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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과 시간에 대해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11. 8. 11:50
오사카 시를 폐지하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주민투표가 가까워져 왔다(2020년 11월 1일 시행된 결과 부결됨 -옮긴이). 논의의 대부분이 ‘비용’ 을 둘러싸고 있다. 하지만, 시스템 개혁에 있어서 경제적 합리성만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에 대해 고찰한 부분을 <일본습합론> 에서 인용한다.
오늘날의 일본과 내가 어렸을 적의 일본을 비교했을 때 가장 달라진 점은 여러 가지 일에 대한 가치, 혹은 언동의 적절함을 고려할 때에 있어서의 시간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방식을 선택한 경우, 그것이 적절했는지를 ‘언제’의 시점에서 판단할 수 있는가. 그 사리판단까지의 시간차는 역사적 환경에 의해 대단히 변화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 시간 의식이 줄어들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사물과 현상에 대한 옳고 그름이나 적절함의 여부를 판정할 때까지의 시간차가 심상치 않게 짧아졌습니다. 기껏 1년 혹은 4사분기, 경우에 따라서는 더욱 짧기도 합니다. 그걸로 결정이 나버립니다. 어떤 정책 결정을 내릴 경우에 그것이 적절한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몇 주 정도만으로 알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수개월, 수년, 경우에 따라서는 수십 년 걸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그런 긴 앞날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을 멈춰버리고 말았습니다. 5년 후 정도 되는 미래에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에 대해 아무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5년 전에 선택한 정책이 적절했는지 아닌지도, 음미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작금의 일본 사회는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모양새로 돌아가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인간의 질이 변했다기보다는, 과거에 행했던 선택의 적부(適否)에 대해 논하는 습관 그 자체를 잃어버려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끝난 일’ 을 재탕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그것보다 ‘앞으로’ 의 일을 생각하자는 언동이 다양한 장면에서 연출되고 있습니다. 일 주일 전까지만 해도 ‘플랜 A 할 수밖에 없다’ 고 말했던 사람이, 한 달 후에는 ‘플랜 A 따위는 없다’ 고 내뱉어도 누구 하나 그 사람의 식언을 책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런 시대입니다. 애초에 ‘식언’ 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사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약속을 지킨다言葉を守る’ 를 영어로는 keep one's word라고 합니다. ‘킵’ 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지속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의 시간’ 이라고는 해도, 수치적으로 명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대충 이 정도’ 라는 암묵적 승인이 있습니다. 1개월이나 2개월 후를 되짚어 보는 정도로는 ‘약속을 지킨다’ 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약속을 지키는’ 것 자체에 대해 사람들은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 한 달 전에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어?’ 라고 흥분해도, ‘그런 옛날 일은 잊어버렸어’ 라고 콧방귀를 뀌면 끝입니다.
확실히, 그것이 현실입니다. 1개월 전이라는 것은 ‘아주 옛날’ 입니다. 지금 주식 거래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가 하고 있습니다. 알고리즘이 1000분의 1초 단위로 금융 상품을 사고 팝니다. ‘1개월 전의 주가’ 같은 것은 정보로서 완전히 무가치합니다. 제로입니다. 기업 역시 내일은 어떻게 될지 누구도 모릅니다. 애플,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10년 후에 존속해 있을 지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주식회사의 평균 수명은 5년 정도니까요. 그 이상의 것은 생각해 보았자 별 수가 없습니다. 그런 평균수명 짧은 조직이 ‘100년 후에 그려질 사회 모습’ 이나 ‘100년 후의 종사자가 느끼는 행복’ 같은 것을 생각할 리가 없습니다. 생각해도 무의미하니까 말입니다. 이번 분기 매출이 하락해도, 주가가 떨어져도 그걸로 회사는 ‘자, 이제 끝’ 입니다. 10년 후는 고사하고 내년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기 이익 손실에 100%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당기이익 최우선’ 이라는 주식회사적 시간의식입니다. 그리고, 현대인 거의 대부분이 주식회사적 발상을 뼛속까지 체화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짧은 타임 스팬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 없이는 인간이 집단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자원을 경제학 용어로 ‘사회 간접 자본’ 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자연환경, 사회적 인프라, 그리고 사회적 제도입니다.
자연 환경이라는 것은 산천에 대한 얘기입니다. 공기, 해양, 하천, 호수, 삼림… 그런 것입니다. 그 풍요로운 천혜의 공간 위에 우리들은 사회 제도를 존립시키고 있습니다. 사회적 인프라라는 것은, 상하수도, 교통망, 통신망, 전기 가스 수도 같은 보급에 관한 얘기입니다. 제도자본이란 행정, 사법, 의료, 교육 등을 말합니다.
