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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대남의 몰락 (공정한 경쟁과 담담한 수행)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6. 6. 20. 13:57

    지방에 있는 고등학교에 강연하러 갔을 때, 교원들을 상대로 강연한 뒤에 고등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20명의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과 이런저런 주제로 얘기를 많이 했다. 참가해 준 20명 가운데 18명이 여자였다. '결혼을 하는 게 나을까요', '천직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AI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요' 등등 재밌는 질문이 이어졌기에, 금세 신이 나 침을 튀기며 이야기했다.

     

    좀 놀랐는데,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학생은 하나같이 여학생이었다는 점이다. 학교 선생님한테 여쭤보니, 남녀 학생 성비는 4대 6이란다. 그러나 성적이 우수한 상위권은 여학생이 독점하고 있고, 학생회장도 여학생, 동아리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축도 대체로 여학생이라고 했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 필자가 이사로 있는 의료 관련 대학 이사회 자리에서 장학금 수여 대상 학생 목록을 서로 나눠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 물론 수여 자격은 성적순이 당연하다만, 여느 학부든 성적 상위권은 죄다 여학생이었다. 보건의료 간판을 내세운 대학이니만큼 학부를 막론하고 여자 비율이 높다곤 해도, 수여 대상의 85%가 여자이고 보면 놀랍다.

     

    필자가 주재하고 있는 도장인 가이후칸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활동의 모체가 고베여학원대학 아이키도부이므로, 아이키도의 고단자로서 오래 수련하고 있는 여학원의 OG가 많은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 이후에 입문한 사람들도 6:4의 비율로 여자가 많다. 그 외에도, 가이후칸에는 여러가지 '동아리'가 있는데, 봉술부, 신카게류, 거합 발도술 연구회, 승마부, 폭포수행부 등등 수행과 관련된 동아리는 창설이나 운영 모두 거의 여성 문인의 몫이다. 어느날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수련하는 사람들이 여자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광경도 그리 드물지만은 않다.

     

    가면극 노가쿠의 세계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노가쿠의 관람석에 가보면 알 수 있다. 관객의 대부분의 여성이다. 직접 연습하는 경우도 압도적으로 여성이 많다. 뜻밖에도, '수험도' 역시 그렇다. 이전에 하네구로 산의 선방을 찾아 젊은 수행자들과 곧잘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어느 시기부터는 산 속 수련자들 가운데 여성이 참가하는 비중이 과반을 점하기에 이르렀다. 여성들이 현대 '수험도'의 명맥을 잇고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일본인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일본의 다종다양한 영역에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왠지 여성들이 오늘날의 사회를 보고서,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즉 흐름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일본인의 온갖 활동이 '본래의 길'에서 일탈해 있다고 느낀 여성들이, 남자들이 사라져 텅 비어버린 '일본의 정통 보수' 측에 서려 하고 있다.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며칠 전, 일본 굴지의 모 대기업 분이 찾아와서, 직원 교육에 대한 의견을 들으러 왔다. 40~50대 임직원들에게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자' 하는 동기가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 정형적인 실무는 해내어 월급대로 일은 하고 있지만, 보아하니 조금도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퇴직하고 나서는 삶의 보람을 찾지 못하고서 팍 늙어버리는 게 아닐까 염려스럽다는 이야기였다. 어찌하면 좋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말인 즉 남자들은 줄곧 '경쟁'을 해 왔으며, 이에 따라 '수행'이라는 또다른 삶의 방식이 있음을 모를 법하다고 답변드렸다.

     

    사는 법에는 '경쟁'과 '수행' 두 가지가 있다. 일본인은 아이들을 어렸을 적부터 경쟁시키고 있다. 같은 학령 집단 안에서, 상대적 우열을 다투게 하여, 평점을 내리고, 등수를 매겨서, 점수가 높은 학생에게는 포상을 주고, 점수가 낮은 학생에게는 처벌을 준다. 그러한 규칙으로 경쟁시키면, 학생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려 한다. 따라서, 학생들의 잠재적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경쟁시키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분명히 가열찬 경쟁에 던져진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이에 따라 폭발적으로 잠재능력이 실현되는 아이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쟁을 수십 년 넘게 이어갈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은 생각보다 강인하지 않다. 어느 순간 다리에 맥이 풀린다. 패배한 인간은 '어차피 나 같은 새끼는...' 하고 부정적인 자기평가에 매이고, 이긴 인간은 '나니깐 이겼다' 하고 긍정적인 자기평가에 매여서, 어떤 경우든 변화하기를 그만두고 만다.

     

    일본 사회는 과거 약 30년 간 '경쟁시키고, 평점을 부여하고, 등수를 바탕으로 자원을 차등분배하는' 사회구조가 가장 공정하고도 효율적이라는 강력한 신념 아래 모든 제도를 설계해 왔다. 그 결과가 오늘날 일본의 모습이다. 왕년에 '재팬 애즈 넘버 원'이라고 불렸던 아련한 추억도 이제는 전혀 생경하다. 이쯤 되면 슬슬 알아먹을 때다.

     

    오직 경쟁만이 인간을 성장시킨다는 신념이 틀렸다는 얘기다.

     

    동아시아에서는 오랫동안 인간의 성장 프로세스가 '수행'이라는 형식으로 행해졌다. 스승이나 선진 아래 들어가, 그 가르침을 받아, 배우고, 기예를 터득한다. 누구와도 상대적인 우열을 다투지 않는다. 그저, 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결같이 '도'를 걷는다. 비교할 대상이 굳이 있다면 그것은 경쟁 상대가 아니라, '어제의 자기 자신'이다. 자신이 어제 이래 몇 걸음 '도'를 저만치 나아갔는가, 그것만이 문제시된다. 아무와도 승패 강약 ・낫고 못함 ・늦고 빠름을 다투지 않는다.

     

    필자 자신은 25세 때에 아이키도를 하시는 다다 히로시 선생의 제자가 된 이래, 50년 동안 '수행자'로 살아왔다. 무도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프랑스 문학과 철학 연구자로서, 대학 교원으로서, 작가로서, 필자는 경쟁을 한 적이 없다. 논쟁도 하지 않았으며, 다른 이와 자신이 가진 지식의 많고 적음, 혹은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빗대보지도 않았다. 필자는 그저 제자로서, 스승의 가르침 (무도 분야는 다다 선생, 철학 분야는 에마뉘엘 레비나스 선생) 을 세상에 전하는 일에만 전념해왔다. 스승의 가르침을 전도하고 조술하며 살아왔다.

     

    수행자로서 산다는 것은, 막 출가를 해야한다든가 속세를 벗어나야 하는 게 아니다. 필자는 지난 50년 간 속세에 살며, 생업에 종사해 왔다. 마음가짐만이 '경쟁자'가 아닌 '수행자'였을 따름이다.

     

    필자를 찾아온 회사원 측에는 '경쟁 말고 수행이라는 삶도 있다는 점을 동료들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전해드렸다. 그리고, 여성들이 수행으로의 전환을 훨씬 이른 시기부터 시작했다는 점도 가르쳐 드렸다.

     

    (농업협동조합신문 6월 15일호)

     

    (2026-06-17 09:07)

     

     

    글쓴이: 우치다 타츠루 (원문)


    오길비의 솔직한 생각

    이번 선생님의 말씀을 듣자하니, 이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다 하는 그런 해갈의 느낌도 들면서, 과연 그걸로 충분할까, 하는 의심도 드는 게 사실입니다. 아니면 여전히 세상은 역시 무시무시하다, 모든 것은 내 잘못이었다, 하고 벌벌 떨게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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