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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시와 비상시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11. 8. 21:35
매년 11월은 한국 강연 여행을 갔지만, 이번 해는 코로나로 중지되었다. 그 대신 ZOOM에서 한국과 일본을 아울러, 항상 통역을 해 주시는 박동섭 선생에게 MC와 통역을 맡기고 한일 청중 대상으로 11월 2일과 3일에 '포스트 코로나 사회' 에 대해 90분 동안 강연했다.
3일 강연에서는 '평시와 비상시' 에 대해 이야기했다. 잊지 않기 위해 어떤 것을 말했는지 기록해 둔다.
청중들로부터 사전에 받은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시민이 향유하고 있는 자유와 감염증 대책 사이와 관련해, 자유의 제한이라는 모순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평소에 자신은 리버럴하다는 사람이 정부나 지사가 요청하는 행동 지침에 따르는 것은 이상하다는 의견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미지의 바이러스에 관한 공포를 이용하는 강권적인 정치가 행해질 리스크가 있겠습니까?'
한일 어느 나라나 시민이 품고 있는 불안은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제 대답은 아래와 같은 것입니다. 평시와 비상시에는 판단 기준이 서로 바뀝니다. 평시에는 행동 제한을 거부하는 시민이, 비상시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만, 받아들이는 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평시의 판단 기준을 비상시에도 갖고 있는 것을 '정상성 편향bias' 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신상에 있어서 불이익을 가져올 정보를 무시한다든가, 리스크를 과소평가하는 심적 경향이 그것입니다. 특히 자연 재해나 재난의 경우에 피난이 늦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한국의 세월호 사건 때는 여객선*이 가라앉기 시작할 때조차, 처음에 나온 '선실에 가만히 있으라' 는 지시를 그대로 받아들여 피난행동을 취하지 않은 고등학생 300명이 익사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 때도 오오카와 초등학교에서 하교 준비 중에 지진이 일어나 아동들은 교정으로 피난했습니다. 일부 아동은 교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자주적으로 피난행동을 취해 살아남았지만, 평소대로 교사의 지시에 따라 제일적인 행동을 취한 아동 74명은 익사했습니다. 온다케 산 분화 때도, 피난행동을 취하지 않고 분화구 근처에 머무르며 휴대전화로 분화 모습을 찍던 사람들이 몇 명이나 사망했습니다.ー
(* 세월호의 원래 이름은 '페리 나미노우에' - 옮긴이)
어느 쪽도 비상시를 맞아 '평소대로' 행동한 사람들이 치사적인 리스크를 무릅쓴 것입니다. 평시에서 비상시로 '스위치 전환'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가능한 리스크를 항상 과대평가하는 경우 생활상의 부자연스러운 요소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파란불에도 차를 멈추고 좌우확인을 한다든가, 지하철 승강장에서는 벽에 붙어 추락을 피한다든가, 정전에 겁을 먹고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든가 하면 일상 생활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타성적으로 '비상사태라는 것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확실히 그것이 사실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확대 국면에서도, '자신은 감염되지 않는다. 감염되어도 경증으로 끝난다. 타인에게 옮는 일은 없다' 는 식으로 생각하는 정상성 편향이 작동합니다. 반드시 작동합니다. 그렇지만, 비상시라는 것은 정상성 편향이 가져올 리스크가 극적으로 높아지는 사태인 것입니다.
문제는 '정상성 편향을 해제한다' 는 마음가짐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을 '쓸데없이 놀란다' '과잉 불안이다' 는 식으로 해석하면, 정상성 편향의 해제는 곤란해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볼품 없는' 모습일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힘을 키우는' 행동거지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포나 불안에 사로잡혀 발버둥치는 인간과, 비상시에도 여느때처럼 침착하게 있을 수 있는 인간 중 어느 쪽이 '위기적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를 생각해보면, 누구나 후자를 택합니다.
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1962) 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상 최악의 전장이 된 오마하 해변에서 독일군의 기관총 소사를 받는 가운데 궐련을 피우며 해안가를 걷는 노먼 코타 준장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그의 침착하고도 적절한 지시에 의해 연합군 병사는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는 어떻게 보아도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는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정상성 편향' 에 고착되어 그리 한 것이 아닙니다. 산전 수전 다 겪은 군인으로서 곧장 '비상시' 로 스위치를 전환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만을 기초해 상황을 판단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절도를 갖는 것입니다.
