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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수양대군은 사람을 세가지로 나누었다.인용 2026. 4. 9. 08:52
수양대군은 사람을 세가지로 나누었다. 첫째는 위엄으로 눌러버릴 종류의 사람이니, 이것은 가장 수많은 서민들과 가장 수많은 벼슬아치다. ... 수양대군이 보는 둘째 종류 사람은 이름과 이로 달래어 영구히 노예적 복종을 맹세시킬 수 있는 무리다.
... 그러나 닭을 천을 기르면 그중에서도 봉이 난다는 셈으로, 이렇게 명리를 따라 동으로 가고 서으로 가는 무리들 중에서도 굽혀지지 아니하는 곧은 무리가 있으니 이러한 무리들이 비록 수효는 적을망정 자연히 한 세력을 이루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기치를 내어세우고 호령을 함이 없더라도 충의(忠義)가 있는 곳에 반드시 따르는 천연의 위엄이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정색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몇 사람 안 되는 무리가 곧 수양대군의 이른바 셋째 종류 사람이다. ... 이 무리는 위엄으로 내려누를 수 없다. 그네는 의를 위하여서는 시퍼런 칼날을 우습게 보고 한 몸의 목숨을 터럭같이 여긴다. 몸을 열 토막에 내미고 목숨을 백 번 다시 끊더라도 그만 것을 두려워할 그네가 아니다. 박제상, 정몽주의 몸에 흐르던 충의의 피는 한강의 물이 마를 때까지 이 땅에 나는 사람의 핏줄에 흐른다. 의인의 피와 살이 땅 속에 스며들어 이 땅을 의의 땅을 만들고 그 무덤에 나는 풀이 의인의 기운을 뿜어 이 나라의 초목까지도 의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죽는 것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이 무리들이야말로 수양대군의 큰 적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죽는 것을 두려워할 줄 모르거니 하물며 명리랴. 그가 이름을 싫어함이 아니다. 아름다운 이름을 천하에 돌리고 천추에 들리움이 그의 욕심이언마는 의가 아닌 때에 그는 이름 보기를 초개같이 여긴다. 그가 가장 견디지 못하는 수치와 고통은 하루라도 불의의 부귀를 누리는 것이다. 불의의 부귀를 누림으론 차라리 당장 죽어버리기를 택한다.
비록 몸에 치국평천하의 큰 경륜과 큰 재주를 품었다 하더라도 의에 맞음이 아니면 차라리 이 경륜, 이 재주를 초토에 썩혀버린다. 위무(威武)로 굴(屈)할 수 없고 부귀(富貴)로 음(淫)할 수 없는 이 의인의 무리는 고왕금래에 불의의 권세를 탐하는 자들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그들이 수효로는 비록 몇백 명, 그보다도 더 적게 몇십 명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의의 불씨를 천추만세의 후손에게 전하는 거룩하고도 고마운 직분을 맡아 한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전 인류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오백 년 전에 있던 우리 조상들의 장처단처는 오늘날 우리 중에도 너무나 분명하게, 너무도 유사하게 드러나는구나. 그 성질이 드러나는구나. 그 성질이 드러나게 하는 사건까지도 퍽으나 오백 년을 새에 두고 서로 같구나. 우리가 역사를 읽는 재미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그날에 여러 조선 사람들은 가지가지의 본색을 탄로하였다. 혹은 끝간 데를 모르는 욕심꾸러기가 되어서,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서는 못할 일이 없는 성품을 보이고, 혹은 금일 동, 명일 서로 해바라기가 햇빛을 따라 고개를 숙이듯이 부귀공명을 따라 어제는 이 임금의 충신이 되고 내일은 그 임금을 박차고 다른 저 임금의 충신이 되는 변동성 많은 재를 보이고, 또 혹은 충성을 보이기에는 너무도 겁이 많고 세도를 따르기에는 양심이 덜 무디어 무가무불가로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도회술(韜晦術)도 보이고, 성 안에 앉아서는 천하를 한입에 삼킬 듯이 큰소리를 하다가 성문 밖에 나서서 적을 대하자마자 허리가 굽어지고 무릎의 맥이 풀리는 겁쟁이, 저는 아무것도 아니하면서 주둥이만 살아서 남의 일을 이러쿵저러쿵 흉만 보고 훼방만 놓는 얄미운 이, 마땅히 한바탕 큰 반항을 일으킬 만한 이유와 분격지심이 있으면서도 남이 대신하여 주었으면 하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못난이...... 이러한 본색들이 아침 볕 받는 산봉우리들 모양으로 크게 작게 제 모양대로 제 빛깔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광수 『단종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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