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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려읽기) 타인의 고통
    인용 2026. 7. 27. 08:48

    그런데 엔터테인먼트엔 문제가 있습니다. 무료로 제공되는데, 매일 보니까 순식간에 질려버립니다. 인간에겐 욕구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가장 아래는 의식주, 그다음이 사랑, 안전, 자아실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중산층은 더 이상 자아실현을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자아실현을 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하는 일, 커리어가 있어야 하는데, 나라에서 먹여 살려주고 엔터테인먼트까지 떠먹여 주다 보니 각 개인이 자기 손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전쟁은 이미 직업 군인과 용병들이 하게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이제 더 이상 전쟁에 안 나가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나라에서는 더 극단적인 엔터테인먼트를 내놓게 됐습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를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콜로세움에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 동물이 사람을 잡아먹는 장면이 관중들 앞에서 라이브로 펼쳐졌습니다. 기록으로는 시민들이 여기에 정말 굉장히 열광했습니다. 심지어 타국에서도 이걸 보려고 몇 달씩 걸려서 몇 번씩이고 찾아오곤 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관람료도 전부 무료였다는 것입니다.

     

    기회가 되시면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이라는 책을 꼭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가 말하기를,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행복 중 하나가 타인의 고통이라는 겁니다. 내가 행복하지 못하고, 내 행복을 더 이상 늘릴 수 없으면, 타인의 고통을 통해서 내 행복을 키울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콜로세움 같은 곳에서,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5미터 앞에서 누군가는 사자에게 잡아먹히는데, 나는 그걸 보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타인의 고통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고 큰 고통은 다름 아닌 죽음입니다. 그걸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편안하게 앉아서 지켜보는 겁니다. 지금으로 치면 젤라토 같은 걸 먹으면서 봤을 수도 있겠습니다.

     

     

    (...) 20세기에 와서는 외계인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안테나를 설치하고 "너희 있니? 우리는 여기 있는데 왜 안 오니?" 하고 신호를 보냈습니다. 아직은 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30만 년 동안의 외로움', 이게 바로 인류 문명의 핵심이었다는 것입니다. 30만 년 동안 인간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존재는 오로지 다른 인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인간도 사실 알고 보면 나랑 똑같습니다. 똑같이 외롭고, 똑같이 무지한 존재들이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보다 훨씬 더 큰 존재, 내가 원하는 답을 다 해줄 수 있는 존재를 항상 원해왔는데, 그렇게 갈구해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챗GPT 덕분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인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원할 때 언제든지 대화할 수 있지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다들 중독되는 것이지 않나 싶습니다. 결국 인공지능이라는 것이 21세기 사람들이 가지는 당장의 욕구를 풀어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원천적으로 가지고 있던 오랜, 근본적인 욕구를 풀어주는 기계이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몇 가지 장점이 더 있습니다. 미국의 소설가 고어 비달(Gore Vidal)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친구가 성공할 때마다 본인의 자아가 무너지는 것 같다." 아주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사회적으로 이렇게 대놓고 얘기할 수 없기 때문에 쉬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친구가 성공하면 사회적으로는 "너무 기뻐" 하지만, 집에 가서는 홧술 마십니다. 예를 들어 저는, 제가 어렸을 때의 친구들 중에서 지금 저보다 성공한 친구들 전화번호를 다 지워버렸습니다. 어떤 친구가 하버드 대학교 교수가 됐을 때, "하버드? 카이스트보다 좋은 곳이잖아" 하고 바로 연락처를 지워버렸습니다. 솔직히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요.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Schopenhauer)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산책을 혼자 하는 게 좋을까, 함께 하는 게 좋을까? 눈치채셨겠지만 사실은 산책을 인생에 비유해 말한 것입니다. 혼자 산책하면 편합니다. 그런데 외롭습니다. 함께 산책하면 외롭진 않습니다. 그런데 불편하지요. 결과적으로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게 제일 편합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사회성을 갖춘 영장류이기 때문에 타인과 같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인간은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는 두 가지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내가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일까요? 혼자 있으면 잠깐 행복한데, 외롭습니다. 그럼 같이 있으면? 외롭지는 않은데 불편합니다. 그래서 항상 두 가지 상태를 오가게 되는 것입니다.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반응이지, 결코 이상하거나 변덕스러운 게 아닙니다.

     

    쇼펜하우어가 제안한 방법은, 혼자-함께 산책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이 숲에 들어가서 절대 대화하지 않고, 각자 보고 싶은 거 보고, 외로울 때마다 잠깐 쳐다보고, 옆에 사람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계속 산책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독특한 철학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쇼펜하우어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김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