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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라는 '오리지널리티'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10. 25. 19:29
도쿄 발레단이 미시마 유키오 사후 50년을 기리며 모리스 베자르 안무, 마유즈미 도시로 작곡 <M> 을 상연했다. 공식 팜플렛에 기고를 의뢰받았기에 DVD로 처음 공연 영상을 보고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냈다.
미시마 유키오는 <미시마 유키오> 라는 버추얼 캐릭터를 지극히 정밀하게 조탁해 낸 작가로서 기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어느 작가든 정도의 차는 있지만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허상' 을 독자 앞에 내거는 것으로 그 작품의 매력을 쌓아 올린다. 딱히 작가 자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독자나 비평가들이 앞서 '허상' 을 마련해 나간다. 그것은 작가가 범용하고 세속적인 인물인 것보다 미스테리어스한 존재인 편이 독자의 쾌락을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여러 모습이 있고, 여러 지층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독자로서 소박하게 바란다. 그러므로 비평가들이 주로 하는 일이란 '이 작가는 여러분이 모르는 일면을 숨기고 있고, 여러분이 느끼지 못하는 언짢음이나 욕망을 품고 있으며, 여러분이 놓친 메시지를 몰래 발신하고 있다' 라는 가설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수수께끼 풀기' 라기보다는 오히려 '수수께끼 증식' 인 것과 같다. 비평가의 일은 사실 그런 것이다. 그것이 작품의 매력을 늘리고, 독자를 끌어모아 출판사의 매출을 올려주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한, 작가와 비평가는 어떤 종류의 '공범'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미시마 유키오의 독자성은 그런 공범관계를 매몰차게 거절한 것에 있다. 미시마 유키오는 비평가나 독자가 '수수께끼 풀기' 를 하는 것도, 작가의 허락 없이 멋대로 '수수께끼를 보태는 일' 도, 모두 거절했다. 그 거절의 방식이 참으로 독특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수수께끼' 를 처음부터 자작한 것이다. 그런 뒤 그의 사후에도 존재할, 자신과 관련해 '이미 풀려있고 더해진' 모든 '수수께끼' 를 비평가들보다 먼저 망라적으로 목록화해, 그것을 '결정판' 으로서 남겨두기로 한 것이다.
잘도 그런 불가사의한 일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것은 미시마의 작가적 긍지가 되기도 하는 동시에 그의 엄청난 지성이 간절히 바랐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을 해낼 만한 작가는 문학 역사상 나 이외에는 없다' 라는 압도적인 자부가 미시마 유키오를 '미시마 유키오를 만들어내는 작업' 에 몰아넣은 것이다.
<가면의 고백> 에 대해 미시마 자신이 아래와 같이 밝히며 자신의 텍스트 전략을 공표하고 있다.
"많은 작가가 각자 그들 자신의 <예술가로 지낸 젊은 날의 초상> 을 썼다. 내가 이 소설을 쓰고자 한 것은 그 반대를 욕구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쓰는 사람> 으로서의 내가 완전히 사라져 있다. 작가는 작품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쓰인 생활은, 예술이라는 버팀목이 없었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붕괴할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 전체가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예술가로서의 생활이 쓰여져 있지 않은 이상, 모든 것은 완전한 허구이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나는 완전한 고백이라는 픽션을 만들려고 궁리했다." (<가면의 고백> 노트)
'<쓰는 사람> 으로서의 나' 란 실재하는 히라오카 기미타케(미시마 유키오의 본명 -옮긴이) 인 것이다. 그는 그것이 '완전히 모습을 감춘' 것처럼 사소설을 쓴 것으로 그 소설의 작가로서 작품의 배면에 등장하는 미시마 유키오라는, '완전한 가공' '존재하지 않는 것' 을 허공에다 만들어낸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라 죄송하지만, 그런 이상한 것을 떠올리고 실천한 작가는 미시마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으므로 이야기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작가는 작품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 뒤에, 사후적으로, 가상의 기원으로서 비로소 등장한다는 식견은 미시마의 오리지널이 아니다. 모리스 블랑쇼는 이렇게 썼다. "작가는 그 작품에 의해 처음으로 자기를 드러내 보이고, 자기를 실현시킨다. 작품 이전에 작가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르는 채로,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 그는 작품에 기초하는 것만으로 존재할 밖에 없다." (<문학과 죽을 권리>)
미시마 유키오는 그 작품이 쓰여지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히라오카 기미다케는 미시마 유키오가 숨을 불어넣은,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에게 '작품의 기원' 이라는 자리를 양보한 방식으로 사라졌다. 그 뒤 남은 미시마 유키오는 '마치 모든 작품의 창조주인 것처럼 보이는 가공의 피조물' 이다. 미시마 유키오에 대한 모든 '수수께끼' 또한 '미시마 유키오의 수수께끼' 로써 계획적으로 제작된 것이다. 작품 뿐만이 아니라, 그가 조형한 육체에도, 사진이나 영상에도, 정치적 행동에도, 미시마 유키오의 일상생활 구석구석 전부, 시선을 고정한 채 보면 '제조사 미시마 유키오 -- 복제불허' 라는 각인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이미 '만든 사람' 이 없는 완전한 허구이며, 그러므로 완전한 예술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미시마 유키오의 전 생애를 얼마나 특권적인 도상적 주제로 응집시킨 발레 작품으로 마무리지은 모리스 베자르의 작업도, 미시마의 생애를 얼마나 특징적인 음악적 주제로 종합한 마유즈미 도시로의 작업도, 두 크리에이터가 '이게 미시마라는 거대한 존재를 함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것은 두 사람에게 있어서 마음 편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미시마 유키오라는 주제' 를 선정해 몇 개나 되는 특권적인 주제나 발언이나 도상을 끌어모아 '이것이 미시마 유키오다 -- 결정판' 카탈로그를 미리 만들어놓은 것은 작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베자르도 마유즈미도 '미시마가 만들어 낸 미시마 유키오에 대한 이야기' 를 충실히 준거 삼아 각자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 이 작업은 '죽은 미시마와 공동작업을 하고 있다' 는 고양감을 그들에게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미시마 유키오가 후세에 배포 크게 선사한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모리스 베자르는 해설에서 자상하게 'M' 은 '수수께끼(mystère)의 M' 이라고 밝혔다. "M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관객 한 명 한 명이 의미를, 자신에게 있어서의 신화(mythologie)를 자기 자신이 규명해야만 합니다."
베자르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런 발언은 '<M>을 본 관객들은 이야기의 의미를, 자신에게 있어서의 신화를 반드시 발견해내야만 한다' 라는 자신감이 없이는 나오지 않는다. 베자르가 자신을 갖고 있는 것은, 자신이 독특한 미시마 해석을 내린 것이 아닌, 미시마 자신이 손수 만들어 둔 <미시마 해석> 에 충실히 따라 안무를 짠 것에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이상, 가령 미시마 유키오가 살아 돌아와 무대를 보아도, 분명 깊이 만족하며 파안대소할 것이 틀림없으리라는 자신감이 자베르에게는 있었다.
죽은 뒤조차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서는 아무도 수수께끼를 푼다거나 수수께끼를 더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 죽은 작가의 강렬한 의지는 무대를 구석구석까지 관철하고 있다. 그런 문학사상 예외적인 의지를 사후 반 세기동안 발양하는 작가를 나는 미시마 유키오밖에 알지 못한다.
(2020-10-25 08:08)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10/25_0808.html'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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