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 사이토 코헤이인용 2026. 4. 20. 11:35
진정한 이론적 대전환 – 코뮤니즘의 변화
드디어 핵심에 가까워졌다. 지금까지 펼친 논의를 정리하고, 결론을 내리겠다.
마르크스는 만년에 진보사관과 결별했는데, 1868년 이후 자연과학 연구와 공동체 연구에 매진한 덕에 그럴 수 있었다. 두 연구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비로소 만년기 마르크스의 도달점인 ‘자술리치에게 보낸 편지’의 진정한 이론적 의의를 이해할 수 있다.
‘지속 가능성’ 및 ‘평등’에 대한 마르크스의 고찰은 자연과학과 공동체 사회를 연구함으로써 더욱 깊어졌다. 마르크스는 자술리치에게 보내는 편지를 여러 차례 다시 쓰면서 앞으로 사회가 목표해야 하는 새로운 합리성이란 무엇인지 펼쳐 보이려고 했다. 러시아인의 질문을 계기로 서유럽 사회에 지속 가능성과 평등이 실현될 수 있는 길을 새롭게 구상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 시도 끝에 대두된 것이 마르크스가 말년에 이룬 진정한 이론적 대전환이다. 생태학 연구 덕에 진보사관과 결별한 마르크스는 서유럽 자본주의가 뛰어나다 했던 기존의 주장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했다. 그 결과, 단순히 코뮤니즘으로 향하는 길이 여러 갈래로 늘어난 것에서 나아가 서유럽 자본주의가 목표해야 하는 코뮤니즘 그 자체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무슨 변화가 일어났다는 말일까.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전통에 근거한 공동체의 생산 원리는 자본주의와 전혀 다르다. 마우러와 프라스가 말했듯이 공동체 내부에 강한 사회적 규제가 있어서 자본주의 체제와 같은 상품 생산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앞서 마르크협동체에서는 토지는커녕 생산물조차 외부로 판매할 수 없다고 했던 걸 떠올려보자.
공동체에서는 전통에 기초하여 비슷한 수준의 생산을 반복한다. 즉, 경제 성장을 하지 않는, 순환형・정상형 경제다.
공동체가 ‘미개’하고 ‘무지’했기 때문에 생산력이 낮고 빈곤에 허덕였던 것이 아니다. 공동체는 더 오래 일하고 더 생산력을 올릴 여지가 있어도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권력 관계가 생겨나 지배・종속 관계로 변화하는 것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
14년에 이르는 연구 결과, 마르크스는 정상형 경제에 근거한 지속 가능성과 평등이 자본주의에 저항할 거점이 되어 미래 사회의 기초가 되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지속 가능성과 평등이야말로 서유럽 근대 사회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뛰어넘기 위해 의식적으로 되찾아야 하는 것이며, 그리기 위한 물질적 조건이 바로 정상형 경제다.
