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가려읽기) TV 출연 즐기는 강남 좌파를 위한 변명
    인용 2026. 3. 22. 16:03

    ... 궁극적인 적은 지식인들이다. 예를 들면 거의 모든 보수파 노동계급은 기업 경영진에게는 별 쓸모가 없지만(웃음 - 인용주), 노동계급이 자신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대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들의 진정한 증오는 무엇보다 ‘진보 엘리트’(‘할리우드 엘리트’, ‘언론계 엘리트’, ‘대학교 엘리트’, ‘멋쟁이 변호사들’, ‘주류 의학계’ 등 종류는 다양하다.)를 향해 있다. 그러니까 해안 대도시에 살면서 공영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도 등장하는 부류의 사람들 말이다.

     

    이 원망의 배후에는 다음 두 가지 인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이 엘리트층 멤버들은 일상의 노동자들을 주먹이나 휘두르는 야만인 수준으로 본다는 인식. (유시민은 해축 보고 롤하는 이대남들을 저 어디 맨체스터 펍에서 주먹다짐이나 하는 훌리건으로 볼 걸요? - 인용자) 둘째, 이 엘리트층이 점점 더 폐쇄된 신분제 사회를 구성한다는 인식. (조국 보고있나? - 인용자) 그런 신분제 사회에서 노동계급의 아이들은 실제 자본가 계급보다 장벽을 뚫고 나가는 데 훨씬 더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이런 인식은 둘 다 대체로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선출된 사실에 대한 반응을 조금이라도 고려한다면 첫째 인식은 매우 자명하게 진실이다. 특히 백인 노동자 계급은 다른 집단이라면 편협한 인간이라고 즉각 비난받을 만한 발언들(예를 들면 특정 계급이 못생기고 폭력적이고 멍청하다는 등)이 점잖은 그룹에서도 별말 없이 받아들여지는 미국에서 유일한 세력 집단이다.

     

    두 번째 인식 역시 제대로 생각해 보면 옳다. 또다시 할리우드에서 실례를 찾아보겠다. 1930년대나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할리우드’라는 이름조차도 마법 같은 사회 진보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순진한 시골 소녀가 대도시에 가서 가치가 발견되고 스타가 된다. 현재 목적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는 문제되지 않는다.(분명히 예나 지금이나 가끔 일어나는 일이다.) 요지는 당시 사람들은 그 우화를 원천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요즘 중요 영화의 주연배우들 가계도를 보면 할리우드 배우, 작가, 프로듀서, 감독을 적어도 2대 이상 하지 않은 경우를 찾기 힘들다. 영화 산업은 근친혼 신분제도에 지배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할리우드 저명인사들이 평등주의 정치를 지지하는 듯한 시늉이 대다수 미국 노동계급의 귀에 공허하게 들릴까? 할리우드 역시 이 측면에서 예외가 아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모든 자유주의 전문직들에 일어났던 일을 상징한다(조금은 더 발전한 형태지만).

     

    내가 보건대 보수파 유권자들은 대체로 부자들보다 지식인들을 더 원망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이나 자녀들이 부자가 되는 시나리오는 꿈꿀 수 있지만, 문화적 엘리트층의 멤버가 되는 시나리오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이런 판단은 부당한 평가가 아니다. 네브래스카주 출신 트럭 운전수의 딸이 백만장자가 될 확률은 아주 낮지만(요즘 미국은 아마 선진국 가운데 사회적 유동성이 가장 낮은 나라일 것이다.) 그래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그 딸이 국제 인권 변호사가 되거나 《뉴욕 타임스》 연극 평론가가 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강조는 인용자) 설사 그녀가 알맞은 학교에 갈 수 있더라도 학교를 졸업한 다음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서, 그 분야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무급 인턴 생활을 하면서 살아갈 방도는 분명 없다. 설사 유리 직공의 아들이 자리가 좋은 불쉿 직업에 발끝을 담그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는 십중팔구 에릭처럼 자기 직업을 필요한 인맥을 쌓는 토대로 바꾸지 못하거나 그렇게 하기를 꺼릴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수천 개는 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


