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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로드 르블랑 씨에게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6. 4. 25. 08:16

    ZOOM JAPON이라는 프랑스어로 된 문화연구지의 편집장을 하고 있는 클로드 르블랑 씨가 이곳을 그만두게 되었다. 필자는 한번 긴 인터뷰에 응한 적이 있었다. 송별의 말을 부탁받았기에, 일필휘지했다.

     

     

    나는 '동아시아적'인 작가인 듯하다.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는 나름의 독자 수를 가지고 있다. 한국어로는 57권의 저작이 번역되었다. 중국에서도 상당한 수의 역서가 나와있고, 한 책은 '중국공산당 간부 위원 추천도서'로 선정되었다. 태국어로도 조만간 처음 역서가 나온다. 하지만, 서구권의 번역본은 한 권도 없다.

     

    딱 한 번 독일의 잡지에서 농업에 대한 짧은 논문이 번역된 적이 있다. 그것을 포함해 과거 20년 동안 필자가 있는 곳에 취재하러 온 서양어 매체는 전부 세 개이다. 하나는 스위스의 라디오 방송국인데, 거기서 일본의 종교에 대해 인터뷰했다 (샤쿠 뎃슈 선생하고 인터뷰에 응했다). 다른 하나가 ZOOM JAPON이다.

     

    서양어 미디어에 전혀 주목받지 못하는 작가를 위해 커버 스토리를 제공해준 것은 ZOOM JAPON이 유일한 미디어다. 따라서, 프랑스어 화자를 위해 상당히 긴 쪽을 할애해 준 편집장 클로드 르블랑 씨에게는 깊이 감사를 드린다.

     

    르블랑 씨가 내게 주목해 준 이유와, 서양어권 미디어가 나를 무시하는 이유는 아마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의 사고방식이 '동아시아적'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은 대학원에서 프랑스 문학 연구의 아카데믹한 훈련을 받은 연구자임으로, 추론의 방식이나, 쓰는 방식은 웬만큼 '프랑스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쓰는 방식이 아무리 '프랑스어적'이어도, 제시된 아이디어가 '동아시아적'이어서는 프랑스어 화자 입장에서 아무래도 '리더블'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어떤 점에서 리더블하지 않은지, 스스로도 흥미가 있다. 필자가 서양어 화자들한테 '읽기 어려운' 작가인 이유는 왜인가.

     

    이유의 첫번째로 필자가 무도의 수행자로서 '초월적인 것'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천황제의 정치적 효과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 종교성이 가진 본질은 '신불 습합'이라는 말에서 전형적으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애니미즘적이다. 자연 숭배와 조상 신앙이 기초에 있다. 일본인은 산악, 해양, 하천, 삼림 그 모든 곳에서 어렴풋이 영적인 외포를 느낀다. 나는 '다키교'라는 '수험도'의 수행에 친숙한데, 이 행법은 돌 틈 사이로 흐르는 물 가운데 일종의 '신성'이 느껴지는 감수성이 없으면 행하는 의미가 없다)그 감수성이 없으면, 그저 '물 뒤집어쓰기'가 된다.)

     

    필자는 자신의 도장에서 매일 아침 '오츠토메'를 행하는데, 그것은 축사를 읊고, 반야심경을 읊고, 부동명왕의 진언을 읊고, 구자 신호를 긋는 등의 '다 섞어버리기' 적인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혼효는, 서구의 유대-그리스도교적인 영적 감수성 관점에서 봤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잡하고, 미개한 종교성'으로 비칠지 모른다. 종교학의 현장연구자가 아니고서야, 종교적으로 미개한 인간이 쓴 것을 읽고 싶지는 않을 것이리라.

     

     

    천황제도 또한 서구적 지성에서 봤을 때는 '미개문화'로 보일 것이다. 이 긴 전통을 가진 정치적 의제(擬制; 가상적인 것 - 옮긴이)는 '세속권력'과 '영적, 도덕적, 문화적 권력'을 다른 세계로 나누는 '양원제도적'인 아이디어에 바탕을 두고 있다. 파워 폴리틱스의 본질은 '적을 이기는' 것이지만, 천황제의 본질은 '일시동인(一視同仁)'이다. 극언하면, 천황제의 본질은 '조정'이다.국내의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포섭하되, 현안의 시비를 명백히 가리지 않고 둔다.

     

    일본 사회에는, 현안의 시비를 밝히지 않은 채, 사건의 논리를 어수선히 해버리는 정치적 장치 비슷한 게 존재한다. 존재할 뿐만 아니라 활발하게 기능하고 있다. 이 역시 서구적 지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법사회학자 가와시마 다케요시가 쓴 『일본인의 법의식』(이와나미 서점, 1967)이라는 일본인론의 명저가 있다. 가와시마는 천황제를 직접 언급하지는 앟으나, 일본 정치문화의 눈에 띄는 특징이 '조정'에 있다고 지적한다.