정리하면, 마르크스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목표한 코뮤니즘이란 평등하고 지속 가능한 탈성장형 경제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뛰어넘기 위해 서유럽 사회가 “고대적인 유형의 더욱 고차원적인 형태인 집단적 생산 및 영유로 복귀”(190면 참조)해야 한다고 편지에 적었을 때, 마르크스는 정상형 경제라는 공동체의 원리를 서유럽 사회에 더욱 높은 수준으로 부흥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탈성장 코뮤니즘’이라는 도달점
이제 ‘복귀’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서유럽 사회에서 코뮤니즘을 시도하려면 지속 가능성과 평등을 중시하는 합리성을 세울 필요가 있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정상형 경제의 원리를 배워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이 대목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마르크스의 구상이 그저 향수에 젖어 ‘농촌으로 돌아가자.’ 또는 ‘코뮌(commune)을 만들자.’ 하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수차례 러시아 공동체가 기술 혁신 등 자본주의의 긍정적인 성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서유럽에서 이뤄져야 하는 혁명이란, 근대 사회의 성과를 소중히 여기면서 “고대적인 유형”, 즉 정상형 사회를 모델 삼아 코뮤니즘을 향해 도약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력 지상주의에 기반하여 경제 성장을 추구하는 소련 등의 공산주의는 완전히 무효했던 것이다. 자본주의적 원리를 밀고 나간다고 해도 미래 사회의 전망이 밝아지지는 않는다고 판결이 내려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
마르크스에 따르면, 코뮤니즘에서는 미래 사회로 갈수록 화폐와 사유재산을 늘리는 것을 목표하는 개인주의적 생산이 “협동적 부(der genossenschaftliche Reichtum)”를 함께 관리하는 생산으로 대체된다. 이를 이 책의 표현으로 바꿔 말하면 그야말로 ‘커먼’의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그 전에도 ‘협동적(genossenschaftlich)’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했다. ‘게노센샤프트리히’라고 하는 단어에는 ‘’협동조합적인’, ‘어소시에이션적인’같은 의미가 있는데, 보통은 ‘협동조합적인 생산’, 협동조합적인 생산수단의 공유’ 같은 식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협동적 부”라는 표현은 「고타 강령 비판」 전체를 아울러 단 한 번 등장한다. 이 표현을 예전의 용례에 따라 ‘협동조합적 부’라고 번역하면 좀 부자연스럽다. 또한 그렇게 옮기면 ‘생산력도 성장하고 협동조합적 부의 모든 원천이 넘쳐흐르게 된 후에’라는 문장은 생산력 지상주의에 대한 지지 표명이 되어버린다. 앞서 살펴봤듯이 마르크스가 1870년에 생산력 지상주의를 지지했을 리 없다.
그러니 「고타 강령 비판」에 등장한 ‘게노센샤프트리히’라는 단어의 유래는 마르크스의 이전 저작에 쓰였을 때와 다를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무엇에서 유래했을까?
「고타 강령 비판」의 집필 시기를 염두에 두고 추측한 유래는 앞서 언급한 게르만족의 ‘마르크협동체Markgenossenshaft’, 즉 ‘마르크게노센샤프트’다. 마르크스가 공동 소유를 연구하면서 받아들인 지식이 「고타 강령 비판」의 한 문장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실은 ‘협동적 부’가 아니라 ‘협동체적 부’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협동체적 부’를 공동으로 관리한다고 읽으면 매우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191~201쪽)
현대인 대부분은 동물을 사육하고 생선을 낚아서 그것들을 먹을거리로 손질하는 능력이 없다. 옛날 사람들은 그러기 위한 도구까지도 직접 만들었는데,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자본주의에 빠져들어 생물로서 무력해졌다. 우리는 상품의 힘을 매개로 삼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기술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부를 약탈하지 않고서는 도시의 생활을 해나가지 못한다.
…
자본의 포섭이 완성됨으로써 자율성과 살아가기 위한 기술을 빼앗긴 우리는 상품과 화폐의 힘에 기대지 않으면 생존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생활의 쾌적함에 익숙해진 나머지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힘까지 잃고 말았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해리 브레이버만(Harry Braverman)의 말을 빌리면, 사회 전체가 자본에 포섭된 결과 ‘구상’과 ‘실행’의 통일이 해체된 것이다. 무슨 뜻인지 간단히 설명하겠다.