    브라이도티는 서양 사상의 원류 중 하나인 그리스 사회에서 특권적 시민과 기타 존재를 나타내는 비오스(bios)와 조에(zoe)의 구별이 서양에서 주체와 타자의 존재론적 분리의 원천이며, 이것이 인간과 동물 또는 인간과 자연의 이항 대립적 분리로 이어졌다고 본다. 구약성서에서도 인정하는 이러한 인간의 특권적 지위는 인간이 다른 존재를 자원으로 활용하도록 하여, 그것이 근대에서 천연자원 또는 인적 자원의 착취와 산업 발전, 그리고 지구환경 파괴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가 고이치, 2026)

     

    현재 사용되는 영어에서는 대체로 금, 돼지 뱃살, 골동품, 금융 파생물 따위의 가치를 지칭하는 단수형 ‘가치(value)’와, 가족적 가치들, 종교적 도덕성, 정치적 이념, , 진리, 성실성 등을 말할 때의 복수형 ‘가치들(values)’을 구분해서 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경제문제를 이야기할 때 ‘가치’를 말한다. 그것은 대개 사람들이 노고에 대해 보수를 받는, 혹은 행동이 돈을 버는 방향을 지향하는 모든 인간적 노력이다. ‘가치들’은 그 외 경우에 해당된다. 예를 들면 집안일과 자녀 양육은 분명히 무급 노동의 가장 흔한 형태다. 따라서 우리는 ‘가족적 가치들’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끝없이 듣게 된다. 하지만 교회 활동, 자선 활동, 정치적 자원봉사, 거의 모든 예술적, 과학적 탐구도 보수를 받지 못하는 일이다. ... 돈은 정확한 수량적 비교를 가능케 하는 능력을 가져왔다. 돈은 이만큼의 무쇠가 과일 음료 몇 병이나 페디큐어 이용권이나 글래스턴배리 페스티벌 입장권 몇 장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는 뻔한 일 같지만 아주 깊은 함의를 담고 있다. 그것은 어떤 상품의 시장가치란 엄밀히 말해 다른 것들과 비교될 수 있는(따라서 교환될 수 있는) 정도임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가치들’ 영역에서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1960년대의 급진파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누구나 물질적 번영을 누리며 행복한 이상주의자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려고 노력하며,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가치와 가치들 사이의 구분이 없어질 것이고, 모든 사람은 공동의 선을 위해 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결국 실제로 한 것이라고는 일한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직업을 자신의 응석받이 아이들을 위해 따로 떼어 둔 것뿐이었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본성에 관한 아주 중요한 함의를 담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해 더 일반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사회가 탐욕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존재는 선천적으로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이런 종류의 행동을 정착시키고, 이타적으로 처신할 권리를 은밀하게 상품으로 내걸기도 한다. 자신의 이기적 기질을 입증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이기적이지 않을 권리를 허용받는다. 혹은 게임이 그런 식으로 움직인다. 당신이 고생을 하고 머리를 굴려 충분한 경제적 가치를 축적하는 데 성공했다면, 현금을 손에 넣고 거액을 써서 고유하고, 더 높고, 추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즉 ‘가치’를 ‘가치들’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렘브란트의 그림들을 모으거나 경주용 클래식 자동차를 수집할 수도 있다. 아니면 재단을 설립해 여생을 자선에 바칠 수도 있다. 종착점으로 곧바로 건너뛰는 것은 명백히 사기다. ... 설사 어느 조각가가 아주 부유해져서 포르노 스타와 결혼하거나, 정신적 지도자가 롤스로이스를 여러 대 소유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부가 원래 활동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결과일 때만 합법적인 것으로 볼 것이다. 적어도 원래는 그들이 돈만 노리고 활동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그레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