     

    '조정'이란 이해가 상반되는 입장의 쌍방이 '얼굴을 맞대고' 타협을 도모하는 것이다. 즉 결과적으로는 당사자 쌍방이 같은 정도로 불만인 해결점을 찾아내는 기술이다. 일본 사회에서는 이 조정기술에 능한 인간을 '어른'으로 간주하고 있다.

     

    일본의 '야쿠자 영화'에는, 조정자가 항상 압도적인 관록을 가진 '장자'이며, 대립하고 있는 야쿠자들은 '이 싸움, 나에게 맡겨주지 않겠나'하는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다. 조정을 단념하는 것은, 그 업계에서 추방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이러한 '조정'을 중시하는 정치문화가 서구 사회에는 없다. 이는 '없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대부>(1972년)에서 은퇴한 비토 콜레오네(말론 브란도)가 대를 이을 아들 마이클(알 파치노)에게 갱 정치학의 요체를 전하는 장면이 있다. 비토는 단호히 "조정을 권하는 자, 그가 바로 배신자다"라는 지혜를 아들에게 전한다. <갱스 오브 뉴욕>(2002년)은 아카데미 상 10부문 노미네이트되고, 마틴 스코세이지에게 골든글로브 감독상을 가져다준 작품인데, 두 갱단이 2세대에 거쳐 오로지 서로 죽일 뿐인 이 영화에는 한 명의 조정역이 없다. '각자 같은 정도의 불만을 품을 정도까지 타협하여, 평화적으로 구역을 분할하지 않을 텐가' 하는 제안을 하는 인간은 없는 것이다. '무관용'이다.

     

    나 자신은 명백히 '조정형' 인간이다. 원리적으로 올바른 것을 한결같이 주장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의 의견은 갖고 있으나, 그것을 타자에게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는다. '알아주길 바란다'고, 옷깃을 붙잡고 간청은 하지만, 그 이상은 하지 않는다. 상대를 논파하는 것보다도, 그 사람과의 '공생'할 수 있는 니치(틈새)를 찾는다. 이는 아마 서구적인 지성이 거의 흥미를 표하지 않는 작업일 것이다.

     

     

    내 얘기만 많이 했다만, 르블랑 씨는 나에게 흥미를 갖준 예외적인 프랑스인이다(긴 인생에서, 내 머릿속에 흥미를 가져준 프랑스인은 르블랑 씨가 두 번째다). 이것은 희유한 일이다.

     

    르블랑 씨는 야마다 요지 감독에 대한 긴 평전을 썼는데, 그 가운데 야마다 요지가 '체제적인 인간이다'라는 부정적 평가에 대해, '그는 다른 영화인같이 충돌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교묘한 방법을 선호했다'(13쪽)이라고 썼다. 그것은 '눈에 띄면서 용서 없는 의견만 폭을 넓혀가던 시대'에 있어서 예외적인 존재 방식이었는데, 그것도 또한 한 가지의 깊은 인간에 대한관점인 것이다라고 했다.

     

    르블랑 씨가 내게 흥미를 가져준 것도, 아마 그것과 비슷한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나 또한 '충돌이라는 방법'을 될 수 있는 한 피하려고 살아왔다. '용서 없는 의견'을 들이미려고 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서구적 지성에서 보면 '애매(flou)'하고 '불선명(vague)'하고 '부정확(imprécis)'한 태도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인간의 지성의 한 가지 존재 방식이라고 르브랑 씨는 해석한 것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예전에 『야생의 사고』에서, 마투그로소에 사는 인디오들의 세계관과 인간관도 또한 고유의 체계성과 인간적 존업이 있다고 강하게 호소했다. 유럽인과 똑같이, 인디오들도 또한 자신들 가운데 '인간생활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의미와 존엄이 응축되어있다고 당당히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 상대적인 우열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며, 하물며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취사선택해, 거기에 '인간성의 모든 게 잠재되어 있다고 믿는 건, 상당한 자기중심주의와 우둔함이 필요하다'고 쓰며, 레비스트로스는 유럽의 자기중심주의에 철퇴를 내렸다.

     

    르블랑 씨의 작업도 아마 그런 류와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생각한다. 르블랑 씨는 야마다 요지 감독과의 사이에서도, 필자와의 사이에서도 비 유럽적인 지성과 감성을 느꼈던 것이다.

     

    필자의 감사의 감정을 받아주기를 바란다.

     

    (2026-03-16 09:02)

     

    글쓴이: 우치다 타츠루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