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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조문국 사적지(금성산 고분군)
    취재 2020. 10. 23. 15:35

     

     

    경상북도 기념물 제 128호인 금성산고분군은 대리리, 탑리리, 학미리 일원에 소재하며 고분군은 200여기에 이르는데 출토된 유물은 5~6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삼한시대 조문국의 도읍지인 이곳은 「삼국사기」신라 벌휴왕 2년(185년)에 신라의 영향권으로 편입되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의성지역 지방세력과 사회구조 및 의성지역과 신라와의 관계 파악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성산 고분군은 대개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1960년 탑리리 고분군부터 2015년 대리리 고분군까지, 금성산 고분군에서는 총 7회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지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일대에는 조문국 경덕왕릉이라 전해지는 고분을 포함해 약 374기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발굴 조사 결과 돌무지덧널무덤, 유사돌무지덧널무덤, 굴식돌방무덤 등 의성 지역에서 확인되는 묘의 형태가 거의 모두 발견되었다. 타 지역에서는 돌무지덧널무덤이 단발적으로 형성된 것과 달리 이곳에서는 대규모의 고분이 지속적으로 축조되었다는 점과, 유사돌무지덧널무덤이 금성산 고분군의 주요한 묘 형태라는 점은 당시 의성의 세력이 매우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발굴 조사 결과 확인된 유물의 다수는 '의성양식토기' 이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주관한 탑리 1호분 내부의 발굴 조사에서는 금동관, 금동장식, 은제과대, 금동식리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성림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한 발굴 조사(대리리 46호, 47호, 48호, 49호)에서는 금동관모, 팔뚝가리개, 금동과대, 삼엽환두대도, 은제관식, 의성양식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의성군 금성면 일대는 오랫동안 조문국의 도읍지였다. 대규모 고분의 축조, 수준 높은 위세품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금성산 고분군에 묻힌 '조문의 지배자' 들은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강력한 독자적 세력을 구축해 경북 북부 지역 최대 세력으로 군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문국은 삼한시대 때 의성지역에 존재한 나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군주로 삼아 신라에 복속되었다" 는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가 북부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중간 거점으로 교통과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한 역할 때문에 재지(在地)세력은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현재 다수의 고총 고분군을 남겼다.

     

    1960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탑리고분을 발굴했을 때 금동관 등 72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대리리 2호분을 발굴한 현장에 고분전시관을 세우고 출토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 초기국가, 조문국의 성립

     

    의성지역에서 정치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고인돌 조성기부터였다. 의성지역에 산재한 고인돌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청동기문화의 내용이 곧 계급분화에 따른 초기국가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남 일원에 초기국가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흔히 기원전 2세기 말~1세기 초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것을 방증해 주는 고고자료가 고인돌과는 전혀 계통을 달리하는 널무덤이다. 널무덤의 출현과 함께 발달한 청동기 및 철기가 부장되어 그 이전과는 양상을 전혀 달리한다. 이들은 생산력이 향상됨에 따른 새로운 계급 분화에 토대한 것이었다.

     

    이런 추세로 보아 의성지역에서도 이 무렵에 '조문국(召文國)' 이라는 초기국가가 형성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다만 당시 나라 이름이 뒷날 보이듯이 조문국으로 불리었다고는 생각되지 않고, 아마도 현재는 잘 알 수 없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던 것으로 보인다.

     

     

    ■ 문헌 속 조문국

     

    고대 사회의 의성 관련 사료는 매우 드문 상황이지만 「삼국사기」 2 신라본기에 따르면, '벌휴이사금 2년(185년)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군주로 삼아 조문국[지금의 경북 의성]을 치니, 군주의 이름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원문: 二月, 拜波珍湌仇道·一吉湌仇須兮爲左·右軍主, 伐召文國. 軍主之名, 始於此.)' 라는 기록이 존재한다.

     

    조문국을 의성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삼국사기」 34 지리지 상주 문소군조에 '문소군은 본래 조문국이었는데, 경덕왕 때 고쳤으며 지금의 의성부이다(원문: 聞韶郡 本召文國 景德王改名 今義城府)' 라고 명시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 사료에서는 조문국이 신라에 편입된 시점을 185년의 일로 기록하였지만, 진한에서 신라로, 변한에서 가야로 전환하는 시점을 염두에 둔다면 4세기 정도의 일로 보인다. 이후 조선시대 여러 문헌을 통해 조문국이 의성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 1호 고분 경덕왕릉

     

    삼한시대의 부족국가이던 조문국이 이곳에 도읍하여 신라 벌휴왕 2년에 신라 문화권에 병합되기 전까지 인근 고을의 넓은 지역을 다스렸던 조문국의 경덕왕릉은 그 형식이 전통적인 고분으로 봉 아래에 화강석 비석과 상석이 있다. 먼 옛날 외밭이었던 묘역을 발견하고 수호하게 된 데에는 의성현령의 꿈에 의하여 발견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음을 조선 숙종 때 편간된 미수 허목(1595 ~ 1682)의 문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 해마다 봄철이 되면 한 번씩 관민 일동이 여기서 춘계향사를 지내고 있다.

    분구의 둘레가 74m, 높이가 8m이며, 능의 전면에는 가로 42cm, 세로 22cm, 높이 1.6m의 비석이 있다.

     

    ※ 김대성을 중용해 불국사를 중건한 통일신라 시대의 경덕왕과는 다릅니다.

     

    ■ 의성이 신라를 좌지우지했다

     

    "의성에서 활약했던 (파진찬 -인용자) 구도의 정체가 중요하다. 그는 김씨 왕조의 시조인 김알지의 6세손이자, 최초의 김씨 왕인 13대 미추왕(재위 262~284년)의 아버지다. (...)`필사본 화랑세기`가 사라진 퍼즐을 제시한다. (...) 신라 귀족의 한 줄기인 진골이 구도와 조문국 공주의 딸을 정점으로 하는 여성의 계통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의성에 고분이 집중된 시기도 김씨 왕조가 성립돼 기반을 다져 나가던 때와 일치한다. 의성엔 곡창인 안계평야가 있으며 (...) 막강한 부를 활용해 혼맥으로 맺어진 김씨를 적극 후원했을지 모른다." 배한철, "[역사와의 대화] 신라를 배후조종한 의성의 지배자들", 「매일경제」, 2020년 2월 1일.

     

     

    ■ 삼우당 문익점선생 면작기념비 (의성군 대리리)

     

    고려 공민왕때 문익점선생이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3년 후 귀국할 때 금주성에서 면화종자를 필관에 넣어 귀국하여 그의 장인 정천익으로 하여금 경남 산청에 시험재배한 것이 우리나라 면작의 시초가 되었다. 그후 조선 태종때 그의 손자 승로(承魯)가 의성현감으로 부임하여 금성면 제오리에 면화를 파종하여 오늘에 전하게 되었으며 1909년에 지역주민들이 파종한 원전(元田)에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다시 1935년에 금성면 대리리 현 장소에 기념비를 세워 널리 알리게 되었다.

     

     

    도시청년 지역고용 상생사업 - 청정지역 프로젝트 2020과 함께합니다. http://youthsta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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