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가려읽기) 시대예보: 경량문명의 탄생
    인용 2026. 6. 30. 16:30

    여기까지 보면 혁신이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낸 아름다운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25년에 국세청의 홈택스가 종합소득세 환급 서비스를 무료로 출시하며 삼쩜삼의 유료 서비스는 설 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불과 5년 만에 세무 분야 전문가의 업무에서 민간 기업의 저렴한 SaaS 서비스를 거쳐 공적 기관의 무료 서비스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사업소득, 종합소득세, 환급 등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용어도 일반인의 눈에는 낯설기만 합니다. 이러한 용어와 절차에 대해 손쉽게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비스들이 우리 삶의 다양한 분야에서 속속 개발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큰 교훈은 누군가가 가치를 만들어나간다면, 그리고 그 가치가 큰 규모로 성장한다면 곧 그 자리에 또 다른 이가 도전해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전자가 AI 기반으로 운영의 경비가 현저히 적은 시스템이라면 부가가치는 급속히 와해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두 가지의 전략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시장의 크기를 키우지 않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시스템이 할 수 없는 일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은행의 업무에서 미용실의 예약을 거쳐 식당의 POS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업무들이 체계화와 정보화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러한 시스템들은 지금껏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대행해주던 일들을 사용자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주었습니다. 이제는 정보의 축적과 활용을 위해 개발된 규칙들이 에이전트 시스템과 결합되면서 사용자가 직접 이해하고 입력하던 기존의 방식이 유효하지 않게 됩니다. 직관적인 사용법과 자동화된 처리가 결합된 이 시스템은 지식 기반 대행업을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

     

     

    사업 하나를 외주 작업 하기 위해 필요한 단계는 조직의 규모가 커질수록 계속 분화하기 마련입니다. 시장 조사를 위해 외부 리서치 업체에 보고서를 부탁하는 경우를 상정해보겠습니다. 먼저 리서치 보고서의 범위를 정하기 위해 업무를 정의하고 이에 맞는 예산 할당을 위해 투자 심의를 받습니다. 그다음 업체 선정을 위한 제안요청서를 작성합니다. 제안요청서를 받은 업체들은 제안서를 작성하고 필요 시 제안발표회를 진행합니다. 심사 후 선정 업체에 협상과 계약의 프로세스가 따라옵니다. 업무를 진행하면서 중간 점검, 그리고 진척도에 따른 검수와 중도금 지급의 행정 절차가 필수적입니다. 결과를 수령한 후 보고회를 마치면 다시 검수 절차에 들어갑니다. 검수 후 청구서 수령과 대금 지급까지 한 후에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사내 감사가 추후에도 따라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간단한 업무에도 10여 단계가 내부적으로 일어나고, 그 단계마다 서류 처리와 결재라는 행위가 수반됩니다. 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관리의 지점이 늘어나기 마련이라 협의해야 할 부서도 계속 늘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불합리는 비용을 증가시키고 시간 지연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사내의 업무가 복잡해질수록 합의와 논의를 위해 몇 번이고 내부를 설득하고 서류를 고치는 일을 해야 하니 새로운 기획과 사업을 시도하고자 하는 욕구과 위축됩니다.

     

    최근 생성형 AI가 늘어나며 네 컷 만화를 쉽게 만들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기능을 시험하며 만든 결과를 인터넷에 공유했는데 그중 눈에 띈 것은 공사 현장의 안전 고지 만화였습니다. 현장에서는 보안경을 착용하고 차량 이동 시에는 2미터의 간격을 꼭 지키라는 내용으로, 귀여운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나와서 안전 수칙을 설명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만화를 만든 이가 외국계 기업의 현장 안전 관리자였다는 것입니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만화는 외주 업체가 만들었을 것입니다만, 이제 담당자가 직접 손쉽게 만드는 세상이 온 것입니다.

