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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시나리오를 바꿔 써야 하는가”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6. 4. 9. 09:23
     
     

    개학 준비 중인 스이잔 대학을 위한 크라우드펀딩 모금 홍보지를 위해 글을 썼다. 마감이 5일이나 넘었습니다 하는 말을 듣고서, 30분 정도 썼는데, 문장은 근본이 서있지 못하며, 소재는 일본변경론을 다시 끌어댄 것이지만, 이런 내용은 반복해서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시나리오를 바꿔 써야 하는가? 

     

    시나리오를 바꿔 쓰기 위해서는 우선 현재 일본의 정책 결정자들이 어떠한 시나리오 써서 그것을 실행하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도 그런 시나리오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확실히 다양한 분야에서 정부는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눈앞에 산적해 있는 난문에 있는 힘껏 최적해로 답하는 도식으로만 정책이 논의된다. 수도관에 구멍이 나서 물이 새고 있으므로 거길 막는다는 유형의 피해와 응급처치의 문형으로만 정책이 논의된다. 어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책을 채용하겠다는 그런 경우가 없다. 

     

    종종 발작적으로 아름다운 나라라든가 어처구니없는 일본, 한바탕 뽐내듯 피어나는 등의 문학적 수사를 유용하여 이상 표현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 이상을 이루려는 정책적 노력의 성과를 판정할 여하한 기준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정책의 성공 여부를 아무도 검증할 수 없다. 

     
    정책의 성공 여부를 아무도 검증할 수 없는 정책만이 속속 내각에서 결정되어 국회 의결에 부쳐진다. 많은 일본인이 이를 이상치 않게 여기지만, 이것은 이상한 사태다. 

     

    예전에 마루야마 마사오는 도쿄재판 피고측의 발언을 듣고서 이것이 일본인의 정신적 특성이 아닌지 의심했다(군국지배자들의 정신형태). 패전 후, 내가 개전방침을 주도했다고 앞서 말하는 인간이 대이론제국 지도부 가운데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ABCD 포위망이 좁혀 들어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전쟁이 개시되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전쟁은 마치 자연현상인 것처럼 도래한 것이다. 이는 히틀러의 선언과는 현격하게 차이가 있다. 히틀러는 전쟁 목적이 실로 명확했다. 

     

    나는 여기에 선전가들을 위해 전쟁 개시의 이유를 부여햊고자 한다. - 이것이 그럴듯한 논의인지 아닌지는 개의치 않겠다. 승자는 나중에 우리가 진실을 이야기했는지 아닌지에 대해 묻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수행할  정의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요는 승리일 뿐이다.” 

     

    히믈러는 이렇게 사자후했다. 

     

    “다른 민족이 번영을 이루든 굶어죽든 내 알 바 아니다. 다만 그 민족이 우리 문화의 노예로서 필요가 있는 한에서만, 그들은 내 관심을 끌 따름이며 그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듯 똑부러진 표현을 우리 군국주의자들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범들은 그저 ‘악의는 없었다’ 하는 변명을 거듭했다. ‘팔굉일우’, ‘대동아공영권’이 의미하는 건, 침략은 무력에 의한 타민족의 억압이나 수탈이 아닌, ‘황도의 선포’이며, ‘자혜 행위’라고 그들은 말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을 긍정하는 자들은 모두 ‘우리는 전쟁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데까지 몰렸다’ 하는 수동태적 구문으로 전쟁에 대해 말한다. 사상과 전략이 먼저 있고, 그것이 전쟁을 영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사상과 전략을 바탕으로 정책이 기안되어, 그것이 성취되었는지의 여부를 객관적인 지표로 검증하는 지적 습관이 일본에는 없다. 

     

    이야기가 벗어났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건 ‘시나리오를 바꿔 쓰기’ 위해서는 ‘원래 시나리오’가 있어야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법인데 일본의 지도자들에게는 ‘시나리오’가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지금도 수동태로밖에는 정책을 기안하지 못한다. ‘큰일이 났음으로 미봉책을 강구’하는 것 이외의 사고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는 우리를 포함해 일본인 전체가 앓고 있는 병인 것이다. 지도자들만을 탓할 일은 아니다. 

     

    ‘시나리오를 바꿔 쓰기’ 위해서는 ‘원래의 시나리오’가 필요하다. 시나리오는 어디에도 없으며, ‘내가 썼다’는 인간도 없다. 만약 시나리오가 없는 채로 영화 촬영이 시작되어, ‘배우가 오지 않는다’든가 ‘조명이 떨어졌다’든가 ‘프로듀서가 돈을 안 주겠다고 말했다’든가 하는 사건이 있을 때마다 내용이 바뀌는 영화라는 게 있다면(없지만), 그것이 일본의 정치인 것이다. 

     

    물론, 시나리오는 그들 무의식 층위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을 언어화할 능력도 없거니와, 국민에게 그 시나리오의 적절성을 설명할 지력도 없다. 따라서, 그 시나리오는 무의식 단계에서 포층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무의식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일본이라는 영화’의 촬영’은 지금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무의식의 시나리오’가 무엇인가를 앞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주어진 1,000자로는 그 배에 해당하는 지수가 필요해 여기서 붓을 놓는다. 기회가 있다면 이어서 쓰고자 한다. 

     

    (스이잔 대학 크라우드 펀딩 한정 매거진, 1월 17일) 

     

     

     

    글쓴이: 우치다 타츠루  원문

     

     

     

    일러두기: 본문의 일부 내용은 『일본변경론』 한국어판 67~68쪽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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