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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려읽기) 손글씨의 낭만
    인용 2026. 7. 11. 17:09

     

    윈스턴은 술을 찻잔에 가득 찰 만큼 따르자마자 쓰디쓴 약을 삼키듯 진저리를 치며 단숨에 마셔 버렸다. 윈스턴은 '승리 담배(VICTORY CIGARETTES)'라고 표시된 구겨진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무심코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그만 담배 가루를 몽땅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는 다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거실로 돌아가서 텔레스크린 왼쪽에 있는 자그마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런 다음 서랍에서 펜대와 잉크병, 그리고 붉은색 뒷표지에 앞표지는 대리석 색깔인 두툼한 4절 노트를 꺼냈다.

     

    그것은 그야말로 근사한 노트였다. 오래되어 색이 약간 누렇게 바래기는 했지만, 매끄러운 크림색 종이로 된 노트는 적어도 지난 사십 년 동안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십 년도 더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윈스턴은 이 도시의 빈민가(어느 빈민가였는지 생각나지 않는다.)에 있는 쾨쾨한 곰팡내가 나는 자그마한 고물상의 진열장에서 그 노트를 발견하자마자 갖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당원들은 일반 상점(이를 '자유시장 거래'라고 칭한다.)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규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구두끈이나 면도날 같은 갖가지 물건들이 그 같은 일반 상점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거리를 위아래로 재빨리 살펴본 다음 상점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노트를 2달러 50센트에 샀다. 그때만 해도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노트를 갖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무슨 죄라도 지은 듯 그것을 조심스레 가방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속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고 해도 노트는 의심을 살 만한 물건이었다.

     

    윈스턴이 시작하려는 일은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일기 쓰기는 불법이 아니었다.(법이란 게 없으니 불법이란 것도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발각될 경우 사형 아니면 적어도 강제노동 이십오 년 형의 선고를 받을 것이 틀림없었다. 윈스턴은 펜촉을 펜대에 꽂고 펜 끝의 기름기를 닦아 냈다. 펜은 서명할 때도 거의 사용되지 않는 구식 필기도구였다. 그럼에도 그가 그것을 남몰래 어렵사리 구한 이유는 근사한 크림색 노트에는 볼펜으로 끼적거리기보다 진짜 펜촉으로 써야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손으로 글을 쓰는 일에 익숙지 않았다. 아주 짧은 글 외에는 모든 것을 구술기록기에 불러 주는 것이 상례였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펜촉을 잉크에 적시고 잠시 머뭇거렸다. 짜릿한 전율이 뱃속을 훑고 지나갔다. 종이에 글을 쓴다는 것은 결단력이 필요한 중대 행위였다. 그는 작고 서툰 글씨로 다음과 같이 썼다.

     

     

    1984년 4월 4일

     

     

    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앉았다. 무력감이 그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우선 올해가 1984년이 맞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나이가 서른아홉 살인 것만은 거의 확실했다. 1944년이나 1945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틀림없이 그쯤 될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일이 년 내의 어떤 날짜도 정확하게 말할 수가 없다.

     

    누구를 위해서 이 일기를 쓰는가? 그는 별안간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미래를 위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세를 위해? 그는 잠시 일기장에 적힌 날짜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문득 '이중사고(doublethink)'라는 신어가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절실히 깨달았다. 어떻게 미래와 소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일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미래가 현재와 비슷하다면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다르다면 이 수난의 기록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노트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텔레스크린에서 귀에 거슬리는 군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데다 애초 의도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지난 몇 주 동안 그는 이 순간을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 왔다. 그러면서 용기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사실 글을 쓰는 일 자체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지난 수년 동안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 무수한 독백을 글자 그대로 종이에 옮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런 독백마저 고갈되어 버렸다. 그런 데다 정맥류성 궤양이 생긴 자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렵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원스레 긁어 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긁기만 하면 어김없이 벌겋게 부어올라서 염증을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와 함께 지나갔다. 앞에 놓인 노트의 공백, 발목 피부의 가려움증, 군악대의 나팔 소리, 술로 인한 약간의 취기....... 그가 의식하는 것이라고는 고작 이런 것들뿐이었다.

     

    그는 별안간 공포감을 느끼며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였다. 그는 어린아이가 쓴 것처럼 작고 비뚤비뚤한 글씨로, 첫자를 대문자로 쓰는 것과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는 것도 무시한 채 노트의 공백을 메워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