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히라카와 군이 사장으로 있었던 회사에서 일을 했다. 멤버 네 명이서 번역 사업을 일으킨 것이다. 그때 우리는 26살이었다.
볕 안 드는 시부야 임대 빌딩의 좁은 방에다가 주워온 책상과 사물함을 구비해놓고 시작했다. 고도성장기의 흐름에 편승해 회사의 매출은 순조롭게 상승했고, 수 년 후에는 번화가에 위치한 빌딩 한 층을 전세 내서 스무 명의 사원을 고용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나 자신은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한 것을 계기로 전일제 회사 경영에는 손을 뗐지만, 첫 출발부터 이후 3년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정말 유쾌했다. 비즈니스가 '유쾌' 했던 것은 그저 이익이 짭잘해서가 아니었다. 그 이상의, 그것 이외의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라카와 군은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주식회사의 목적은 이윤 창출에 있고, 그것은 인간의 일반적인 목적과 같다. 그저, 주식회사에 있어서의 유일한 목적이 이윤 창출임에 반해, 인간에게 있어서 그것은 수많은 목적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156~7쪽)
확실히 우리에게는 이윤 창출 이외의 '목적' 이 있었다. 기묘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이윤 창출 이외의 목적을 내걸고도 비즈니스가 가능하다-오히려 그렇게 하는 게 낫다-" 라는 명제를 증명해내는 것이었다.
회사는 이익을 내지 않으면 도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론 필사적으로 일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익을 계속 내지 않으면 '게임' 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히라카와 군이나 나같이 결코 남들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 없는 반항적이고 행실 나쁜 젊은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의 한 사람으로서 자본주의라는 게임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것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 우리의 회사는 성공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거래처 소속 젊은 영업사원들이 자주 놀러왔다. 그들은 소파에 앉아 커피메이커에서 멋대로 커피를 뽑아놓고 오토바이 잡지를 보며 시간을 죽이고는 했다. 자신과 동년배인 녀석들이 밝은 얼굴로 일하는 공간을 마음에 들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여러가지 일거리를 갖고 왔다. 어디에 발주해도 상관 없을, 누구에게 맡길지 애매한 일감이 우리에게 쇄도했다.
회사가 잘된다는 소문을 듣고 친구 지인 심지어 지인의 지인 할 것 없이 "입사시켜 주시게" 했다. 히라카와 군은 그 한 트럭 분의 사람들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채용했다. 걱정되는 것도 당연해서 "월급은 줄 수 있겠어?" 라고 물으니 히라카와 군은 "이 사람들의 월급을 우리가 벌면 되잖나" 라며 웃었다.
일단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것에 맞는 '인재' 를 연봉계약으로 고용한다는 것이 작금의 인사 관행이지만, 히라카와 군의 방식은 그 반대였다. 우선 사람을 뽑는다. 그리고 그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기' 위한 방편으로써의 비즈니스 방향을 생각한다. 그것은 뒤에 히라카와 군이 곧잘 인용하게 되는 시타무라 오사무가 제창한 '국민 경제' 의 발상과 비슷했다. 이케다 내각(1960년대이며 이때 도쿄 올림픽이 개최됨 -옮긴이)에서 이른바 국민 소득 2배 증대 계획을 견인했던 재무성 관료 시타무라는 이렇게 썼다.
"국민경제의 진정한 의미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본의 경우를 들자면, 일본 열도에서 살고 있는 일억 이천만 명이,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이 일억 이천만 명은 일본 열도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것을 전제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 그 일억 이천만 명의 고용을 어떻게 확보하고, 소득수준을 어떻게 향상시킬 것이며,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하겠는가. 그 물음에 답하는 것이 국민경제이다."
히라카와 군은 어째서인지 주식회사도 그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쨌든 연이 닿아 동료가 된 이상 '싸그리 돌봐주자' 라며 말이다.
'보살펴준다'는 것은 수지타산에 따라 도출된 합리적인 솔루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근데 히라카와 군의 경우, 이야기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히라카와 군은 아오시마 유키오가 쓴 노래 <잠자코 내 뒤를 따라와> 를 좋아해서 자주 흥얼거리고는 했다. "빈털터리들이여 내게로 오라. 나도 무일푼이지만 걱정 마시라. 저기 저 푸른 하늘, 흰 구름. 거기에 무언가가 있으리" 하는 그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거기에 뭔가가 있" 었다.
나는 히라카와 군의 이 경영철학이 지금도 옳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때 이익본위로 사업을 영위했다면 우리의 회사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생기발랄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도 하지 않는 게임' 을 하고 있다는 긴장감 때문이었다.
