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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늙은이에게 배우는 늙는법 강의』 한국어판 들어가며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6. 3. 23. 16:04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다쓰루입니다.



    『늙은이에게 배우는 늙는법 강의』 한국어판을 집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이 책은 젊은 여성 편집자와 ‘늙음’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왕복서한입니다.



    그 계기가 뭐냐고요. 본문에서도 다루겠지만, 신진 경제학자가 일본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책’은 ‘고령자의 집단자결’이라고 발언했기 때문입니다. 노인이 사회의 요직에 계속 눌러앉아 있는 게 일본 사회에서 일어나는 오늘날의 불상사들의 주된 원인이므로, 노인들은 하루빨리 “사라져 주기를 바란다”라고 그는 언론에서 거듭 언급했습니다. 일약 언론의 총아가 되었지요. 이 발언을 도화선으로 삼아 일본 언론에서는 ‘세대 간 대립’을 둘러싼 의논이 한동안 시끄러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의 사건입니다.

    하지만 2025년 현재 일본에서는 위에서 말한 ‘세대 간 대립’ 의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쏙 들어가고, 현재로서는 ‘일본인 대 외국인’이라는 인종간 대립에 사회적 위기의 주된 원인이 있다는 의논이 떠들썩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일본인 제일주의’를 내건 정당이 지난 참의원 선거에서 약진을 이뤘던 점은 한국에도 알려졌을 것입니다만).

    노인과 젊은이 사이의 이해충돌이 되었든, 일본인과 외국인 사이의 이해충돌이 되었든간에, 국내에 ‘이항 대립’을 끌어들여서는, 한 쪽을 ‘만악의 근원’이라고 지칭하고, 그것을 배제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는 그런 사고방식은 ‘단순주의(simplism)’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음모론과도 친화성이 높기도 하거니와, 이런 유형의 사고방식을 사람들이 선호하는 사회는 분명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현재 일본 사회는 그런 의미로 따지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단순주의라는 것은 현실이 복잡할 때에, 어려운 사항을 생각하기가 마뜩찮음에 따라, ‘적’을 설정하여 그것을 배제하면 문제는 전부 해결된다고 믿는 심적 경향을 가리킵니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이항 대립 도식에 손쉽게 때려맞혀 주므로 지적 부담이 급거 줄어듭니다. ‘생각하는 건 귀찮아’ 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사고방식(이라기보다는 ‘생각 않는 방식’이겠지요. 그런 일본어는 없습니다만).

    슬픈 얘기지만, 현대 일본인은 ‘복잡한 문제를 복잡한 채로 다루는’ 걸 못 하게 되었습니다. 곧장 진위 시비 선악의 판정을 내립니다. 이를 저는 우선 ‘머리가 쪼그라든’ 일종의 병적 상태에 처해 있다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열화했다든가 사악해졌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머리의 용량이 줄어들었을 따름’ 입니다.
    (* 診立; 우치다 선생이 지어낸 말 - 옮긴이)

    쉽게 결론을 낼 수 없는 복잡한 문제는 미해결 상태 그대로 가만히 관찰할 것이며 결론을 서두를 일이 아니다, 그러한 행동거지를 저는 장려하고 있습니다.

    일본어에서는 종종 ‘주고시’ 한다는 말을 합니다. 한국어에 같은 표현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뜻은 대략 아실 겁니다. 선 것도 아니요, 앉은 것도 아닌, 결정 안된 자세를 계속 유지하려면, 나름대로 근력이 필요합니다. 그것과 똑같은 자세를 지적 활동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을 저는 ‘머리가 큰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동양에서는 사대부의 유구한 조건 중 하나로 ‘그릇이 클 것’이 꼽혔습니다. 노자의 어록에 “대방무우 대기만성 대음희성 대상무형”이라는 게 있습니다. ‘커다란 사각에는 각이 없다. 커다란 그릇은 다 구워질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커다란 소리는 잘 안 들린다. 커다란 것에는 형태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커다랗다”는 점에 압도적인 가치가 부여되어 있었던 셈이죠. 이것이 동양의 전통적인 인간관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고방식에 깊이 공감합니다.

    단순주의는 ‘작게 줄어드는 것’과 ‘이물을 포함치 않고 순수히 함’을 염두에 둔 이데올로기입니다. 동양의 전통에 따르면 이것은 ‘귀태’*라고도 할 만하죠. 그럼에도 근대를 되돌아보면 중국, 조선, 일본 할 것 없이 단순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간헐적으로 발증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병든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게 되는 때에는 바람직한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합니다.
    (* 후세 사람들이 정치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를 싸잡아 평하며 종종 쓰는 말. 이런 맥락에서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라는 뜻이다. - 옮긴이)

    이 책은 그런 ‘만악의 근원은 … 이다’ 하는 집요한 사고정지에 대하여, ‘그렇지 않아. 세상에는 다양한 사항들이 있어’ 하고 ‘머리를 풀어주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주의에 대하여 복잡주의란 것을 내걸고서 ‘단순주의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라는 도식을 세우게 되버리면 그야말로 ‘단순주의의 재생산’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이죠.


