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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침몰은 재난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10. 11. 20:18

    <일본 회통론習合論> 출간 홍보의 일환으로 제 1장의 일부, 공감주의에 대해 쓴 내용을 올립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훑어보아 주십시오.


    세상을 온통 뒤덮고 있는 공감주의의 기초에 존재하는 것은, 내가 조금 전에 지적한 '다수파가 옳다' 는 신빙입니다. 다수파에 속해있지 않다 함은 '이상한 일' 을 꾸미고 있을 터이니, 그걸 다수파에 맞춰 교정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젊은 사람들 중에도 많이 보입니다. 그런데요, 그런 것이 '사대주의' 라는 말입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사대주의' 라고 말했는데 그것을 활자화한 원고에는 '시대주의' 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과연, '시대의 추세에 거스르지 않' 으니까 '시대주의' 구나. 인터뷰어는 젊은이였습니다. 숙어는 잘 몰라도 조어능력은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대' 에서 한 획(•)을 더한 것이 사대(事大)입니다. 큰 것을 섬긴다. 약한 자가 강한 자의 말대로 따라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줄을 잘 서기' '범털 앞의 개털' 과 같은 의미입니다.

    주류라는 것은 '큰 것' '동아줄' '범털' 인 것입니다. 다수파가 말하는 것은 그 옳고 그름에 상관 없이 그저 따른다는 것. 그것이 일신의 안전입니다. 그것이 작금의 동역학입니다만, 물론 예전부터 있었던 개념입니다. '사대' 의 전거는 <맹자> 임으로, 그 정도로 오래 전부터 존재한 생존 방식입니다.

    그런 삶의 모습도 분명 일종의 리얼리즘일 수 있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주류냐 비주류냐 하는 것은, 각자가 주장하고 있는 것의 옳고 그름내지는 진실과 거짓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분명히, '조화를 깨트리지 않는다' 는 것은 집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일본의 경우, 그 정도가 지나칩니다.

    내가 '조화' 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조화' 를 과도하게 주워섬기는 사람은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거기서 움직이지 마라' '변하지 마라' 고 명령하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이 활동하고자 하는 자, 어제까지와는 다른 행동을 하려는 인간이 나오면 분명히 집단을 관리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조화를 중시' 하는 사람들은, 기초적인 예절로써 '분수를 알아라', '계란으로 바위 치기', '튀어나온 돌이 정 맞는다' 라는 정형적인 말들을 시끄럽게 떠들어댑니다.

    이런 말들은 내가 어렸을 적까지는 곧잘 쓰이고는 했습니다(나도 혼나면서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기부터 그런 말이 쏙 들어갔습니다. 1960년대 이래로 사람들이 입에 담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분수도 모르고' '돌멩이로 한강을 메우며' '일부러 튀어나오는' 삶이 장려되었습니다.

