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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주의자의 초상’ 문고판 후기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6. 3. 26. 13:52
‘코로나 이후의 세상’이 문춘문고에 등재, 문고본으로 나오게 되었다. 제목을 바꾸었다. 이는 수록된 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반지성주의자의 초상’을 딴 것이다. 문고판에는 ‘들어가며’와 ‘나가며’를 새로 썼으며 모리모토 안리 선생과의 대담이 추가로 들어가 있다. 아래는 ‘나가며’이다.
마지막까지 읽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이번 문고판 교정쇄를 읽고 나서 다시금 느꼈던 건, 장르라든가 주제가 전혀 다른 문장을 엮었음에도, 모두 공통된 특성을 가졌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래 머무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적으나마 지면을 허락받았으므로 마지막에 이르러 이 얘기를 좀 해드리려 합니다.
‘이즈키’라는 말은 무도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발바닥이 지면에 붙어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를 이릅니다만, 넓게는 ‘정형적인 말밖에 할 수 없게 되는 것’, ‘상동적인 행동을 반복하는 것’, ‘마음이 굳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무도에서는 단적으로 ‘이즈키’가 걸리면 죽는다고 배웁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한, ‘이즈키’가 걸리면 죽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즈키’가 걸리면 살아가는 지혜와 힘이 줄어드는 건 분명합니다. ‘이즈키’가 걸린다는 건 인간으로서 성장하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못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무도에서는 ‘승부를 다투지 않고 강약에 매달리지 않는다’를 우선 가르칩니다. 승패강약이라든지 지속교졸의 상대적인 우열을 겨루면 ‘이즈키’가 걸리기 때문입니다. 승부에서 지면 졌다는 사실에 ‘이즈키’ 하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패배감에 진이 빠진 사람은 그것이 트라우마적 경험이 되어서, 뭐가 되었든 ‘져버린 자신’에 갇혀버리게 됩니다. 패배의 경험은 사람이 변화하는 걸 막습니다.
하지만 그와 똑같이 승리에 ‘이즈키’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기면 그것 자체로 성공체험이 됩니다. 사람은 성공체험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이긴 이상, 이기는 방법을 바꿀 필연성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겨버린 탓에 성장이 멈춘’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위험성을 본인은 알 수 없습니다. 권력이 손에 들어오고, 재화가 늘어나며, 사회적 위신이 높아지기만 하는 사람은 변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이 함정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본질은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멈춘 사람은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어도, 인간적으로는 죽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아이덴티티’라는 말에 강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짜 내 모습을 찾아내기’라든가, ‘자신답게 살아가기’라든가 ‘자기 자신을 찾는 여행’같은 말을 할 때에 ‘자신’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을 발견해서 이제 일생 그것을 놓지 않고서 소중히 껴안고 있을 그런 ‘무언가’가 무엇인지 싶지만, 아무튼 그런 걸 발견해 내서 뭘 할 셈인지요.
불교 용어로는 ‘자신에게 집착한다’ 하는 걸 ‘아집’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의 도를 수행한다는 것은 ‘아집을 버리고서 해탈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무도 수행 역시 ‘아집을 버리고 자재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아이덴티티’란 건 하나의 아이디어입니다. 분명히, 그런 것을 탐구함으로써 실제로 생명력이 높아지고 지성이나 감수성이 활성화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방편’으로서 썩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아이덴티티’ 때문에 사람들이 분단되고 대립하며 대화의 화로가 닫히게 된다면 그런 건 없는 게 좋습니다.
저는 뼛속까지 실용적인 인간이므로 ‘사는 지혜와 힘을 높이는 것을 채용하고, 사는 지혜와 힘을 줄이는 것은 채용하지 않는다’ 하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를 나누는 기준이 무엇이냐?’ 하고 되물어 온다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이라고밖에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뭐가 이리 근본이 없는 인간이더냐’ 하고 혼이 나겠지만, 저는 정말로 근본이 없는 인간이므로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저 저는 한 번 고정적인 원칙을 채용하면 그것을 죽을 때까지 관철하는 고집 센 삶의 방식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게 너무 좋아서 원리주의적으로 살고 싶은 사람을 말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삶의 방식은 취하지 않습니다. ‘선비는 사흘 만나지 않으면 눈을 비비고 상대해야 한다’는 말 그대로, 저는 ‘사흘 후에는 딴사람이 되어 있는’ 그런 연속적인 자기쇄신을 염두에 두며 살고 싶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해도 ‘우치다는 항상 똑 같은 말만 하는데 어디가 딴사람이냐는 거냐?’ 하고 질타가 있는 것도 양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일 조금씩 변화하고 있습니다.
식물이 성장할 때, 잎의 끝단은 태양을 향해서 부드럽게 계속 태양의 움직임을 따라갑니다. 저는 그 ‘끝단’이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존재’가 되기를 지향하는 그 자체를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이상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제 철학 스승 에마뉘엘 레비나스 선생은 이 ‘끊임없이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되려는 지향’을 ‘자기 동일성(identity)’과 차별화하기 위해 ‘단독성(ipséité)’이라고 술어화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기동일적’이기보다는, ‘단독자로서 생명과 시간 가운데 있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것이 ‘이즈키’하지 않는 것이라고 저는 현재로서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단독자는 점점 변화하고 있음으로써, 그 가운데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할지도 모르므로, 그때는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문고판 후기’에 이상한 얘기를 쓴 점 사과드립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문고화에 온 힘을 다 해주신 문예춘추사의 이케노베 도모코 씨과 권말 대담 상대가 되어주신 모리모토 안리 선생의 너른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덕분에 책이 만들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2025년 10월
우치다 다쓰루
글쓴이: 우치다 다쓰루 아이키도 가이후칸 관장 /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 주요 저서 <하류지향> 등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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