     

    이제 외주는 사라지고, 시스템과 협력하는 개인이 스스로 일합니다. 이러한 급속한 변화 속에서 남에게 일을 시키기만 하던 사람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경량문명에서는 담당자들이 업무의 중심으로 올라서며,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하는 태도가 모든 직장인의 덕목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경량문명은 기술, 물질, 그리고 전기의 세계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경량문명의 기반은 병렬화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병렬화할 수 없습니다. “아홉 명의 여성이 있어도 한 달 만에 아기를 낳을 수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생명의 탄생을 병렬화할 수는 없기에 산모 아홉 명이 있어도 아이를 더 빨리 낳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시간이 생산의 소중한 자원으로 쓰이는 결과물들은 그 과정을 당길 수도, 당겨서도 안 된다고 사람들은 믿습니다. 그렇다면 자연과 생육의 시간 안에서 탄생하는 것들은 인공지능이 보편화된 시대에도 여전히 그 존재가치가 생생하게 남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시대 인공지능의 가장 큰 장점은 사용의 편의성에서 출발합니다. 처음 접하는 문제이기에 그 문제의 모든 로직과 해결 단계를 세세하게 알지 못하더라도, 묻고 추론하고 해결해나가는 능력이 바로 지능입니다. 자율성을 바탕으로 지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고등의 교육이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문제를 정해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풀어나가는 힘이 고등 지능을 가진 개체의 장점이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에 지능이라는 말이 쓰이려면 무엇보다 문제 해결 능력뿐 아니라 문제 정의 능력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이 분야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노력과 연구가 집중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확률론적 추론은 생성형 인공지능 발명의 토대가 되었지만, 문제를 정의하는 것에는 자연계의 형상과 한계, 그리고 인간계의 구성과 각 인간의 삶의 목적과 방편에 대한 이해까지, 더 복합적 바탕이 필요합니다.

     

     

    (...) 하지만 이제는 개발 언어를 몰라도 대화하며 구현해내는 바이브 코딩과 생성형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유려한 화상과 동영상을 만들어내는 기술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이전틱 시스템을 사용해 일상언어로 포토샵이나 엑셀과 같은 소프트웨어를 구동하는 것도 가능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량문명의 개인은 어떠한 태도와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물론 지금까지 종사하던 일의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내고 경량화를 구상하고 실행하는 능력이 첫 번째일 것입니다. 여기서 간과하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가 축약된다는 것입니다. 피라미드를 만드는 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큰 돌을 손으로 채취하고 몸으로 들어 운반하던 일이 절삭기와 기중기로 바뀐 것뿐입니다. 따라서 같은 규모의 일을 위해 투입되던 인력의 총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할 노력들이 줄어들고 새롭게 정의된다는 것이 다릅니다. 돌을 손으로 깎아내던 석공의 양성은 절삭기의 개발과 함께 산업적으로 수요가 사라집니다. 협동해서 통나무를 괴고 돌을 나르던 시기의 노동요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단계가 줄면 협력하던 사람의 수도 줄어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고민해야 할 것은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넘어, 내가 일의 어떤 단계를 담당하고 있는지입니다.

     

     

