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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토 오사무 <모른다는 방법> 한국어판 해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6. 3. 25. 12:26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하시모토 오사무 씨의 <모른다는 방법>이 한국어 번역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해설이라는 중책을 도맡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시모토 씨의 책은 한국어 번역이 아직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한국인 독자는 ‘하시모토 오사무가 누구야?’ 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시모토 씨는 일본의 문학과 사상이라는 영역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분입니다. 저 스스로 하시모토 씨의 데뷔작 <모모지리무스메>가 나오고 나서 줄곧 열렬한 팬입니다.
제가 <사가판 유대문화론>을 통해 고바야시 히데오 상이라는 걸 받았을 때, 선정위원을 대표해 선정 이유를 말씀해 주신 게 하시모토 씨였습니다. 30년래의 제 ‘우상’이었던 하시모토 씨가 제 책을 대하여 ‘이 부분이 좋았다’ 고 논평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감동했습니다. 하시모토 씨의 인사가 끝난 뒤 웃는 얼굴을 한 하시모토 씨와 악수하고 나서 짧은 당선사례를 했습니다. 그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시모토 씨는 오랫동안 제 우상이었으며, 제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니만큼 지금 제 글에 대해 하시모토 씨가 촌평해 주시는 건, 록음악을 꿈꾸는 초심자가 보낸 시음 테이프를 전설적인 존 레논이 듣고서는, 코드 진행을 지적하며 ‘이 부분은 좋네’ 하고 해설해 주는 것만 같이 들렸습니다.”
하시모토 씨가 돌아가시고 나서, 저희집 책장에 하시모토 씨 책이 몇 권 있는지 세어봤습니다. 다 해서 125권이었습니다. 이것도 많다 싶은데 하시모토 씨가 낸 책들에 비하면 절반도 훨씬 못 미칩니다. 그만큼 다작하는 작가였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유감스럽게도 그 절반 이상은 절판되었습니다.
물론 상황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쇼와 삼부작’이라고 나중에 이름 붙여진 소설 무더기도 있고, ‘요변 겐지 모노가타리’ ‘임종 헤이케 모노가타리’ 같은 고전문 번역, ‘”미시마 유키오”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하는 평론도 아직 접근 가능하고, 이 책 <모르는 방법>같이 신서로 출판된 건 대체로 입수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시모토 씨 자신이 “내 본령을 발휘했다”라고 공언한, 분류 불가능한 서책들이 있습니다. (‘아스트로 모몽가’, ‘시네마 호라 세트’, ‘98살 먹은 나’, ‘연꽃과 칼’*, ‘부모자식 세기말 인생상담’ 등등)은 소수의 독자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음에도, 더 이상 손에 손에 넣기 어려워졌습니다.
(* 연꽃과 칼: 그 일부를 한국어로 읽어볼 수 있다. - 옮긴이)
하시모토 씨의 책을 처음 접하는 한국의 독자에게 하시모토 씨를 어떻게 소개할지 고민해봤습니다. 인터넷 백과에 쓰여 있는 대로 설명하면 안 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개인적인 사항을 기술하여, 게서부터 하시모토 오사무라는 인물의 실감사는 모습을 상상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하시모토 씨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친절한 사람’ 그리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면모가 나란한 작가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직한 사람’이다 하는 건 이 책의 첫 몇 페이지만 읽어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시모토 씨는 ‘얼버무리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하시모토 씨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하지만 게서부터 출발하여 ‘모르는 것이니 가까이 않겠다 (자신의 무지가 들켜버리니까)’하는 식은 아니었습니다. ‘모르는 것이니 알고 싶다(자신이 조금이라도 똑똑해지고 싶으니까)’ 하는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하시모토 씨와 몇 번 정도 대담한 뒤에 책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하시모토 오사무와 우치다 타츠루’, 2008). 그때 들었던 말씀 중에 가장 놀랐던 것이 하시모토 씨가 ‘변요 겐지 모노가타리’를 쓰기 시작했을 무렵 무라사키 시키부의 원작 ‘겐지 모노가타리’를 통독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입니다. 하시모토 씨는 도쿄대학 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재학 중에 국문과 학생이나 대학원생들이 겐지모노가타리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서 ‘좀 아닌 듯한 느낌’이 들어서 지레 겁을 먹은 채 한 번도 안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겐지 모노가타리’의 현대어 번역을 시작했을 시점에서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이 앞으로 어떤 운명을 겪을 것인가를 몰랐습니다. 결국, 참으로 예외적이기는 합니다만, 하시모토 씨의 위대한 번역에 박차를 가했던 건 ‘이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강한 호기심이었던 것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리무중이고, 자신과 주위 사람들 모두 어떻게 될 지 ‘잘 모를’ 때에, 인간은 어떤 식으로 사고하고, 느끼는가, 그것을 하시모토 씨는 등장인물들과 공유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똑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시모토 씨의 데뷔작 ‘모모지리무스메’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제가 하시모토 씨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화자 사카키바라 레이나에게 말을 시키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제외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썼던 당시 하시모토 씨는 28세, 이야기 속 화자인 레이나는 15세, 고등학교 1학년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13살 차이 납니다. 따라서 철저히 레이나가 되기 위해서 하시모토 씨는 13년간의 자기 기억을 전부 배제했다고 합니다. 