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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와 예스맨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11. 8. 16:44
일본학술회의의 신규 회원 임명 거부에 대해 나는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것은 이 문제로 정부에 항의하는 단체 중 선봉에 서 있는 '안전보장관련법안에 반대하는 학자 모임' 에 내가 속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나는 한 사람의 학자인 동시에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그것도 애국자로서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에 걱정과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그 소이에 대해 쓴다.
임명거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부에 반대하는 학자는 공적인 승인이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각오하라' 는 총리로부터의 협박이다. 정권에 반대하는 자는 통치에 걸리적거리기 때문이다.
'통치 비용을 최소화하고 싶다' 라고 함은 통치자라면 당연히 들 생각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동기에 대해서 나는 (정말로 찬성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통치 비용 최소화를 우선하면 장기적으로는 국력이 깊이 손상된다. 그 사실을 강하게 호소해야만 한다.
이제까지 반복해서 써 온 바와 같이, 통치 비용과 국가의 복원력은 제로섬 관계에 있다. 통치 비용을 최소화하려고 하면 국력이 쇠하고, 국력을 상향하고자 하면 통치 비용이 불어난다. 생각할수록 당연한 일이다.
통치자는 국력을 상승시키기를 바랄 때 우선 국민을 꽁꽁 묶고 있는 멍에를 풀어주고 자유롭게 행동케 한다. 통제가 안될 때는 경제 발전이나 문화적 창조를 희생해서라도 국민들을 억압한다. 당근과 채찍을 사용하게 된다. 그런 조정은 위정자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능력이라서, 위대한 정치가는 이 완급조절에 대한 노하우를 숙지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60~70년대의 고도성장기 때는 국력 향상을 위해 국민을 좋을 대로 자유롭게 방목했던 시기였다. '전국민 중산층 시대' 는 그렇게 해서 실현되었다. 덕분에 나는 10대와 20대를 참으로 느긋한 환경에서 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시기는 동시에 시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의 절정기여서 혁신 지자체가 일본 전국에 생겨나, 명백히 중앙정부의 통제는 느슨해졌다. 그 뒤, 버블 시기가 도래했기는 했는데 이때 일본 사람 모두는 돈벌이에 열중했다. 분명히 사회 규범은 느슨해졌지만 어쨌든 '돈 벌고 싶다' 라는 생각 뿐이어서 시민의 정치 의식은 희박했다. 개가 돈을 물고 다니는 시기에 세상을 뒤엎으려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버블이 붕괴하자 일본은 가난해졌고, 정치의식은 다시금 희박화해갔다.
보통은 중산층이 몰락하고 계층 양극화가 진행되면 빈곤층이 늘어나고, 사회 정세가 요동치며, 반 정부적인 기운이 양성되어 통치가 곤란해질 텐데, 일본은 그러지 않았다. 시민들은 말끔히 정치적 관심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들이 무엇을 해도 정치는 바뀌지 않는다' 라는 무력감에 삼켜져 핼쑥해진 시민만큼 통치하기 쉬운 존재는 없다. 그것을 7년 8개월에 걸쳐 아베 정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뭐야, 간단한 얘기였잖아. 통치자들은 그것을 깨달았다.
통치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을 빈곤화시키고, 무권리 상태에 놓아두면 된다. 마르크스나 레닌은 그것이 '족쇄 말고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적 계급의식을 형성하고, 그들은 봉기하게 되어, 혁명 투쟁을 영도하리라고 예언했지만, 그런 일은 영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미국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일본에서도 말이다.
시민을 무력화하면 시민은 무력해진다. 이해하기 쉬운 동어반복이다. 무력화한 시민들은 더 이상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을 창조할 힘이 없다. 그저 상급자의 명령에 기계적으로 따를 뿐이다. 당연히, 통합적인 국력은 저하하고, 드디어 한 줌의 초 부유층(특권층)과, 그것에 아첨하는 예스맨인 관료, 저널리스트, 학자, 그 아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무권리 상태의 노동자라는 세 개의 층이 형성되는 전형적인 '후진국' 의 풍경이 전개된다.
