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승인이 부족해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6. 7. 30. 14:15

    학교법인의 이사장 자리에 앉은 지 두 달이 흘렀다. 일주일에 2~3일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학교에 얼굴을 비춘다. 회의에 참석하고, 사람들 얘기를 듣고, 서류를 읽으며, 품의서에 도장을 찍는 등의 일을 한다. 생각건대 필자는 이러한 종류의 ‘데스크 워크’를 과거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음을 깨닫는다. 언제나 줄곧 “누군가를 상대로 자설을 표현“하기만 했으며, 그걸로 먹고살아왔다(이 원고를 쓰는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이번 직무는 다르다. 굳이 말하라면, 남의 말을 듣기만 하는 업무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신선한 경험이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학교 사람들 얘기를 듣다 보니 알게 된 게, 조직 내부 갈등 상당수가 ‘자아의 병’이었더란 점이었다. 가와이 하야오 선생은 일찍이 ‘마음의 병은 세상의 병이다‘라는 탁설을 말씀하신 바 있다. 보니까 진짜로 그랬다. 사회가 아프니까, 사람 또한 아프다.

     

    어떠한 병인고 하니, 필자의 가설로는 ’승인 욕구가 불러일으킨 병‘이었단 거다. 자기 노력에 내리는 주위의 평가가 부당하다, 사람들이 나한테 배려를 안 해준다, 나는 진짜 사랑하는데 상대에게 이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한 수소가 많다. [* 애처롭게 호소한다. - 역주]

     

    내가 여기에 있고,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필사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주위 사람이 똑바로 봐주기를, 뭘 말하고 싶은지 알아주기를 바란다. 내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에 가치가 있음을 알아봐줬으면 한다. 그 승인이 주어지지 않으면 나의 존재기반이 무너지고, 진짜로 내가 존재하는지조차 헷갈려버린다. 이러한 불안의 작동 기제는 필자도 알겠다. 그러나, 이 불안은 다소간 도가 지나치다.

     

    ‘평가’ ‘사정’이라는 말이 귀따갑게 들려오기 시작했던 건, 90년대 끝무렵 정도였던 것 같다. 경제적 거품이 꺼지면서, 일본 사회 전체가 ‘지질해졌던‘ 무렵이었다. 먹을 파이가 커다랗던 때에는 모두가 흡족히 파이를 우걱우걱하였다. 그러나 파이가 줄어든 순간, 말본새가 쩨쩨해졌다.

     

    ‘잠깐만 봐봐. 대체 어떤 기준으로 파이를 분배하고 있는 거지? 누가 더 가져간 거 아냐? 내가 챙겨야 될 몫을 누군가가 가로챈 거 아니냐고. 공정한 기준을 적용해 엄밀하게 파이를 나눠야 되지 않겠어?‘라는 말을 꺼내드는 사람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때부터 무임승차자 색출이 시작되고, 근무고과를 성가시도록 하게 되었으며, 생산성, 공헌도에 따라 개인의 등급을 매겼고, 이를 근거로 자원을 차등분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차츰차츰 망가졌다. 당연한 얘기다. 왜냐, 아무리 정밀히 값을 매긴대도, 평가를 한대도, 등급을 부여한대도, 그 행위 자체는 하등의 가치도 창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1000만 원을 어떻게 적절히 분배할 것인가’를 주제로 회의가 거듭되는 사이 참석자들에게 제공할 중식비가 1000만 원을 넘어버렸단 유머가 있다만(내가 예전에 떠올렸다), 평가 비용이 일정 한도를 넘으면, 집단은 완전히 야위어버린다. 평가할 여유가 있다면, 송편 한 알이라도 더 빚는 게 낫다.

     

    필자 정도 나이대가 되고 보면 일본의 고도성장기가 어땠는지 안다. 연평균 성장률 10%였던 시대가 생생하다. 딴건 모르겠고 참 ‘와일드’하면서 ‘아나키’한 시대였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업종이 생겨났고, 온통 ’블루오션‘ 이었다. 창업자들은 허구한 날 제멋대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게 또 잘 풀리니까, 어찌됐든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의 고용 환경이 조성되었다. ‘고양이 손’한테 엄밀한 근무고과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 이거 좀 해줄 사람?’ 하고 SOS를 치면 ‘오우, 내가 제격이지’ 하고 손을 드는 게 ‘인사(HR)’ 였다. ‘심플’한 시대였다.