사회 간접 자본은 집단이 존속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정적으로, 지속적으로, 전문가에 의해, 전문적인 지견과 기술에 기초해 유지관리 해야만 합니다. 어쨌든 급격히 바뀌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사회적 간접 자본의 관리운영에 정치와 시장은 관여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딱히 정치가나 시장을 깔본다든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정치 과정도 경제 활동도 너무나 복잡해서, 다음에 무엇이 일어날지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측불가능한 시스템을 ‘복잡계’ 라고 부릅니다. 작은 입력차이가 극적인 출력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브라질의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텍사스에 회오리를 일으키는 일이 가능한가?’ 라는 말은 예측 가능성에 대한 유명한 프레이즈입니다만, 복잡계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나 경제에 열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기가 없어진다든가, 바다가 말라버린다든가, 숲이 소멸한다든가, 보급망이 멈춘다든가, 학교가 없어진다든가, 병원이 없어진다든가 해서는 안 됩니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래서는 인간이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그러므로, 사회적 간접 자본을 복잡계와 분리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정치는 ‘좀 더 나은 세상’ 을 목표로 하는 활동입니다. 경제는 ‘좀 더 잘 사는 세상’ 을 염두에 둔 활동입니다. 아마 주관적으로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초의 계기는 모두 향상심이나 선의, 모험심에서 비롯했습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전혀 나쁜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역사가 가르쳐 주는 대로, 목표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복잡계에서는 예측하지 않았던 결과가 나옵니다. 반드시 나오고 맙니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목표로 한 정치 활동이 전쟁이나 테러, 인종 청소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좀 더 잘 사는 세상을 염두에 둔 경제활동이 공황이나 양극화, 환경 파괴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역사에 일어난 일들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그래도 좋다, 무언가 극적인 변화가 있었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루해 죽을 지도 모른다… 라는 것이 아마 인간의 ‘카르마業’ 라는 것이겠지요. 나 역시 그런 기분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만 두라’ 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제발 부탁이니, 사회적 간접 자본만은 될 수 있는 한 손을 대지 말아 주었으면 합니다.
정권이 교체되니 전기가 끊겼다든가, 주가가 하락했더니 의료기관이 사라져 버렸다든가 하면 곤란합니다. 그런 것은 어쨌든 정상적(定常的)으로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정치와도, 시장과도 격리되어야 합니다.
개인은 변화를 욕구하지만, 공공적인 것은 안정을 희구한다. 명제를 이렇게 바꿔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정치활동도 경제활동도, 그것을 구동하고 있는 것은 ‘사념’ 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회’ 나 ‘내가 생각하는 잘 사는 사회’ 를 실현하기 위해서, 사람은 정치나 경제를 건드립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올바름’ 이나 ‘풍요로움’ 은 어디까지나 사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격하게 충동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다른 견해임에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면, ‘부탁이니 내 얘기를 들어주시오’ 라고 간원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길 가는 사람에게 큰 소리로 ‘나는 결국, 이 세상이란, 욕망 밖에 없다고 생각해!’ 라고 부르짖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고 생각하는 사람은 열심을 다해 ‘처음 듣는 얘기로군’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주의를 끌고자 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사념만이 ‘브라질 나비의 일격’ 적인 임팩트를 갖습니다. 그것만이 복잡계에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복잡계를 구동하는 것은 사념입니다. 그렇지만, 사회 간접 자본을 움직이는 것은 사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공적인 것에 대한 배려’ 입니다. 거기에는 오리지널한 요소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공기는 있는 편이 좋다’ 라든가 ‘수돗물은 깨끗한 게 좋다’ 라든가 ‘법체계는 합리적인 편이 낫다’ 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보통은 없으니까 말입니다.
사회적 간접 자본은 전문가가 전문적 지견에 기초해 관리하고 신경을 써야만 한다는 것이 ‘그런 것’ 입니다. 거기에 사념을 끼워 넣어서는 안 됩니다. ‘바다는 없는 편이 좋아, 나는 바다가 싫으니까’ 라든가 ‘학교는 없어도 돼, 나는 공부가 싫어’ 라는 사적인 견해는, 그것이 주관적으로는 아무리 적절하다고 해도, 사회 간접 자본의 관리 운영에는 결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서는 ‘정치적 올바름’ 도 ‘경제 합리성’ 도 배려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정말로 정치적으로 올바름’ 인가, 무엇이 ‘정말로 경제적으로 합리적인가’ 인지는 우리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 간접 자본이라는 것은 ‘그것이 없으면, 집단으로서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리스크가 있는 자원’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판단을 일단 보류해 둡니다. 인간들이 매일 열심히 사고 팔고, 만들고 부수고, 얻고 잃고 하는 영역에 연관짓지 않습니다.
(2020-10-27 09:05)
저자 약력
우치다 다쓰루
1950년생. 사상가, 무도가.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거리의 한일론> 등.'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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