지금 일본은 '독재자와 예스맨' 만으로 형성된 조직을 지향하고 있다. 총리는 적잖이 일본의 모든 조직을 그렇게 개조하려고 결심한다. 그런 조직이라면 상층의 지시가 말단까지 지체 없이 하달되어 즉각 물질화한다. 어디선가 '이것은 틀렸다' 고 저지당한다든가 '할 수 없다' 고 들고 일어서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매우 효율적이다.
그런데, 이 조직에는 치명적 결점이 있다. 창조력과 복원력이 없다는 것이다.
'독재자와 예스맨' 만으로 성립된 조직은 상층부가 완전무결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성원은 시스템의 결함을 수정하는 것도, 실패 사례를 정밀 조사하는 일도 허용되지 않는다.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은 동시다발적으로 시스템 각 부분이 고장나 있는 것이다. 그런 문제는 문제의 전조를 느끼고 자기판단으로 예방조치를 취하는 인간, 문제가 일어난 순간에 자기 재량으로 최적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인간들을 시스템의 요소에 미리 배치해두지 않으면 대처할 수 없다. 그렇지만, '독재자와 예스맨' 의 조직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윗선이 무결하다는 전제 하에 설계된 시스템에는 애초에 문제가 생길 일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자기 재량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인간을 육성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라고 거듭 말하는 사이에 시스템은 와해된다.
문제가 치명적으로 되는 상황을 회피하고, 무너진 시스템을 복원하는 것은, 상부와 차별화된 의제를 내걸고, 그들과는 다른 '잣대' 로 현상과 사물의 가치나 의미를 형량할 수 있는 자들, 다시 말해 '이단자' 들이 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독재자와 예스맨' 으로 구성된 시스템은 그런 이물질의 혼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분명히, 단기적•효율적인 시스템 운영을 우선하려면 '독재자와 예스맨' 이 합리적인 해답이다. 그러나, 긴 타임 스팬으로 조직의 존속과 구성원들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이단자가 포함된 조직이 안전하다.
이단자가 혼입된 조직은 통솔이 어렵다. 합의형성에 품이 든다.
그러므로, 안전 보장을 위해서 이단자를 포섭한 시스템을 관리 운영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시민적 성숙이 필요하다. '어른' 이 일정 수 존재하지 않으면 견고한 복원력이 있는 조직이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단을 포함한 시스템은, 구성원들을 향해 '부탁이니 어른이 되어 주게' 라는 간청이 제도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것이다.
'독재자와 예스맨' 의 조직은 구성원이 미숙하고 무력해지기를 어느정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통치 비용을 최소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지금 일본 사회에는 통치자 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통치자의 시선' 으로 '통치 비용의 최소화만이 최우선 과제다' 라고 믿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우리들을 미숙하고 무력한 채로 내버려 두는 시스템을 원한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른이 일정 수 있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 시스템' 이 '통치 비용을 상승시킨다' 고 생각하고 있기에(사실이 그렇기는 하지만) '어른이 없어도 돌아가는 시스템' 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대화다 조정이다 하는 것은 귀찮아. 위에서 전부 정해주고, 아래는 그대로 따르는 조직이 바람직해.' 그것이 지금 일본인의 다수 의견이다.
지금, 행정도 영리기업도 학교도, 일본의 여러 조직이 '관리비용의 최소화' 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독재자와 예스맨' 의 나라는 그렇게 일본인 다수파의 목적이 초래한 것이다.
분명히 그런 나라는 통치하기 쉬우리라. 시민들이 무엇도 생각하지 않고, 희희낙락하며, 유아인 채로 살아갈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나라는 오래 가지 못한다. 그것은 역사가 가르쳐 주고 있는 바다.
(2020-10-30 10:49)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10/30_1049.html'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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