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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류 드라마와 커뮤니케이션 플랫폼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10. 3. 12:36

    매월 어느 지방지에 에세이를 기고하고 있다. 9월은 <한류> 의 얘기를 썼다.

     

    코로나로 집에 틀어박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넷플릭스로 <사랑의 불시착>을 보기 시작했는데 멈출 수가 없어서 한류 드라마를 연속 시청하고 있다. <이태원 클라쓰>, <신입사관 구해령>, <미스터 션샤인>, <베토벤 바이러스> … 매일 밤 보고 있지만, 하나를 끝내고 나면 친구들로부터 ‘그거 봤어?’ 라고 독촉받고 있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다. 히라카와 가쓰미 군[기업가·저술가 –옮긴이] 은 매일 6시간 정도 본다는 모양이다. 매일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보는 통에 눈이 아프다고 투덜댄다. 그 정도까지 할 필요도 없는데.

    그러고 보면, 옛날에는 일본 TV 드라마도 그랬던 적이 종종 있었다. 20년 전까지는, 대부분 모두 보고 있는 드라마라는 것이 있었다. 그런 공통의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공동적으로 참조할 수 있는 ‘이야기’ 가 없어질 때 불편한 점은, ‘우화’ 의 재료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연하인 친구 중에 대학에서 ‘조직론’ 이라는 과목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 의하면 예전에는 조직론의 ‘우화’ 로 <슬램덩크> 를 끌어들이면, 대개 학생들에게 통했다는 듯하다. 그렇지만 어느 시기부터 ‘강백호’ 라고 말해도 ‘정대만’ 이라고 말해도, 누구도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해 멍하니 있는 학생이 늘었다. 부득이, 우화의 전거를 <원피스>로 바꿨다고 들었다. 학생들의 매년 변화하는 만화 리터러시 사정을 모르면, ‘우화’ 도 만들지 못한다고 그는 불평했다. 과연.

    옛날에는 가부키나 고단[講談; 야담의 일종 -옮긴이] 이 곧잘 ‘우화’로 사용되었다. 벤텐 고조, 마가키 헤이고로, 구슨 고부[단도,비수 –옮긴이] 등등의 이름을 대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금 학생들은 이중 어느 것도 모르겠지만.

    가와시마 다케요시가 쓴 <일본인의 법의식>은 ‘일본적 조정’의 뼈대에 대해 설명할 때 <세 명의 키치사, 유곽에서의 첫 거래>[三人吉三廓初買 ; 가부키 -옮긴이] 의 한 장면을 우화로 활용한다. 이게 또 걸작이지만, 지금 법학부 수업에서 화제로 올린다 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문화적 플랫폼’ 의 존재는 커뮤니케이션의 기초로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것을 잃어버렸다. 도덕이라든지 미의식이라든지 감정이라든지, 혹은 좀 더 구체적으로, 축사를 읽는 법이라든지, 감사를 표하는 법이라든지, 다툼을 중재하는 법이라든지, 그런 것에는 ‘표준형’ 이 있어서 그것을 적재적소에 응용할 수 있는 것이 오랫동안 ‘어른의 법도’ 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모든 사람이 준거로 삼을 수 있는 표준이 있을 때의 얘기다. 홍백가합전의 시청률이 80%였던 시대란, 우노 주키치의 성대모사를 초등학생도 할 수 있었던 시대의 이야기다. 그런 ‘문화적 플랫폼’ 이 21세기가 되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을 남몰래 개탄하고 있었던 찰나 한류 드라마가 인터넷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인상적인 일이 있었다. 한일론에 대한 책을 쓴 것을 계기로, 요전번에 재일 코리언 논객들과 좌담회를 가질 기회가 있었다. 연령도 정치적 입장도 다른 세 명의 사람들과 한일 문제를 논했다. 현실 인식이 제법 삐걱거려서 살짝 분위기가 냉각된 채로 끝난 뒤, 밥을 먹으러 갔다. 그 자리에서 우연히 <사랑의 불시착> 얘기가 나왔다. 그러자니 그 자리에 있는 모두(재일 코리언 3명, 일본인 2명) 반쯤 흥분하여 드라마의 이모저모를 논하기 시작했다. 이 드라마의 역사적 의의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모두가 각자의 생각을 열띠게 토론했다. ... 그래서, 여기에 한국과 일본의 가교가 되는 ‘플랫폼’ 이 있었구나 하고 가슴이 덜컥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 라는 것은 소중한 것이다. 어떤 인간이든, 어떤 현상이든, 구체적인 촉감이 있는 소재를 공유하는 것에서부터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된다. 굳이 일본산은 아니지만,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소재를 손에 넣은 것에 나는 축복을 내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2020-10-01 16:17)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10/01_16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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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와 비슷한 조정 기법이 에도 시대까지는 활용되었던 모양이다. 카와타게 모쿠아미가 지은 가부키 <세 명의 키치사, 유곽에서의 첫 거래> 에 ‘경신탑의 장’이 있다. 이 얘기에는 키치사라는 이름이 같은 세 사람이 등장한다. 여장을 한 도적 키치사가 창기를 죽이고 돈 100냥을 빼앗는다. 이 장면을 목격한 애송이 악당 키치사가 “그 돈을 나한테 순순히 건네라” 며 으름장을 놓는다. 두 사람이 칼을 빼들고 서로 돈을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이는데, 이들보다 더 노회한 악당인 화상 키치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두 사람을 향하여 “나에게 맡기고 칼을 물려주시게” 라며 말을 꺼낸다. 두 사람이 일단 싸움을 멈추고 칼을 거두자, 화상은 이렇게 말한다.

    “두 사람이 100냥을 내놓아라. 내주지 않겠다고 옥신각신하다 소중한 생명을 버릴 셈인가…… 이번만큼은 내가 중재를 설 터이니, 싫어도 내 말을 들어보게. 서로 다투는 100냥은 둘로 나누어 낭자도 50냥, 도령도 50냥씩 싸움을 만류한 나에게 주지 않을 텐가? 그 대신에 내가 양팔을 내놓으면 50냥치고는 값나가는 물건이지만, 칼을 빼어 그대로 칼집에 꽂는 건 사내의 수치니 내가 양보함세. 양팔을 베어 100냥어치를 맞춰주게나.” 이 말을 듣고 두 사람은 화상의 팔을 칼로 베고, 이어서 자기들의 팔도 베어 세 사람의 팔에서 흐르는 피를 모아 나눠 마시고 의형제가 되었다는 얘기다.

    (…) 이 이상한 조정술에 대해 카와시마 선생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 분쟁의 해결 방법은 화상 키치사가 말하듯, 다툼을 ‘원만하게 수습’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즉, 조정의 성격을 띤 중재는 분쟁 당사자 중 어느 한쪽이 옳은지 밝히는 것 – 현대 법에 의한 ‘재판’ 은 이를 목적으로 하지만 – 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화상 키치사가 말하듯 ‘원만하게 수습’ 하는 것 – 분쟁 당사자 사이에 ‘사이좋은 관계’ 를 만드는 것 – 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우치다 타츠루, 하류지향: 공부하지 않아도, 일하지 않아도 자신만만한 신인류 출현, 박순분 역 (서울: 열음사, 2007), 10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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