     

    그러나, 일본이 ‘지질‘해지고 나서부터 ’「평가」라는 신앙’이 시작됐다. ‘나에 대한 승인이 부족‘하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게 바로 평가 시스템이 도입된 연후였다. 

     

    ‘승인이 부족해’라는 말은 ‘평가가 처졌어’라는 말이다. 꼴찌로 자리매김하여 자원 분배에서 뒤로 밀리는 것.  그것에 괴로워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네를 어찌 평가하든, 그냥 신경을 안 써버리면 되는 거 아니냐” 하고 젊은이한테 말했더니, 그는 괴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치다 선생은 당신이 올리신 글에 달린 댓글 안 보세요?” 하고 묻기에 “안 봐”라고 했다. 낯 모를 인간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 필자는 관심이 없다. 집까지 찾아와서 ‘글 그만 써’ ‘강연 하지 마’라고 하려거든 그건 제발 사절이다만, 아무튼 모르는 사람이 인터넷에 뭘 쓰는지 필자는 알 바가 아니다. 종종 “우치다 선생님, 선생님이 올리신 글 때문에 인터넷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어요” 라고 친절히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 근데 화재가 났든 화재를 진압했든 간에 그건, 어차피 화면 위에서 명멸하는 깜박거림에 불과하다.

     

    이렇게 대꾸하니 상대방은 눈이 휘둥그레해져가지곤 발발 떨었다. 젊은 사람들은 ’에고 서칭‘이란 걸 한다고 한다. 누가 자기한테 욕하는 사람을 발견했다 하면 그 즉시 계정을 찾아가서, 과거 글 내역을 전부 읽어본 뒤, 어떤 계정을 팔로우하는 인간인지까지 뒷조사한다는 말을 듣고서 이번에는 필자가 놀랐다. 그렇게까지 자기가 ‘사회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신경이 쓰인다면, 이건 거의 병적 수준이다.

     

    ‘평가’와 ‘분배’ 사이에 정밀한 상관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명제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려서 생겨난 질병이다. 높은 평가를 받은 인간에게는 두둑한 보상이 주어지고, 평가가 낮은 인간에게는 ‘페널티’가 주어진다. 패자가 노상에서 궁사한다 할지라도 그건 ‘스스로가 책임질 일‘이라 하는 이런 비정한 이데올로기(신자유주의라고 한다)가 ’마땅한 승인이 부족하다‘는 불안감에 항상 몸이 달아있는 대량의 인간을 양산해냈다. 필자에게는 그리 보인다. 실제로, 모두가 숫자에 겁먹는다. 어른이나 애나 할 것 없이 겁을 집어먹는다.

     

    그러나 ‘엄밀한 평가’는 집단을 약화시킨다. 왜냐하면 위에서 쓴 바와 같이, 평가를 위해 들이는 제반 비용이 값진 무언가를 전혀 만들어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밑 빠진 독처럼 자원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이유로, ‘엄밀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표본 수가 많아야 하기 때문이다. 토익 점수에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는 그것이 수험자 수가 가장 많은 시험이기 때문이다. 대량의 인간이 동일한 과제를 부여받는 경우에 산정은 엄밀해진다. 그런데, 전 인원이 영어밖에 할 줄 모르는 집단과, 다언어 화자로 산재된 집단을 따져보면, 문화적인 소양으로 보든 깊이로 보든, 후자에 이점이 있다는 점을 누구든 알 수 있을 터이다.

     

    엄밀한 평가는 집단의 균질화를 요청한다. 그리하여 집단은 다양성을 잃고, 위기 내성을 잃으며, 복원력을 상실한다. 좋은 말로 할 때 이제는 그만 평가와 값매기기에 매달리지 말아줄 수는 없을까.

     

    (JA:COM 6월 20일)

     

    (2026-07-19 08:48)

     

     

    글쓴이: 우치다 타츠루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