    고도성장기라는 것은 참으로 그런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분수에 맞지 않는 욕망' 을 좇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모한 일에 도전했으며 '모난 돌' 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국운이 핀 시기란 그런 것입니다. '일찌감치 자신의 캐릭터를 설정하고 자신의 참호를 파고 들어가, 거기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말라' 는 말은 내가 젊었을 때 누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그런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도 콧방귀를 뀌며 흘려들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야, 현실을 살고 있는 자신이 '정형적이지 않은 일' 을 하면서 돈을 벌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틀에 박힌 말들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21세기에 들어서자 다시금 부활했습니다. 정신이 들고 보니 다들 그런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일본인은 돈이 없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얼마 전 내 친구인 젊은 연구자가 또래 학자들과 의견교류를 가졌는데, 사석에서 중간중간 내 뒷담화가 있었다는 모양입니다. 거기서 내 평판은 생각 이상으로 나빴습니다. 어디가 못쓰는 것인지 내 친구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전문 분야 이외의 것에 대해 입을 놀린다' 라는 대답이 나왔다고 합니다. 학자란, 자신이 확고히 수련한 학술 영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불문학자는 불문학만 하면 된다. 그것 말고는 초짜니까 입을 다물고 전문가에 맡겨야 한다, 라고 했습니다.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구나, 라고.
    그렇지만, 그렇게 말해도 무리입니다. 나는 '전문 분야 바깥에 있는 것을 떠들며' 생계를 잇고 있으니까요. 프랑스 현대 사상이나 문학에 대해 논문을 몇 편 쓴 것만으로 흥미가 채워지지 않습니다. 금방 여기저기에 구미가 당깁니다. 무도론도, 교육론도, 영화론도, 신체론도, 만화론도, 노가쿠(能樂)론도, 자신의 취향이 동하는 대로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것도 전문영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도에 대해서는 45년간 수행해 자신의 도장을 갖고 수백 명의 문인을 길러냈지만, 무도의 전문가라고 참칭하기에는 지금도 부끄럽습니다. 교육은 35년을 업으로 삼아왔습니다만, 교육학이나 교육방식의 전문가는 아닙니다. '교단에 서본 적이 있다' 정도입니다. 영화는 젊었을 적부터 연간 200편 정도의 기세로 봐 왔고 책도 몇 권 냈지만, 영화의 줄거리나 배우 이름을 자세히 아는 일은 없습니다. 노가쿠는 연습을 시작한 지 슬슬 25년이 되었지만, 그저 선무당일 뿐입니다.

    어느 영역도 나는 '전문가' 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설익은 앎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살짝 깨물어 보면 그 영역이 무엇인지, '진짜배기' 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됩니다. 자신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경지라는 것만은 압니다.

    나의 학문이라는 것도,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선무당' 입니다. 그렇지만, 분야에 상관 없이 '고단수' 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것을 보고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는 됩니다. 그것이 생초보와 하수의 차이입니다. 자신이 살짝 건드려본 것만으로도, 전문가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뛰어난 일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품을 들였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반쯤 하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반쯤 초보인 자에게도 존재 이유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와 초보를 '연결하는' 역할입니다. 내가 유대인, 구조주의, 레비나스, 마르크스, 노가쿠 등에 대해 쓴 책 모두,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업의 결과였습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나는 전문가가 아니지만 전문가의 산물을 독자에게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만은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분야의 저변을 넓히고자 했습니다. 저변을 넓히지 않으면 고도는 상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전문가가 해야 할 일' 이라고는 보통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대리 수행한 저는 이따금 '전문영역이 아니면서 어설프게 말하지 말라' 고 질타받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게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나같이 프로도 아마추어도 아닌 사람이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말한 것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한 줌이나마 얻을 만한 것이 있습니다(아니,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게 흥미롭다고 생각한 사람은 계속 읽고, 읽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면 그만 두면 되는 일입니다. 더 바랄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움켜쥘 만한 지견이 있는지 없는지' 따져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지 제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나한테 하는 '정해진 영역을 벗어나면 안 된다' 는 말에 쉽사리 수긍하고 말 수는 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내 학문분야로부터 외도하고 난 뒤 내가 맘에 드는 곳을 건들건들 돌아다니며 밥술깨나 먹고 있기 때문에, 휴업명령을 내릴 참이면 그에 맞는 재난지원금을 줬으면 해요.

    그렇지만, 이 '분수를 알라' '돌멩이로 한강을 메울 셈인가' 라는 일갈은 예전보다 더욱 자주 듣게 되었습니다.

    오다지마 다카시 씨가 예전에 트위터에서 재무장관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했는데, '그렇다면 자신이 재무장관이 된 뒤에 말하라' 는 경탄할 만한 답글이 날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본새는, 확실히 요즘들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내가 정치적인 것에 대해 발언했던 때도 '그러면 너 자신이 국회의원이 되면 되잖아' 라며 트집잡는 일이 있었습니다. 내 지인이 어떤 유명 유튜버를 비판적으로 말하려고 하면 '재생횟수가 같아진 뒤에나 말하라' 고 합니다. 어느 젊은 경영자에 대해 비판하면 '상대가 번 만큼 똑같이 돈을 가진 뒤에야 말하라' 고 합니다.