정상성 편향의 해소란 갑작스레 놀라는 것이 아닌, 자신이 보고 있는 것만으로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판단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객관성•일반성을 과대평가하지 않고, 복수의 시점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종합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입체시하는 것입니다.
'주관적 바람을 갖고 객관적 정세 판단에 임한다' 는 것이 정상성 편향의 실태입니다. 주관을 일단 '괄호 안에 넣고', 복수의 시점에서 대상을 관찰하는 지적 태도를 '정상성 편향의 해소' 라고 부릅니다. 후설이 '에포케(현상학적 판단 정지)' 라고 부른, 참으로 그런 지적 태도인 것입니다.
제가 보아온 '코로나 마초' 들 (마스크 착용, 사회적 거리두기, 빈번한 손 씻기, 외출자제 등의 행위를 '과잉 불안' 이라고 조롱한다든가 질책하는 사람들) 의 공통점은 '내 주위에는 사망자도, 중증 환자도 없다' 라는 것에서 추론을 시작한 데에 있었습니다. '내 주위' 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갖고 이를 당분간의 '객관적 사실' 로 간주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 들은 것을 가볍게 믿지 않는 점에서는 현실주의적이기도 하며 성숙한 어른의 태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정상성 편향' 의 한 가지 모습입니다.
정상성 편향은 '비상 사태라는 것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는 개연성에 대한 판단으로서는 적절하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감각이나 지견의 객관성을 과대평가하는 점에서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소부터 사물과 현상을 겹눈적으로 파악하는 지적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인지한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도 특수한 일이고, 그로부터 나온 추론은 일반성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지적 절도를 가진 사람은, 말하자면 일상적으로 정상성 편향의 장착과 해제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비상시가 되어도 '놀라는' 일이 없습니다.
비상시라는 것은 '자신 이외의 시점으로부터의 정보 취합을 일거에 증대하지 않는 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는 상황' 입니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자신 이외의 시점으로부터 정보를 취합하는'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것은 '스위치 전환' 이라기보다는 '눈금을 조금 오른쪽으로 돌리는' 정도의 동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점 전환에 대해 그 정도로 격한 심리적 저항을 느끼는 일이 없습니다. 일상적으로 '타자의 시점' 에서 눈 앞의 현실을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인간이 가장 비상시 대응에 적합하다는 것이 됩니다.
이상과 같은 지견을 밟아나가다 보니,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시민에 대한 정부의 행동 지침 지시가 가능한 조건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정부가 일개 시민보다 더욱 겹눈적으로 사태를 파악한 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시민이 믿게 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정부는 어떠한 꿍꿍이셈도, 어떠한 당파성도, 어떠한 편견도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는 것을 시민이 믿게끔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 와중에 시민적 자유에 대해 강한 규제를 행할 수 있었던 나라는, 정부가 '전 국민의 건강을 동등하게 배려하고 있다' 는 것을 시민들이 일단 믿은 나라입니다. 반대로, 강한 규제를 할 수 없었던 나라는 시민들이 정부의 공평성, 공공성을 충분히 믿지 않고, 시민적 자유의 규제가 정권이나 그 지지자만을 위한 이익을 가져다 줄 뿐, 일반 시민에게는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정부가 불식시키지 못했던 나라였다는 얘기입니다.
일본은 후자입니다.
비상시에 있어서 '긴급사태이므로 정부에 전권을 맡기자' 라는 생각을 시민에게 갖게 하기 위해서는, 평시부터 '정부는 공공의 복지를 위해 행동하고 있으며, 전 국민의 이해를 지지자•반대자 상관 없이 동등하게 배려하고 있다' 라고 시민들에게 느끼게 하는 것이 필수조건입니다.
평시에 있어서 네포티즘(연고주의 -옮긴이)적인 정치를 행해 온 정부가, 비상시만큼은 정상성 편향을 해제하고, 전 국민을 동등히 배려하게 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2020-11-04 07:59)
저자 약력
우치다 다쓰루
1950년생. 사상가, 무도가.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11/04_0759.html'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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