하시모토 씨가 실시간으로 경험했던 것이 있을지라도 레이나의 경우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일은 타인의 회상을 통한 단편적인 것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시모토 씨는 상상적으로 13세 연하의 소녀가 되어서 그 사람의 눈으로 보면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가, 그렇게 보이는 것을 기술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기억을 빼놓았습니다. ‘알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두어, 그것을 소설을 쓸 때의 발판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보통 사물과 현상에 관해 해상도가 높은 이미지를 제공하고자 하면 사람은 정보를 ‘가산’합니다. 무릇 정보가 많이 있으면 사물과 현상의 윤곽이 뚜렷하니 의미도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하시모토 씨는 사고방식이 달랐습니다. ‘감산’하면 확실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 이 대목은 정말 중요해서 강조합니다. “지도에는 정보가 많은 것보다 적은 게 좋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직관에 반하기 때문에, 저도 사실 헷갈려서 추기해 둡니다. – 옮긴이)
속편인 ‘그 후 의리 없는 모모지리무스메’에는 다키노우에 게이스케라는 남자애가 화자로 등장하는 ‘대학번외편 당사자 남과’ 라는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게 또 대단합니다. 다키노우에는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가지고 있는 어휘가 빈곤하고, 논리를 진전시키는 힘도 약합니다. 따라서 독백으로만 구성된 단편입니다. 그런데, 다키노우에는 금방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 다키노우에는 성실한 사람이므로 말문이 막혀도 뻔한 자기 어휘로 어떻게 하려는 속 좁은 짓을 하지 않습니다. 누가 말을 시켰는데 말이 안 나오면 침묵하여 ‘……’하게 됩니다.
이 ‘……’가, 진짜 대단합니다. 가장 긴 경우는 3쪽짜리 ‘……’입니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겁니다.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데,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초조함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시모토 씨는 그 경험을 그대로 작품화한 것입니다. 이런 작가는 일본 문학 사상 하시모토 오사무 말고는 없습니다. 진짜 엄청나지 않나요?
‘미래는 오리무중’이므로 다음 순간에 무엇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과거는 사라져버렸으며, 이제는 생생한 리얼리티를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미래와 과거의 ‘리얼리티’야말로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현실의 ‘리얼리티’를 담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이죠, ‘스스로 지금, 여기, 살아있음’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는 건, 과거는 지나가 무엇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며,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는 역시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현실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잘 모름’이라는 말씀입니다.*
(* 이 대목은 레비나스의 시간론 일부를 참조할 것. – 옮긴이)
우리가 지금 스스로 리얼리티를 느끼고 있는 건, 과거의 자신이라든가 미래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다르다’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것을 했는지 지금 와서는 ‘알 수 없습니다’. 미래의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것을 하는지 지금 시점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진정 ‘알 수 없음’에 포위되어 있음으로 하여 비로소 ‘지금, 여기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이 자리매김합니다. 자기동일성의 결여야말로 나의 자기확신을 뒷받침해줍니다.
하시모토 씨는 그 배리(모순이 아님 – 옮긴이)를 직감적으로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모름’이야말로 가장 리얼하고, 가장 견고한 발판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모름’이라는 발판을 딛고 보는 세상의 풍경, 그 세상에서 말할 수 있는 말, 그것이 가장 적절히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시모토 씨는 저술활동을 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하시모토 씨는 정말로 정말로 특이한 철학자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식으로 소개를 드리면 하시모토 씨의 책이 좀 읽어지고 싶어지시지요?
부디 될 수 있는 한 많은 하시모토 씨 저작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많은 한국인 독자를 얻을 수 있기를 고대하여 마지않겠습니다.
2925년* 10월
우치다 다쓰루
(* 저자의 의도를 존중해 그대로 살립니다. – 편집자)
글쓴이: 우치다 타츠루 (도쿄대 불문과 졸업. 가이후칸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오길비: 우치다 타츠루를 오래 읽으면 머리가 좋아집니다. 머리가 좋아야 읽을 수 있도록, 설령 머리가 좋지 않더라도 잠자코 읽어나가면 머리가 좋아지도록 글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제 아이큐가 십몇은 올라갔을 겁니다. (WAIS검사의 어떤 부분은 후천적으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특히 지금처럼 우리가 믿었던 많은 것들이 무너져가는 때에(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에), 우치다 타츠루식 사고방식은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손이 느리지만, 모쪼록 AI 번역으로라도 읽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될 수 있으면 번역도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한번 써보면 놓치는 대목도 확실히 알 수 있어 좋습니다. 일본어 배우기 쉽잖아요. 저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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