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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서평을 쓰지 않는 이유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10. 11. 20:23
<현대 단가> 라는 잡지로부터 '좋은 서평' 이라는 논제로 기고를 의뢰받았기에 이런 것을 썼다.
'좋은 평론이란?' 을 축으로 한 특집에 '원칙적으로 서평을 쓰지 않는 인간' 이 기고하는 것은 어딘가 위화감이 들지만, 모처럼이니만큼 '위화감' 의 이유에 대해 생각한 것을 써 보고자 한다.
나는 원칙적으로 서평을 하지 않는다. '비평적 입장' 이라는 것이 서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밝혀 두고 종종 태도를 번복하는 게 꺼림칙했지만, 어디까지나 '원칙적' 이라는 조건이 붙어있는 것 뿐이라며 저자나 담당 편집자로부터 '홍보를 위해 제발 부탁드립니다' 라고 간원이 있는 경우 쓰고는 했다. 단, 그 경우에도 '일단 쓰기는 하지만, 쓰고 싶어지면 씁니다' 라고 해 둔다. 대상을 읽어 보고 '칭찬할 만한 구석' 이 보이면 쓴다. 없으면 쓰지 않는다. 굳이 하자를 왈가왈부하는 서평은 쓰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원칙이다.
그것은 하자를 논한다고 해서 글쓴이가 앞으로 산출해 낼 결과물의 질이 높아질 거라고는 개인적으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상처받으면 울적해진다. 절망을 원동력으로 해서 그 다음에 쓰는 글의 질이 높아지는 일은 나의 경우에는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어떠한 장르, 어떠한 글쓴이에 대해서도, 그들이 항상 '보다 나은 것' 을 쓰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가끔) 비평하는 입장이 되면 신경을 쓰는 것이란, 어떻게 '칭찬' 하면 그 글쓴이가 앞으로 더욱 질이 나아진 것을 쓰게 되어 그 독자들의 지성적•감성적•논리적 능력의 향상에 이바지할 수 있을까, 그것 뿐이다. 내가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집단적•장기적 효과이지, 글쓴이 개인이나 작품의 이러저러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
물론 '이런 엉터리 같은 글은 두번 다시 쓰지 마라. 붓을 꺾어라' 하며 하늘을 대신해 신랄하게 꾸짖는 것은 문화의 정결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며 평론을 농하는 사람도 있다. 조리는 맞다. 그런데, 질책받은 당사자는 이후에 어떤 종류의 주제를 기피한다든가, 문체를 쓰게 되지 않게 되기도 하는데, 무엇보다 어떤 종류의 무구함을 잃게 되는 것이 문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 이 베스트셀러가 되기 전에는 비교적 한정된 수의 독자와의 친근한 관계에 둘러싸여 차근차근 실력을 키워 나가며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혹은 가족 사진조차 당시 언론을 통해 공개되어 있었을 정도다. 그렇지만, <노르웨이의 숲>이 기록적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환경이 일변했다. 그때까지 그를 알지 못했던 수많은 독자가 생긴 한편, 그때까지 그의 책을 읽어보지도 않았던 비평가들을 불러들이고 말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 있는지 모를,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공격적인 비평이 비화살처럼 쏟아졌다. 작가는 일본에 있는 것 자체가 괴로울 정도로 정신적으로 고통받아 해외로 출국하고 말았는데, 긴 시간동안 조국의 땅을 밟지 못했다. 그때부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서, 80년대에 그가 느긋하게 써 내려가던 타입의 가벼운 에세이 같은 것은 쓰지 않게 되었다. 그 뒤, 분명 작품은 중후한 무게감을 얻었을 지 모르지만, 그가 30대 시절 쓴 글에 넘쳐 흐르던 무구함은 결국 잃어버린 채 두 번 다시 회복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애석하다. 내가 '서평이라는 것' 을 멀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틀림없이 <노르웨이의 숲> 을 둘러싼 서평에 넘쳐 흐르던 '적의' 에 겁먹은 체험에서 비롯했다.