    (...) 몇 명이 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다양한 에이전트를 사용할 수 있는지가 그 조직의 역량이 될 것입니다. 상비군을 많이 유지하는 국가가 아니라 많은 동맹의 유기적 연대로 군사적 목적을 완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개인은 어떠한 구체적 능력을 준비해야 할까요? 중량문명의 규모 있는 기업 종사자는 공채와 순환보직을 거쳐 미래의 경영진을 양성하기 위한 선발과 양성 속에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중량문명 시대의 이러한 투자는 한편으로는 개인의 커리어 발전을 위해 조직이 비용을 부담한 것과 같습니다. 금전적 보상과 지위적 보상을 바탕으로 인정받는 개인은 계속해서 더 오래 조직에 머무르는 미래를 꿈꿉니다. 마치 온라인 게임에서 아이템을 파밍해서 스킬을 늘리는 것처럼, 해외지사 근무, 전략팀 근무, 사업부 근무 등 여러 퀘스트를 수행한 시간의 축적으로 역량의 총합이 인식됩니다. 한때는 이렇게 얻은 역량의 풀 스택(full-stack)’이 완비된 경영진의 표상으로 인식됐었습니다. 본사의 조직도 잘 알고 사업 현장도 잘 아는 경험을 거친 과장은 많은 경영진이 탐내는 임원 후보자가 됩니다. 하지만 기업이 발생시키는 부가가치의 원천이 전환되는 경량문명 시대에, 이러한 풀 스택은 근현대 고전 일화 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이제 새로운 문명에서 개인은 풀 스택을 보유하는 것보다 퀵 스택(quick-stack)’의 태도를 갖는 일이 필요해집니다. ‘풀 스택이 오랜 시간에 걸쳐 모든 것을 쌓고 완성형 인간이 되고자 하는 전략이었다면, ‘퀵 스택은 그 대칭점에 있는 개념입니다. 빠른 시간 안에, 문제 해결을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을 습득하고, 성장형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 동료는 꾸준히 발전하더라도 그 기울기는 낮은 선형을 보여줍니다. 그에 비해 AI의 발전 속도는 가히 비약적입니다. 에이전트 시스템은 인간의 습득력보다 빠르게 진화하기에 늘 새로운 역량으로 역할을 다할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가장 적합한 최신의 에이전트를 검증하고 적용하는 역량이 조직 내 인간 구성원들의 일상적 업무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퀵 스택의 역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늘 열려 있는 배움의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반복하지 않고, 가장 첨단의 기술 발전 추세를 숙지해서 적절한 자원을 투자하기 위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인간의 업무로 귀착될 것입니다.

     

    기억하고 숙지하고 적용하는 것이 지금까지 직업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면, 이제 빠르게 잊고 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호기심을 잃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가 새로운 문명의 참여자들이 가져야 할 역량이 됩니다.

     

     

    (...) 자율이 의심받는 것에는 회사 일이기에 그가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어두운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은 하기 싫은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직장을 생계로만 정의하면 이라는 것이 의미를 갖기 어렵게 됩니다. 이러한 사고에서 직장인의 목표는 금전적 보상뿐이고, 월급은 정해져 있으니 효율을 높이려면 일을 최대한 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구성원을 감시하고 독려하며 평가하고 질타해야 한다는 관리방법론이 득세하게 됩니다. 특히 많은 이들이 협업하던 시스템에서는, 누군가 일을 하지 않아도 어쨌든 시간이 가고 결과는 만들어지는 듯한 착시를 느낄 수 있습니다.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 복수의 대안을 구성하는 큰 조직의 시스템에서는 더욱더 개인이 자신의 일을 회피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이것을 왜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내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여러 사람과 위험을 분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것만으로 마치 일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이 늘어날수록 조직에서는 냉소적인 분위기가 퍼져나간다는 것입니다.

     

    경량문명은 적은 수의 구성원이 증강되어 스스로 완결성을 가지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지능화와 투명성으로 무장한 경량문명의 조직에서는 음영이 생길 수 없기에 모든 이들이 스스로의 결과를 공개하고 책임지는 시스템을 구현합니다. 문제의식과 직업의식을 가진 소수가 자발적 의지로 극단의 효율성을 내는 문화로 진화하며 감시와 관리라는 중량문명의 시스템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됩니다. (밑줄은 인용자)

     

    경량문명에서 효과적인 독려의 방법은 자기가 하는 일의 정당성을 느끼게 해서 구성원의 자발적 의지의 발현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새로운 문명에서는 구성원을 억지로 짜내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벅차오르게 하는 조직이 더 큰 성장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벅차오르게 하려면 그 목표가 정당해야 합니다. 한 조직의 재무적 성취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 그리고 인류와 생태를 위하는, 그 결과가 미치는 영향이 당위에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업이 지니는 정당성의 크기가 비례하게 됩니다. 그 정당한 일을 자신이 함으로써 느껴지는 벅차오름이 각자의 일상에 꺼지지 않는 동기로 살아 있게 됩니다.