히라카와 군은 앞서 인용한 대목에서 무라카미 요시아키(일본에 주주자본주의를 제창한 몇 안 되는 인물로, 지난 2006년 산케이 계열사에 대한 내부거래 의혹으로 구속된 바 있음 -옮긴이)가 펀드 사건 때 기자회견장에서 부르짖은 "여러분, 돈벌이가 나쁜 겁니까?" 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환기시킨 뒤 이렇게 쓴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시샘하는 게 아니다. 법률에 의거해 비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건드려질 수 없는 부분을 돈다발의 위력에 의해 유린당했다고 느껴, 그를 혐오하는 것이리라. <건드릴 수 없는 부분> 은 좀 애매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애초에 상품이 아닌 것을 돈의 위력으로 사고 팔 수 있다는 생각이다. 돈이란 본래 상품에 대해서는 만능이지만, 원래는 상품이 아닐 터인 인간의 정신적인 영역, 즉 긍지, 의리나 인정, 우애나 오기에 대해서 힘을 발휘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158쪽)
나는 이 부분이 책 전반을 통틀어 히라카와 군이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은 <주식회사의 세계사> 이고, 주식회사의 성립과 전개 과정을 통사적으로 상세하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기술한 책이라서 풍부한 지견과 정보가 넘쳐나기는 하지만, 히라카와 군이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한마디로 "주식회사라는 것이 태생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위험함 가운데 핵심적인 것" (89쪽) 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은 돈으로 사지 않는다. 심플한 얘기다. '긍지, 의리나 인정, 우애나 오기' 는 돈으로 사지 않는다. 나는 이런 열거 방식이 참으로 히라카와 군 답다고 느낀다. 첫째로 드는 것이 '긍지' 인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돈 앞에 굴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설령 돈이 된다고 해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이 돈이 되지 않아도 한다' 는 것이다. 자신이 '사는 방식' 은 손익과는 별개의 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도, 이 '당연한 것' 을 들려주기 위해 350쪽의 책을 써야만 했다. 우리들은 그 '당연함' 이 당연하지 않게 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젊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의 기행이나 추문이 세간에 곧잘 회자되고는 한다. 거개가 '이건 좀 뭔가 아닌 듯한' 일화들이다. 그것은 그들이 넘쳐날 정도로 갖고 있는 부유함으로 타인의 '긍지, 의리나 인정, 우애나 오기' 를 사들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돈다발로 뺨을 때리면 인간은 이리도 간단히 긍지를 잃고, 기개를 빼앗기며, 허리를 굽히게 된단 말인가. 그들은 그것을 통해 돈의 전능성을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바꿔 말하면 돈많은 인간이 가장 마뜩찮아하는 것들이 '긍지, 의리나 인정, 우애와 오기' 와 같이 본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이라는 것을 이 책은 가르쳐주고 있다.
이 책에 대해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한다. 그렇지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식회사의 세계사' 의 풍요로운 지견과 정보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거론하지 않고서는 책 소개를 마무리지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포스트잇을 붙여 둔 부분을 몇 개 무작위로 소개한다.
■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 을 썼던 해는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양산하기 시작한 해, 그리고 미합중국이 독립한 해와 동일한 1776년이라는 사실을 이 책은 가르쳐주고 있다. 이러한 일치는 우연이 아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레콘키스타 완수와 유대인 해방령의 발령과 스페인어 정식 문법의 제정과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동일한 1492년에 일어났다. 문명사적 전환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 주식회사의 발상지인 영국에서는 주식회사를 '사기와 추문의 온상' 으로 오랫동안 불법화해왔지만, 산업혁명과 함께 합법화했다. 지식으로써는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 역사적 경위를 이 책에서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주식회사 비합법화의 계기가 된 것은 1711년의 남해회사의 '남해 포말' 사건이다. '남해의 포말' 이라는 제목은 부친의 서재에 꽂혀 있던 세계 논픽션 전집의 뒷표지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남해의 포말' 이란 낭만적인 문자열에서 나는 산호초나 진주의 채취와 같은 것을 상상했지만 '포말泡沫' 은 '버블' 이었던 것이다.
■ 베네치아 상인들이 사용한 복식부기에 의해 "상품 거래가 단순히 일시적인 등가교환이라는 이벤트를 반복해나가는 것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시간이라는 개념을 고려 대상에 포함한 기간적인 이벤트로 바뀐 것" (73쪽) 도 이 책에서 배웠다. 복식부기는 ''어떤 일을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시간과 장소로부터 유리시켜 숫자로 일람할 수 있게 하는 기술법" (Ibid.) 이었다. 이 복식부기적 발상은 드디어 유럽 전체에 확산되었다. 이 책은 <로빈슨 크루소> 를 든 예시가 나와있다. 크루소는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뒤, "복식부기의 방식으로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에 일어났던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좌우 구분선으로 나눈 뒤 기입해, 자신의 인생을 평가" (75~76쪽) 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읽고 루이스 프로이스의 <유럽 문화와 일본문화>를 떠올렸다. 프로이스는 이 책에서 "유럽에서는 ~한데, 일본에서는 ~하다" 같이 병렬적인 기술을 시종일관 반복한다. 나는 이 불가사의한 저술법을 프로이스의 학술적 객관성을 보여주는 일례라고 생각했으나, 1532년에 리스본에서 태어나 고아에서 예수회 사제로 수련받은 프로이스에게 있어서 세상을 복식부기적으로 기술하는 일은 기초적 상식이었을 것이다.
■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에 관련한 설명도 흥미로웠다. '이기적 이익을 추구함에 따라 개인은 종종 사회가 수익을 얻게 되는 이익 실현 행위를, 실제로 촉진하려고 의도한 경우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한다' 는 애덤 스미스의 사고방식은 그보다 100년 전에 나타난 존 로크의 근대 시민 사회론과 거의 똑같다. 그렇다 함은 '이기적인 인간을 비이기적으로 행동하게 한다(경우가 있다)' 는 명제가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처음 '상식' 으로써 등록된 인간관이라는 것이다. 로크와 동시대의 라 로슈푸코는 이렇게 썼다. '이기심은 여러 종류의 말들로 거론되고, 여러 역할을 수행한다.' 라 로슈푸코는 '비이기적으로 보이는 행동의 동기는 때때로 이기심이다' 라고 생각했다. 로크와 스미스는 '이기심을 이용하면 사람에게 비이기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고 생각했다. 인간 이해의 동일한 구조이지만, 프랑스인은 냉소적이고 영국인은 그보다는 어느정도 실용적인 것이다.
이외에도 '그렇군, 그런 것이군!' 하고 무릎을 치게 하는 부분이 많이 있었지만, 한이 없으므로 이쯤 해 두기로 한다. 주식회사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통괄한 책이지만, 이런 책은 히라카와 군 밖에는 쓸 수 없는 책이라고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