그때까지 나는 서평이라는 것을, 책을 소재로 해 미적 세계를 부표하는 에세이 같은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편견을 내게 심어준 것은 이시카와 준이다. 그가 1969년부터 2년 간 아사히신문에 연재해 온 <문예시평>(후에 <문예통신> 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나오게 된) 을 십대였던 나는 게걸스럽게 읽었다. 이시카와의 거친 소년풍 취향이 맘에 들어서가 아니었다(이시카와 준이 언급한 책이나 작가의 태반은 내가 이름조차 듣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시카와 준이 쓴 평론은 무지하게 재미있었다. 아마 내가 접해보지 못한 외국의 풍물이나 습속에 대해 쓴 것이었기 때문에 읽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날 <문예시평> 은 후쿠와라 린타로와 요시카와 고지로의 편지교환집 <두 도시의 시간>을 다뤘다. 시의 각운을 둘러싼 두 사람의 담론을 소개한 글을 읽는데 애가 탈 정도로 그 책을 읽고 싶었다. <문예시평> 이 다루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일생 손에 얻지 못했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독자를 이제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시와 문학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이 서평의 쓸모라고 그때 철썩같이 믿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상당히 반시대적인 신빙이었으나 그렇게 되어버린 걸 어떡하나.
그러므로 80년대에 도래한, 이시카와 선생 류의 글맛이 사라진, '촌철살인' 적인 솜씨의 날카로움 뿐인 서평이 앞다투어 나왔을 때부터 나는 서평을 읽지 않게 되었다(마음이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쓰지도 않은 채 지내다가 내가 매체로부터 의뢰받아 서평을 쓰기 시작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인데, 그것은 하시모토 오사무의 소설 <나비의 행방> 에 대해서였다. 관서의 사립 대학*에 근무하는 거의 무명의 불문학자에게 서평을 의뢰한 것이 당혹스러워 그 이유를 물으니까, 편집자가 정직하게 '하시모토 씨의 서평은 누구도 써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모모지리무스메> 이래로 열성적인 하시모토 팬이라 기회가 될 때마다 거론했기 때문에, 어디선가 이걸 접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그 서평은 하시모토 오사무의 천재성을 그저 찬양하는 것이었다. 서평의 요체라고 간주되는 것을 제하고 있었던 탓에 두 번 다시 의뢰가 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예상과는 달리 그때부터 하시모토 오사무의 신간이 나올 때면 나에게 서평의 몫이 주어지게 되었다.
후에 하시모토 씨와 처음으로 만났을 때 놀랄 만한 일화를 들었다. 어느 전국지 문화부 기자가 인터뷰를 하러 왔다. 그 기자가 하시모토 씨에 대한 예비 지식을 숙지하고자 자사의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했는데 '하시모토 오사무' 에 대한 기사가 한 건도 없었다고 한다. 과연, 그동안 서평가가 없었던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족보도 없고 의거할만한 문학이론도 찾기 힘들며 독자에게 전할 메시지도 잘 이해되지 않는 작가에 관한 그 '예외성' 을 발굴해내는 편이, '지성계의 현황판' 에 고이 모셔져 있는 작가를 날카롭게 평하는 것보다는 훨씬 즐거운 일이 되지 않겠나 하고 나는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나는 서평을 그다지 쓰지 않는다. 그런데, '좋은 서평' 이란 '그것을 읽은 평론대상의 당사자가 결국 <용케도 쓰고 말았다> 라고 손발을 제멋대로 놀리게 되는 상태에 빠져들어, 머리띠를 질끈 묶고 다음 작품을 쓰기 시작하게 되는 것' 이라고는 생각하고 있다. 그런 것을 언젠가는 쓰고 싶다.
(2020-10-09 15:18)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10/09_15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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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서의 사립 대학: 도쿄가 있는 곳을 관동이라 하여 그와 대별되는 일본의 중심 지역을 일컫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 등지와 자주 비교된다. 그리고 일본의 대학은 전국에 퍼져 있는 '옛 제국(국립) 대학' 을 그 정점으로 해서 서열화되어 있다. - 옮긴이'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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