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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전후사론> 문고판 서문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 10. 15:55

    시라이 사토시 씨와의 대담집 <일본전후사론>이 아사히문고에서 문고본으로 나왔다. 그 책의 서문을 채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이 책은 2015년에 나온 시라이 사토시 씨와의 대담집을 문고화한 것입니다. 이제 5년도 더 넘은 일이 되었군요. 시사평론적인 책이 5년 뒤에 문고화되었다는 것은, 제법 보기 드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5년 전의 정치적 주제를 둘러싸고 저술된 책이 지금에 와서도 읽힌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가설은 두 가지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는, 일본의 정치 상황이 5년 전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우리들이 이야기한 것이 시의적절함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느 게 맞는 걸까요.

    일본의 정치 상황이 5년 전에 비해 달라진 바가 없다는 것은, 확실히 있을 법한 얘기입니다. 단행본이 나왔던 5년 전은 제 2차 아베 정권이었는데, 그때 관방장관이 지금 총리입니다. 독재, 연고주의, 미국 종속 관계, 신자유주의, 반지성주의로 일컬어지는 정권의 '후진국적' 본질이 총리가 바뀌어도 거의 똑같습니다. 오히려 반지성주의적인 경향이 가일층 강화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반지성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면, 갑자기 눈에 핏발을 세우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날 욕하는 거냐' 라든가 '넌 무슨 자격이 있어서 남을 지성적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있다는 거냐' 고 화를 냅니다. '반지성주의' 라는 것은, 이런 사람들을 '낚는' 절호의 미끼 같은 것이겠지요. 근데, 나는 딱히 그렇게 논쟁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반지성주의라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지적으로 성실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기 위해 노력하는 기미가 없다' 는 심적 경향인 것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딱히 머리가 나쁘다든가 무지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스마트하면서 박식한 반지성주의자 같은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적 성실' 이라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수미일관성을 중요시하며,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등의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만,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논거를 들어 설득받으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자기 주장을 취소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겸허하다든가 도량이 있다든가 하는 개인적 속성과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관계가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지성적/과학적' 으로 되고자 하는 결심이 있는가 없는가입니다.

    과학적인 사람은, 확연한 반증 사례가 나오면 잘못을 인정한다. 과학적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지성과 반지성의 차이, 과학과 비과학의 차이를 곰곰이 생각해 본 뒤에 나오는 결론은 그것 뿐입니다.

    거짓말을 한다든가, 논리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든가, 절대로 잘못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세상에 곧잘 존재합니다. 그런 사람이 정치가나 사업가나 기자로서 눈부신 성취를 일구는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나라의 명운이 왔다갔다하는 중요한 의사결정의 자리에 두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째서 '자기 의견을 취소하는 능력' 이 이렇게나 중요한지에 대해 내가 가장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은 칼 포퍼의 것입니다.
    "지식은 무에서-백지 상태 타불라 라사에서- 출발하는 것도 아닌가 하면, 관찰로부터 출발하는 것도 아니다. 지식의 진보라는 것은, 이전의 지식에 대한 수정으로 인해 주로 성립한다." (후지모토 다카시 등 옮김, <추측과 반박>, "지식과 무지의 근원에 대해", 호세이 대학 출판부, 1980년, 49쪽)

    지식의 진보는 '이전의 지식에 대한 수정' 에 의해 성립한다. 당연한 것 같지만, 그게 상당히 당연하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모종의 '궁극적 진리' 가 어딘가에 있어서(신의 섭리라든지, 절대정신이라든지, 역사를 관통하는 철의 법칙이라든지), 그 비의[秘儀]에 입교한 인간은 다양한 언명의 진위를 그 자리에서 검증할 수 있다... 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매우 많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인구비로 따지자면 아마 압도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포퍼는 그런 사람들을 딱 잘라서 '과학적이지 않' 다고 한 것입니다. 포퍼가 과학적 언명의 유일한 조건으로 든 것은 수정할 수 있음, 다시말해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 입니다.

    반증 사례에 비추어 반증할 수 없는 언명은 그 진위와는 무관하게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신은 존재한다' 는 말은 과학적 언명이 아닙니다.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반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인가 비과학적인가에 대한 판별은 진위의 판정과는 다른 수준에서 일어납니다. 가설이 반증 가능한 형태로 제출되었는가, 그것만이 과학성의 체크포인트입니다. 어떠한 반증 사례를 제시해도 이리저리 발뺌하는 사람은, 설령 그 사람이 주장하는 것이 옳다고 해도 비과학적인 인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과학적 객관성' 이라고 불리는 것은 과학자 개인이 가지고 있는 불편부당성의 산물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 혹은 공공적 성격의 산물로써, 설령 과학적 개인의 불편부당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회적•제도적으로 조직된 과학적 객관성의 기원이 아니라, 오히려 귀결인 것이다" (Karl Popper,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2,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1, p.220).
     
    흠 잡을 데 없는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자가 개인으로서 중립적이고, 당파적이지 않기 위해서 취할 행동은, 본인이 '나는 중립적이다. 어떠한 당파적인 것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고 시끄럽게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진정한 중립성은 자신이 제시한 가설에 대한 부정의 검증은 자신이 행하는 것이 아닌, 공공적인 장소에 내놓은 뒤 그 판정을 맡기겠다고 선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퍼가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 혹은 공공적인 성격(the social or public character)으로 부른 것은 '장[場]에 대한 신뢰' 로 바꿔 부를 수 있습니다. '장' 이라고 해도 되고, '대화적 환경' 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복수의 사람들이 참가해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각자가 다른 것을 생각함에 있어, 그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들과 함께 자기 의견의 옳고 그름에 대한 검증을 형성해 나가는 '장' 에 자신의 의견을 맡기는 것, 그것이 과학적이기 위한 단 한 가지 조건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정치가들의 발언이나 언론, SNS에서 사용되는 말들은 '과학성을 결여하고 있다' 고 내가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봅니다. '일본의 정치 상황은 5년 전보다 그다지 나아진 게 없다' 고 느끼는 것은, 이 반지성주의적 경향이 사회생활의 전 영역에서 정말이지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제 2의 가설도 동시에 성립할 수 있을 듯합니다. 즉, 5년 전에 나와 시라이 사토시 씨가 열띠게 논했던 것은, 다소 시간이 지난 것만으로는 바뀌지 않는 일본 사회 특유의 '고질병' 에 대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분명히, 우리들이 개별적인 정치 사건에 대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 고 그저 나열하는 식으로 말했다면, 그런 것들은 5년 후에는 거의 읽을 가치가 없게 되었겠지요. 만약 지금까지 이 책이 읽힐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이 사건 하나 하나에 대해서가 아닌, 그런 사건을 반복해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일본 사회의 구조를 밝히고자 함이 그 이유가 아니었겠는가 생각합니다.

    물론,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 전체에 관한 구조를 파헤치는 것은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장기간에 걸쳐, 집단적인 학술적 영위에 의해 시작해야 할 만한 사업입니다. 그런 사람들 여럿이서 공동작업을 하는 가운데, 우리의 책이 '벽돌' 하나가 되어 벽 어딘가의 구멍을 메운다든지 기둥의 보강에 쓰임으로 해서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리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항상 지적 열정을 나에게 불어넣어 주는 시라이 사토이 씨께 감사와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이 늙은이를 지도편달해 주십시오. 또한 처음 기획자인 도쿠마쇼텐의 최호길 씨, 문고화를 맡은 나가타 마사시 씨의 노고에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2020년 11월
    우치다 타츠루

    (2020-12-29 13:13)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12/29_1313.html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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