     

     

    너무 빠른 변화의 낙차는 어지러움을 동반합니다. 각자가 지향했던 삶과 새롭게 적응하는 세상과의 이격에서 느껴지는 멀미가 곳곳에서 관찰됩니다. 입신양명의 꿈은 주경야독이라는 불가능한 고사에서 사당오락이라는 누구나 거쳐야 할, 무엇보다 삶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삶으로 모두를 내몰았습니다. 성장의 기울기가 완만해지는 지금도 그 관성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시대예보: 호명사회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유치원 의대준비반의 출현과 같은 기괴한 열정의 시작 시점을 앞당기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녹고 있는 북극의 빙산처럼 과거의 시스템에서 유효했던 우위의 자리가 줄어들며, 얼마 남지 않은 얼음 위 북극곰과 같이 드라마 <오징어 게임>짝짓기 게임처럼 몇 개 안 남은 자리에 더욱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 확률이 줄어드는 게임의 끝은 대다수가 패배자가 되는 슬픈 결론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다만 바뀐 세상의 어느 곳이 잃어버린 낙원일지 모르기에, 눈을 들어 살피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기억에 의존하고 지나간 성공의 방정식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제 긴밀하게 연결된 세상 속 수고스러움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일상화됩니다. 채혈로 혈당을 측정하던 행위가 패치와 센서로 매분 측정되는 시스템으로 변모하며 야간 당직 의료진의 수고스러움은 경감되는 것과 같습니다. 삶 속 깨알 같은 지능화는 우리에게 수고스러움을 제거하며 시간의 여유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반대로 그렇게 찾아온 여유는 행위 중심으로 보상받던 촘촘한 경제 체제의 네트워크를 이완시키며, 각자 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라는 압력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제 학령기에 배우고 선택한 업에서 숙련으로 보상받던 방식은 유효기간을 다하고, 무언가 또 새로운 것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평생교육으로 배움의 기간이 확장됩니다. 앞으로 공부하라는 말은 청소년이 아니라 오히려 중장년이 더 많이 듣게 될 것입니다. 이때 배움은 공무원 시험이나 자격증 취득을 위해 학원에 다니는 일이 아닌, 평생의 업을 찾아가기 위한 치열한 자기 탐색이 될 것입니다.

     

    인류학자 애나 로웬하웁트 칭(Anna Lowenhaupt Tsing)은 그의 책 세계 끝의 버섯에서 우리 사회가 근대화를 통해 안정적인 임금과 혜택을 제공하는 표준 고용을 제공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이제는 그런 일이 드물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저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정규적인 생계 수단에 의존한다며, “모든 사람이 자본주의에 의존하고 있지만 거의 어느 누구도 이전에 정규직이라 불리던 직업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아이러니라고 지적합니다. 날이 갈수록 직업의 유동성이 커지는 세상에서, 불안정성이 우리 세계의 일상화된 조건일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서늘한 관점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다정하게 사람을 만나고 섬세하게 몸을 쓰는 직업은 AI와 로봇의 시대에도 가치를 잃지 않습니다. ‘공부못하면 쓰는 직업을 한다고 어르며, ‘을 쓰는 직업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던 시대의 불평등한 배려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시절 책상에 앉아 펜을 쓰던 직업만 숭배하던 이들은 AI의 시대에 역풍을 맞게 될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각자의 업이 자신만의 자영업으로 분화되면서 바뀌는 첫 번째의 가장 빠른 변화는 스스로 모든 것을 처리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증강하는 행위입니다. 각자가 사업의 주체인 자영업은 매출을 늘리기 위해 고용을 늘리거나 비용을 계속 증가시키면 순수익이 약화될 확률이 높기에, 사업 주체는 자동화와 지능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고객을 늘리고 비용을 절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80대 고령의 택시 운전사가 전기차를 몰며 카카오 택시 앱으로 손님을 찾고 내비게이션 소프트웨어로 길을 찾은 후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장면이 흔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돈이 관련된 일이라면 인간은 혁신의 수용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소비에 반응하기 위해 기술을 수용하는 것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생산을 위한 기술 수용은 그 경쟁에서 누락되는 경우 생존할 수 없기에 더욱 적극적이고 즉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결국 인간은 돈이 걸리면 모든 노력을 다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경량문명은 소비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닌 생산 중심의 문명입니다.