    단순주의는 족칠* 대상이 아니라, 치료의 대상이라고 저는 여깁니다. 병이 나으려면 결국 환자 자신이 ‘살아갈 의욕’을 차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순주의자 자신이 ‘단순주의는 재미가 없다. 좀 세상을 복잡하게 바라봐야지’ 하는 ‘생각할 의욕’을 스스로 갖게 해주는 것 말고는 약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복잡하게 바라보는 건 정말 재밌다’ 하고 스스로 납득하도록 시켜줄 수밖에 없습니다. 병이 있는 사람이 ‘살고 싶다’고 여기는 까닭은, ‘사는 건 재미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 공교롭게도 위에서 언급한 군인 출신 박정희 대통령에게 항상 “토벌”이라는 열쇠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기 마련이다. 원문 討伐 토바츠. - 옮긴이)

    제 글은 감히 말하면 ‘얘기를 단순화 하지 않고서 될 수 있는 한 복잡한 채로 다루는’ 기술의 실천례입니다. 얘기가 쉬운 결론으로 흘러가서 ‘자 이제 끝’ 하는 기미가 보이면, 앞뒤 재지 않고 ‘급발진’해 들어와 기어코 옆길로 새게 만들어 다른 문맥 속에 바로잡아두는, 뭔가 ‘주고시’를 유지케 할 따름입니다.

    뭐하러 그런 짓을 하냐 싶으실 겁니다. 근데 재밌거든요. 진짜로. ‘주고시’ 자세를 계속 유지하면 다리에 근력이 붙는 것처럼, 까다로운 문제를 복잡한 채로 다루면 ‘머리가 커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자면, 이런저런 방문객이 속속 찾아드는 집에는 유숙시킬 식객과 문전박대를 할 과객을 재빨리 선별하지 않고서 일단은 ‘사랑방’*에서 차라도 마시라고 하면서 기다리게 합니다. 그러려면 이 ’사랑방’은 나름대로의 너비를 필요로 합니다. ‘머리가 커진다’는 건 그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 원문은 待合室 마치아이실. 이른바 철도역의 대합실… 순화된 언어로 맞이방이다. - 옮긴이)

    인간이 생각해낸 것은, 그 무엇이든 (아무리 사악하더라도, 못난 것이라도) ‘그런 짓거리를 인간은 고안해 낸다’는 귀중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에 떠오른 것은, 그 어느 것이나 음미할 가치가 있습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옆길로 새기는 했습니다만, 이 책으로 말할것 같으면 ‘노인은 그냥 죽어라’ 하는 젊은 지식인에 대하여 노인이 내놓은 하나의 대답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근데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당신 말이 틀렸다’가 아니라, ‘젊으신 분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걸 나로서는 이해가 갑니다. 그야 나도 예전에는 젊은이였으니까. 지화자 좋다’ 라는 메시지입니다.

    노인에게는 노인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고, 노인 나름대로의 사고 문법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항들을 전면에 앞서 주장하는 저작물은 아마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을 거로 생각됩니다. 아,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몽테뉴의 수상록이라든가 아나톨 프랑스가 쓴 『에피쿠로스의 정원』이 살짝 거기에 비슷하지 않나 해요. 요런 식으로 한순간에 앞에 한 말을 물려도 태연한 게 ‘노인 나름대로의 사고 문법’이 가지는 현저한 특징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주 본문 속에서 티백을 재탕 삼탕해 둘 거니까, 기대를 하세요.

    얘기가 길어졌으므로 ‘들어가며’는 여기서 마치기로 합니다. 모쪼록 마지막까지 재밌게 읽어주십시오.

    (9월 16일)

    (2025-09-16 17:55)



    글쓴이: 우치다 타츠루 / 1950년생 / 아이키도 가이후칸 관장 /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 주요 저서 <하류지향> 등.


    오길비: 갑자기 생각난 얘기라서 씁니다. 한참 처음 블로그 시작했을 무렵,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멋진” 분입니다.) “어떤 외국어를 모국어로 옮긴 결과물에, 정답과 같은 글이 있느냐”. 그 자리에서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되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그런 건 (적어도 제 힘으로는) 죽을 때까지 (..!)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요행히 그렇게 보이는 것을 선보일 수는 있겠죠. 그래도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번역문은, 우치다 타츠루 텍스트는 무한입니다.”

    이게 바로 다름 아닌 AI 시대에도 제 나름대로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도입니다.
    (AI 시대가 걱정이라는 분은 유감스럽습니다. 아마추어가 할 만한 생각이라 그런가. 워낙 제가 근본이 없다 보니 이해해주십시오.)


    아, 그리고 한국인만을 위해서(?) 이렇게 글을 써주신 우치다 선생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두 번째(아마도, 아마) 번역자로서,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주고시는 즐거운 것이구나. 어화둥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