본래 인간의 노동에서는 ‘구상’과 ‘실행’이 통일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직공은 머릿속으로 의자를 만들겠다고 구상한 다음 대패와 정 같은 도구를 사용해 실현한다. 이 노동 과정에는 하나의 통일된 흐름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런 노동 과정은 자본이 보기에 썩 바람직하지 않다. 생산이 직공의 기술과 통찰력에 의존해 이뤄지는 이상 직공의 작업 속도와 노동 시간에 맞춰야 하고 생산력도 높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무리하게 일을 시키면 자존심 강한 직공들은 기분이 상해서 일을 그만둘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자본은 직공의 작업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각 공정을 점점 세분화하여 각 작업 시간을 계측하고, 더욱 효율적인 방법으로 분업이 이뤄지도록 작업장을 재편성한다. 그렇게 되면 직공들은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머지않아 누구든 할 수 있는 단순 작업의 집합체가 직공보다 빠르게 비슷한 품질, 혹은 더 나은 품질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직공들은 몰락한다. 그리고 자본은 직공이 지니고 있던 ‘구상’ 능력을 독점한다. 직공 대신 고용된 노동자들은 그저 자본의 명령을 ‘실행’할 뿐이다. 이렇게 통일되어 있던 ‘구상’과 ‘실행’이 해체되었다.
작업이 효율화하면 사회 전체의 생산력은 현저하게 상승한다. 그에 비해 개개인의 생산 능력은 점점 저하된다. 현대의 노동자는 더 이상 오래전의 직공처럼 혼자 완성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다.
(221~223쪽)
앙드레 고르츠의 기술론
이처럼 가속주의를 비난하면 자본주의의 생산력과 기술 발전을 거부하는 것 아니냐, 조악하고 원시적인 생활을 찬미하느냐는 비판이 날아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년의 마르크스는 과학을 버리라고 하지 않았고, 촌락공동체 특유의 인습으로 돌아가라고 하지도 않았다.
제4장에서 살펴봤듯이 마르크스가 만년에 진보사관을 부정하고 자본주의 이전 공동체의 전통을 중시하는 정상형 경제를 높이 평가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과 기술을 거부했다는 뜻은 아니다. 생산자들이 자연과학을 활용하며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에 “합리적인 규제”를 거는 것, 마르크스는 어디까지나 이것을 원했다.
애초에 과학을 버릴 것이냐 버리지 않을 것이냐 하는 극단적인 이분법은 무의미할 뿐이다. 앞으로 재생에너지와 정보통신기술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쯤에더 더욱 풍부한 뉘앙스를 품은 고찰에 주목해보자.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 앙드레 고르츠(André Gorz)가 말년에 남긴 논고다.
먼저 고르츠는 자본주의에서 이뤄지는 기술 발전의 위험성을 분명히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전문가에게 전부 맡기는 생산력 지상주의는 결국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져 “정치와 근대성 양쪽 모두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생산력 지상주의의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열린 기술’과 ‘닫힌 기술’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고르츠는 말한다. ‘열린 기술’이란 ‘커뮤니케이션, 협업, 타자와 교류를 증진하는’ 기술이다. 그에 비해 ‘닫힌 기술’은 사람들을 분단시키고 ‘이용자를 노예화하며’ ‘생산물 및 서비스 고급을 독점하는’ 기술을 가리킨다.
‘닫힌 기술’의 대표적인 예는 원자력발전이다. 오랫동안 원자력발전은 ‘깨끗한 에너지’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원자력발전은 보안상의 이유로 일반 사람들과 격리되었고 그에 관한 정보도 비밀리에 관리되었다. 그런 특성은 갈수록 불리한 사실을 은폐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중대한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원자력발전을 민주적으로 관리하기란 어렵다. ‘닫힌 기술’은 특성 탓에 민주주의적인 관리와 어울리지 않고, 중앙집권적인 하향식 정치를 필요로 한다. 이처럼 기술과 정치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 특정한 기술은 특정한 정치 형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226~227쪽)
'인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려읽기) 이번 시험에 우치다 다쓰루 나옵니다 (0) 2026.05.05 (가려읽기) 우치다 선생이 쓰는 법-각론 (0) 2026.05.05 (가려읽기) 수양대군은 사람을 세가지로 나누었다. (0) 2026.04.09 우치다 타츠루 『일본변경론』 머리말 (0) 2026.04.08 (유인물) 일본의 지난 30년 동안의 ‘질적 변화’ (0) 2026.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