     

    두 번째 변화는 각자가 자기 노동의 템포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동의 강도와 무관하게 정해진 월급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한 만큼 받는 자영업의 세계는 냉엄합니다. 근로자에게 야근과 잔업이라는 추가 노동의 압력은 삶의 균형과 노동권의 훼손이라는 사회적 비난에 직면하지만, 자신이 스스로의 고용주가 된 이에게 한가로운 휴일은 수입의 감소와 직결됩니다. 사회적 약속인 52시간제는 지속 가능한 풍요로운 삶의 전제로 합의되었습니다. 이후 주 4.5, 혹은 4일제가 논의될 정도로 근로시간은 줄어드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영업의 시간만큼 보상받는 자영업의 시계는 사회적 합의 무관하게 멈추지 않습니다. (...)

     

    세 번째의 변화는 새로운 외로움이 사회에 상수처럼 자리 잡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조직의 동료는 미우나 고우나 함께 일상을 보내는 친구와 가족 사이 어딘가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때로는 야속하고 미워도 공동의 목표로 함께 생활하는 사이는 전우애가 싹틉니다. 안부를 묻고 식사를 챙기고 수다로 스트레스를 풀며 일하는 관계는 무엇보다 지루함과 외로움이 싹틀 시간을 제거합니다. 직장인의 희망은 휴일이고 꿈은 로또에 당첨된 후 퇴사라는 농담이 있지만, 어딘가에 매일 가서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은 사회적 동물이라 불리는 인간에게는 어쩌면 축복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유치원에, 그리고 노인들은 주간보호센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누군가와 매일 만나고 상호작용하는 것은 고독감과 우울감을 물리치는 필수적인 자극입니다. 새로운 문명에서 조직이 분화되며 모둠이 작아지고, 개인까지 쪼개질 때 우리는 새로운 외로움의 급격한 확산에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유튜브와 넷플릭스, 독서와 음악 감상만으로 외로움을 견딜 수 없음을 실감하는 이들은 새로운 결속을 시도해나갈 것입니다. 어쩌면 경량문명의 가장 유망한 산업은 외로움을 돕는 산업이 아닐까 합니다.

     

    모두가 자영업으로 이루어졌던 산업혁명 이전의 개인들은 근대화와 함께 거대한 조직으로 귀속되었습니다. 그 후 글로벌 시장까지 영업을 확대한 거대한 기업들의 성장은 더 큰 규모의 고용으로 이어져 조직의 위세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확장된 조직의 크기만큼 늘어난 수많은 사람이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규칙과 지원이 세밀해지게 마련입니다. 컴퓨터를 고치는 일에도, 상품을 개발하는 일에도, 고객을 찾거나 사후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에도 분업의 체계가 빈틈없이 준비되며 개인은 물 샐 틈 없는 지원 위에 자기 일을 위치시키게 되었습니다. 매끄러운 일 처리로 업무의 누수를 막고, 구성원이 바뀌어도 문제없이 처리하는 이러한 대규모의 시스템은 거꾸로 개인들을 전체를 바라보기 어려운 근시안의 식견으로 몰아갑니다. 무엇보다 조직의 지원 시스템 도움 없이 원활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잘하기 위해 조직이 많은 것을 준비할수록, 그 안의 각자는 어떤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분업의 장점이 개인에게는 관점의 제한으로 다가옵니다

     

    공장의 직공이 아니라 스스로 공장장의 역할로 증강되어야 하는 새로운 문명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가장 큰 고민은 그 새로운 공장의 모습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에 그 역할이 무엇일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량문명은 개인이 증강되는 호명사회의 인자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문명입니다. 그 안에서의 협업의 대상자로 선택받기 위해 스스로를 갈고닦는 세련된 자영업의 개인들이 출현합니다. 그들은 전체를 바라보고 자신의 쓸모를 현행화하는 작업을 꾸준히 하는 부지런한 완전체로 성장할 것입니다.