    전부 패턴이 같습니다. 비판하고 싶으면 비판 대상과 동급이 되라는 겁니다. 그렇다는 얘기는, '권력자를 비판하고 싶으면 먼저 자신이 권력자가 되어라' 입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비논리적이지 않나요. '현실에 불만' 이라는 것은 현실을 바꿀 만한 힘을 가진 인간만이 말할 자격을 갖고 있습니다. 힘이 없는 인간에게는 '현실에 불만이 있다' 고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언명을 선뜻 받아들이고 나면, 이제 '현실을 바꾸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존재하는 시스템 내부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우선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그 룰에 따르고, 다른 사람들과의 출세경쟁에 참가하며, 거기서 싸워 이겨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살아남게 되면, '자신을 출세시켜 준 시스템' 을 바꿀 필연성이 사라집니다. 그루초 마르크스같이 '자신을 가입시켜 준 클럽에는 가입하고 싶지 않다' 고 말하는 사람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 뿐입니다. 보통 사람은 '자신을 위대하게 만들어 준 시스템은 좋은 시스템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 불만이 있다면, 우선 현실을 바꿀 정도로 대단해져라' 는 언명은 사람을 현실에 못박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을 지금 있는 장소에 못박아,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필살기' 로써 논쟁에서 애용되어 오고 있어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희희낙락하며 그 틀에 박힌 말을 외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시대의 '분위기' 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분위기' 냐면, '자신에게 할당된 위치에 있어야지 거기서 나오는 것은 안 된다' 는 압력입니다. 그 압력이 대기압처럼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일상화되어 있어서 압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감주의자들은 '조화' 를 질리지도 않게 주장합니다. 이론異論이라든가 일탈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결속이 흐트러진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이때 그들이 지향하는 '조화로움' 이란 다양한 것이 시끌벅적하게 혼재되어 있어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가운데 자연스레 형성되는 동적인 '조화' 가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균질적인 것이 딱딱 맞춰진 설계도대로 정해진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할당받은 루틴을 행할 뿐인, 생명력도 번식력도 잃어버린 죽음과도 같은 '조화' 입니다.
    '조화로움' 과 '정지 상태' 는 정말 별개의 것입니다. 그런데, 공감주의자들은 그 다름을 의도적으로 혼동시키고 있습니다. 지금 일본 사회에서는 '동적인 조화' 라는 것을 그다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시받은 대로 꼼짝 않고 있는 것' 만 인정받습니다. 이 '감옥' 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끈질긴 공감입니다.

    공감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만 찾게 되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구요. 분명하게 조건과 규칙만 정해놓는다면, 공감할 수 없는 사람, 이해하지 못할 사람과도 공생협동할 수 있습니다. 몇 개나 되는 '좋은 것' 을 이 세상에 선물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편이 끈질긴 공감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보다 훨씬 운신하기 편하고, 유쾌하며, 유의미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소리 높여 말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2020-10-09 13:15)

    원제: 『日本習合論』ちょっと立ち読み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10/09_13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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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노트]

    일본 미시마[ミシマ] 출판사에서 2020년 9월에 출간한 이 책의 원제는 <일본 습합론> 입니다. '習合' 이라는 단어는 엄연히 국어사전에도 등재된 어휘입니다만(표준국어대사전), 한국어 언중인 제 입장에서는 그 의미를 곧장 알아차리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비슷한 의미이자 의무교육을 통해 배우게 되는 개념인 '원융회통' 을 차용해 바꾸어 옮겼음을 밝힙니다.
    그것 외에도 본문 중 상당히 많은 어휘를 번역자가 의역했음을 말씀드리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이 책이 장래 국내에 번역되어 들어올지는 아직 잘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내용이 상당히 난해해 여러 번 읽어야만 했다고 미시마 사의 편집자가 언급한 바 있다고 합니다. 저자가 직접 말하는 이 책 단 하나의 메시지는 '말을 복잡하게 합시다' 라는 모양입니다. 그 오의에 대해서는 부족한 번역이지만 독자 여러분께서 잘 판단해 주시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