. 사회집단이 존재하는 이상 어디에서나 사고나 행동의 고유한 버릇이나 습관이 있고, 그것이 없어지면 그 집단은 다른 것이 되어버리거나 없어져버리겠죠. 그러니까 그것을 완전히 고치거나 없애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 그런 작업을 하는 본인이 그런 버릇을 나날이 실천하는 당사자이기도 하니, 무슨 일을 해도 그런 버릇이 재생산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테지요.

     

    마치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가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밀어 올리면 바위가 굴러떨어지고 또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영겁의 형벌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굴러떨어진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기 위해 골짜기로 다시 내려올 때 시시포스가 누리는 한순간의 휴식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찾아냈어요.

     

     

    언덕을 내려오면서 찰나의 휴식을 누리는 시시포스가 내 마음을 끌어당긴다. (......) 무겁지만 한 발 한 발 또박또박 내딛는 발걸음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역을 향해 산을 내려오는 사내의 모습이 보인다.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한 순간, 그리고 그의 불행과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회귀하는 이 시간은 각성의 시간이기도 하다. 산꼭대기를 떠나 천천히 신들의 소굴을 향해 내려오는 한순간 한순간, 그는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바위보다 강하다. (......) 그가 산을 내려오면서 생각하는 것은 그 자신의 상황이다. 그에게 더한 괴로움을 안겨줄 그 통찰이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준다. 어떠한 운명도 그것을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시시포스와 함께 산을 내려오면서 우리도 우리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군요. 지금도 또 앞으로도 '변경성'이라는 우리의 '불행' 혹은 우리의 '숙명'을 확실하게 회귀하여 앓던 이 빼듯 처치해버리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통찰을 통해 그것을 '내려다보는' 일이라면 가능하겠지요. 변경성이라는 숙명을 이겨낼 수는 없다고 해도, 잘하면 팽팽한 승부를 벌일 수는 있습니다.

     

    어쩐지 초장부터 성급하게 결론을 향해 내달린 느낌도 없지 않지만, 이 책은 청소 작업이자 끝없는 작업이라는 점을 거듭 말씀드립니다. 그러니까 "이거, 논의 전개에 체계가 없구먼" 한다든지, "도대체 결론이 없잖아!" 하고 언짢아하시면 곤란합니다. 우선 눈에 띄는 주제부터 차례대로 주섬주섬 주워섬길 작정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종잡을 수 없이 화두가 바뀔 것입니다. 그래도 이 책 한 권으로 청소를 해놓으면, 그만큼은 집안이 깨끔스러워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합니다. 최초의 주제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첫째, 이 책은 체계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커다란 그림' ('커다란 보자기' 라고도 해요)만, 즉 대단히 거칠거칠한 이야기만 할 것입니다. 히미코(卑弥呼)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또 불교에서 만화에 이르기까지 '변경'이라는 하나의 도식으로 논의를 전개하다 보니 논리가 성긴 것은 어쩔 수 없어요. 그래서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책은 학술적 엄밀성은 일체 고려하지 않았답니다. 나도 명색이 학자니까 학술적 엄밀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압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엄밀함을 죽기 살기로 추구해야 하는 영역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영역도 있습니다. 이 책은 '변경성'이라는 보조선을 긋고 일본문화의 특수성을 부각시키기 때문에 서로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문화적 사례를 열거하고 거기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을 도출하는 작업으로 이루어질 겁니다. 서로 연관이 없는 사례를 무작위로 늘어놓는 인간을 붙잡아서는, "이봐 당신, 서로 연관이 없는 사례를 멋대로 다루어도 되는 거야?" 하고 불평을 하셔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일부러 그런 시도를 해보려는 작정이니까요. '변경성'은 차원분열도형(fractal)처럼 모든 것에 (정치 이데올로기, 종교, 언어, 친족제도 등에) 똑같은 패턴을 갖고 회귀하거든요. 그래서 "어어, 이런 데도, 이런 데도" 하며 놀라움을 경험하는 것이 의미가 있답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다루는 논제가 절도가 없고 산만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예상할 수 있는 평가는, "이 책은 말이지, ○○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단 말이야. ○○같은 중요한 사항도 언급하지 않은 놈한테 이런 논제를 다룰 자격이나 있겠어?" 하는 것입니다. 학회 발표에서는 곧잘 이런 장면이 연출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식의 비판은 '만능병기'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내가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자기가 다루는 주제와 관련한 모든 정보를 망라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만약 이 세상에 '언급해도 좋았을 것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을 때 논의 자체의 신뢰성은 훼손된다는 규칙 같은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는 정도의 차는 있을지언정 바보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입니다. 이런 결론에도 분명 일말의 진실이 있겠지만, 이런 논리는 우리의 지적 열정을 사그라지게 할 테니까 이런 종류의 비판도 묵묵히 패스해서 지나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으로 예상되는 비판에 대해 이 책이 표명하는 원칙적 입장을 밝혀보았는데요. 뭐, 한마디로 그 어떤 비판도 귀담아 듣지 않겠다는 말인뎁쇼(태도가 불량하죠?).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익글은 자발적인 '도랑 치기' 같은 것인 만큼, 괜히 지나가는 사람한테 "쯧쯧, 도랑 치는 솜씨가 형편없는 걸!" 하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군요.

     

     

    일본변경론 / 우치다 타츠루 지음 ; 김경원 옮김 / 서울 : 갈라파고스, 2012 / 11~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