     

     

    매우 한정된 사람들만 선발하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자격이 주어지는 직업이 아닌 다음에야, 그리고 수련의 과정이 힘들고 길어서 끝까지 마친 사람이 드문 직업이 아닌 다음에야, 혹은 그 직업의 업무가 너무나 힘들어 체력과 담력이 초인적이어야 하는 직업이 아닌 다음에야, 직업의 안정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논리적 사고와 추론의 능력을 갖추고 특정 분야에서 산업의 경험과 지식으로 무장한 산업은 그래도 물리적 자동화의 파고에서도 살아남아 왔습니다. 지식 산업이라 불리던 이 분야 역시 자동화의 범주에 빠르게 포함되기 시작했습니다. 판례를 살펴보고 법조문을 작성해주는 업무나 복잡한 금융상품의 설계와 적용의 시뮬레이션을 수행하는 업무, 심지어 그럴듯한 시나리오나 카툰을 만들어내는 업무에 이르기까지, 지적 노동에 해당하는 분야 역시 속속 AI 도입 효과가 입증되기 시작하며 사람들은 장기 교육의 투자 대비 효과에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들은 곧 자신과 자녀의 진로에 대해 혼란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장에 공급되는 참여자의 수를 제한하여 직업의 위계를 만들어온 권위주의는 빠르게 해체되고, 기술의 혁신으로 와해되는 직업에서 밀려난 이들의 전직을 도우려 다시 다른 직업에 인력 공급을 늘리는 도미노 현상은 모든 직업을 불안하게 하는 연쇄작용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현상이 궁극적으로 인류의 수고로움을 줄여줄 것이라는 점입니다. 소와 쟁기로 천천히 갈아내던 예전 농부의 목가적 삶은, 바라보는 이에게는 평온함을 주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고역이었습니다. 높은 해와 마른 땅에서의 지열을 묵묵히 견디며, 소도 농부도 이 생의 각박함을 벗고 싶었을 것입니다. 트랙터와 드론으로 무장한 미국 농부들은 고소득 자본가로 성장할 만큼 예전 농사의 질곡을 넘어서 혁신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불과 100년 만에 이룬 이 성장의 과실은 풍요로운 먹거리와 높은 소득으로 농부와 인류에게 혜택을 주었지만 그 사이 자본화에 실패한 소농들은 노동자로, 혹은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환기의 아픔은 특정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인생의 비극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한국의 1997년 외환 위기에 구조조정의 아픔을 겪은 이들이 그 이후 새로운 기회를 얻지 못해 삶 자체가 흔들려 재기에 실패한 이야기들은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가족 해체의 원인으로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 당시 외환 위기가 아시아 몇 개국에 한정된 문제였다면 지금의 동인은 전 세계적인 시장 둔화와 인류사회의 큰 발견으로 야기된 기술 혁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단순히 한 지역에 그치지 않은, 지능을 기반으로 이 행성을 지배하온 종의 가장 우수한 특성을 모사하고 때로는 능가할 듯한 능력의 출현은 품앗이처럼 서로 돕던 현생 인류에게 협업의 방식을 송두리째 재고하도록 강권하고 있습니다.

     

     

    (...) 이 세 가지를 기반으로 한 규칙이 만들어지는 사회에서 각자는 어떤 태도를 가지게 될 것인가 이해해봅니다.

     

    먼저 지금 만나는사회 속, 배제되지 않기 위해 각자는 미리 준비할 것입니다. 이제 뜨는 산업의 경험과 역량을 급하게 준비하는 것은, 공부하지 않고 시험을 보는 것처럼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의 호오를 기반으로 이미 축적된 역량이 그의 고유한 경쟁력으로 산정되는 사회가 옵니다.

     

    다음으로 잠시 만나는사회에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협업의 시간 내내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매번 타자 한 명이 공격하는 야구에서는 더그아웃의 선수들이 음료수를 마시기도, 동료를 응원하기도 하며 자신의 차례 전에 휴식을 취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스템에서는 동시에 아홉 명의 타자가 각자에게 뿌려진 공을 쳐내는 상시 집중의 모드를 맞이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만나는사회에서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다시 반가운 얼굴로 만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한 자발적 협업의 상태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지속되지 않고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에게 쿨한안녕을 고하며 다른 기회를 빠르게 찾아가는 새로운 규칙이 일상화될 것입니다.

     

    경량문명의 그라운드 룰에 기반한 우리의 자세

    우리는 지금 만납니다, 준비가 되신 분만.
    우리는 잠시 만납니다, 전력을 다할 분만.
    우리는 다시 만납니다, 마음이 맞는 분만.

     

    결국 경량문명은 각자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협업 파트너를 정하는 문명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지연, 혈연, 학연과 주어진 관계에 좌우되지 않는, 동적인 협력 시스템이 경량문명인 것입니다.

     

     

    문명의 경계가 지리적 구분이 아닌 시간 축으로 나뉘는 지금의 변화는 인류사에 유례가 없는 방식입니다. 산업혁명의 경험 역시 과학 혁신의 인프라와 지식재산권의 보상체계가 확보된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 시작되었듯, 지역과 시간으로 나뉜 혁신의 비동시성은 지금껏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전 세계가 긴밀한 연결로 이어지며 개발도상국의 갑남을녀들도 스마트폰으로 증강된 지금은, 그 혁신의 선명한 나눔이 전 지구의 모든 인류에게 공평하고도 쓰라리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먼저 태어난 이가 더욱 시급하게 현행화의 부트캠프에 참여해야 합니다. 뮤지션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The Alan Parsons Project)1982<올드 앤드 와이즈(Old and wise)>라는 제목의 노래를 발표했습니다. 나이가 들며 현명해지는 자신에 대한 발견을 담은 노래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경력을 이미 많이 쌓았을수록 노래 속 가사와는 정반대로 나이가 든 사람부터 더 시급히 새로운 기준을 습득하기 위한 교육을 받아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교육의 교사는 AI 시대에 태어난 AI 네이티브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이전 문명의 사람들에게 친절히 가르쳐줄 동기와 아량이 있기를 희망해야 할 것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는 한 세계가 기울고, 또 다른 세계가 태어나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무너져가는 탑을 지키려는 노인과,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소년 마히토의 대비입니다. 마침내 노인은 소년의 선택을 믿고, 오래된 질서의 붕괴를 받아들입니다. 기존 구조를 계속 붙잡기보다, 새로운 발판을 스스로 만드는 용기, 경량문명의 시작은 바로 이 선택에서 출발합니다.

     

    경량은 단순히 무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치 체계의 재구성이고, 관계 방식의 혁신입니다. 무엇보다, 지속 가능성을 향한 설계입니다. 더 적게 소유하고도 더 넓게 연결되는 삶, 덜 복잡하지만 더 깊이 있는 질서, 무엇보다 서로에게 덜 바라며 더 위하는 자세, 이것이 경량문명의 언어입니다.

     

    사람이 만든 기술이 구조를 가볍게 만들고, 사람의 지혜는 의미를 더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무거운 세계의 질곡을 넘어 더 가벼운 문명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 장시간의 비행에 담배를 쉬지 않고 피우는 사람들의 연기로 비행기 안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때와 비교하면 쾌적함의 정도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지금 기내의 세련된 디자인과 청결한 환경은 예전 담배 연기로 찌든 시트와 극명히 대비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행의 모든 환경이 좋아지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보다 운항 시스템이 첨단화되지 않았을 터이지만 그 시절 비행은 흔들림이 적었습니다. 이제는 안내등이 점등되지 않아도 상시 안전벨트를 매야 할 만큼 터뷸런스가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갑자기 기체가 급강하해 다치는 사람들이 속출할 만큼, 기후변화는 비행의 환경을 바꿔놓았습니다. 여정의 쾌적함을 얻고 비행의 위태로움도 얻은 이 상황은 지금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공지능, 초연결, 초협력의 클라우드, 이 모든 것은 우리 삶의 변화를 추동합니다. 급격한 변화로 급락과 급상승이 일상화되는 삶은, 일상을 풍요롭게 해주는 동시에 우리의 직업을 흔들고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그리고 자존을 위해 또 어떤 기여를 사회를 돌려줄 것인가 늘 고민해야 하는 삶은 적응의 멀미를 상시화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