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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려읽기) 너 “라깡” 읽어 봤어? 난 읽었지롱.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6. 2. 18. 12:09

    담론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은 두말 않고 능력주의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인간은 개인적 능력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것이고, 획득한 점수에 상응하는 자원분배 규칙을 받아들이겠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상대적인 우열을 다투는 것이기에, 상대평가인 수능 점수와 마찬가지로 개인이 지닌 능력의 절대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경쟁 상대의 점수를 깎아먹을 수록 자기 점수가 늘어난다는 식이지요. 이러면 다른 사람의 손해는 나의 이득이라는 변태적인 도식에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내가 왜 이와 같은 신념체계에 반대하느냐 하면, “개인의 능력은 본질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설령 측정한다 해도 의미가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집단적인 형태로밖에는 살아갈 수 없는 생물입니다.

     

    늘상 말씀드리다시피, 지성은 집단적으로 발현합니다. 어떤 사람이 존재함으로써 집단의 지적 역량이 향상된다면 그 사람은 지적인 사람이거니와, 어떤 사람이 거기 있음으로 해서 집단의 지적 역량이 하락한다면, 그 사람 개인의 아이큐가 아무리 높고 또한 박식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지적인 사람이라 부르면 안 되는 겁니다. 이게 내 생각입니다.

     

    자기 몫의 지력을 도구 삼아 주위 사람에게 굴욕감을 준다든지, 찍어누른다든지, 불안감을 안겨준다든지, 사고정지 및 발언불능 상태로 몰아가는 사람은 지성적이지 않다’, 나는 그렇게 정의합니다. 현대의 대다수 사람들이 믿는 지성의 정의와는 상반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제껏 허다하게 경험해본 바로는 무엇이 지성적이지 않은가?’ 에 대한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습니다.

     

    감성과 영성의 영역에서도 사정은 똑같습니다. 감성 넘치는 사람이 한 명 있으면 주위 사람들의 감정 자원과 감정 표현 어휘도 덩달아 넘쳐납니다. 영성 깊은 사람이 한 명 있으면 주위 사람들의 영성도 섬세해지고, 역동적인 성질을 띠게 됩니다. 무릇 능력이란 공동적으로 향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 몫으로 평가한다든지, 당근과 채찍으로 다룰 성질의 것이 애초에 아닙니다.

     

    승인 욕구를 독차지하고 싶은 나머지 다른 이를 매도한다든가, 깎아내린다든가, 상처주는 사람들은 그만 집단이 발휘할 역량을 끌어내리고 맙니다. “이런 짓거리는 제발 그만 두게나!” 간절한 바람입니다.

     

    아침부터 말이 너무 많았죠? 쓰고 뒤에 떠오른 하나 있습니다. 나는 집단의 넉넉함 개인의 능력평가보다 우선시한다는 의미의 코뮌 주의자였다는 것을요. “코뮌 주의자라고 해봤자 현재 일본 인구 가운데 1%밖에 없을 같기는 한데, 머릿수를 적어도 5% 수준으로 올려보고 싶은걸요.

     

    전 세계의 코뮌주의자 여러분, 서로 사이좋게 격려하고 도우면서, 이렇듯 사상적으로 황폐한 시대 아래 살아남도록 해봅시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분들이 글을 읽고 왠지 코뮌 주의자처럼 살면 재밌겠는데하는 생각이 퍼뜩 나머지, 소속된 학교에 무슨무슨 고등학교 코뮌주의자 동맹이라든가 무슨무슨 대학교 코뮌주의자 연구회 풀뿌리 동아리 활동을 시작해주면 좋겠는데. 물심양면으로 응원할게요!


    트위터라는 문명의 이기는, 모르는 상대를 조롱해 이득을 얻으려는 파리떼들이 세상에 바글바글하단 백일하에 드러낸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럼 조롱을 하지 않고서는 배기는 것일까? 아마도 지독하게 외로워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긍정감이 낮음에도, 자기 평가는 높은경향이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내가 세상에 살아 있을 자격이 있는가? 살아있으므로 해서 보다 나은 일이 생길까?” 하는 불안 심리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때의 존경과 감사는 자기 부모님에게 구할 아니라 완전한 타인, 3자를 만나서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생판 모를 사람이 자신을 필요로 함으로써 비로소 사회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자신감을 얻을 있으며, “나는 살아있을 가치가 있다. 살아도 좋을 일이 많다 마음을 먹을 있게 된다.

     

    하지만 완전한 타인, 3자와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여서, 타자한테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생한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에는 난감하게 된다. “태어날 가치가 있었을까? 살아도 괜찮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만다.

    사실이 말이지, 타자와 관계를 구축하는 일은 간단하다. 타자와 지지고 볶으면서 뭔가 발견하고 도전하며 환장을 하다 보면, 나만 이렇게 어려운 아니고 상대 또한 또다른 타자로부터 승인을 갈구한다는 점은 똑같단 점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심전심이라고 상대도 나에 대해 감사를 해주고, 승인을 해주게 되니만큼, 상호 승인하는 관계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남을 리스펙트하면 남도 나를 리스펙트해준다. 이리도 간단한 원리임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말한 자기 긍정감이 낮지만 자기 평가는 높은 사람 수상하게도 그게 안된다.

     

    그런 걸까? 내가 가만히 보니까 이런 사람들은 타인의 능력을 칭찬해주면 지는 거다* 하는 이상한 사고방식이 있는 듯 하.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타인을 칭찬해주기 전에 자신의 능력을 먼저 추켜세우려는 심리가 발동하게 된다. 하지만 자기를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의 능력을 구태여 먼저 인정해 의무는 누구에게도 없는 만큼, 그를 인정해 주는 사람은 결국 세상에 없다. 그럼 이렇게 불쾌한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 원래 20세기 들어서 지지 않는 이란 말이 일본인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는 했었다. 그런데, 2000년대의 어느 , 일본 티브이에 탕핑족 선구적인 존재가 출연해 일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하고 잊을 없는 말을 남긴 이후,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옮긴이)

     

    그건 바로 타인을 바보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는 잘났고, 상대는 멍청하다는 논리구조가 탄생하며, 자신이 우위에 듯한 착각이 들게 된다. 뿐만 아니라 상대가 무시당해 화를 내는 경우에는 무시당했다고 성을 내다니, 이건 어리석음과 좁은 소견의 소치이므로 무시당하는 당연하다 세간의 가치관도 끌어댈 있으므로 상대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못난 행위를 정당화할 있다. 게다가, 그런 멍청함을 꿰뚫어보고 지적질할 있는 영특한 자기 자신이라는 마저도 살뜰히 챙길 있다. 그런고로 남을 무시하는 비용도 적게 들거니와 (자기 자신이 다칠) 위험성도 적으므로, 조잡하기는 하나 나는 똑똑하고 가치 있는 인간 수가 있게 된다. 한순간이나마 짜릿할 수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여기에 한번 손을 대면 이건 마치 마약과도 같아서 끊을 수가 없게 된다. 근본적 치료는 타자와의 양호한 관계를 쌓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무시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우위에 듯한 착시현상을 기꺼이 택하다 보니까, 더더욱 남을 멀리하게 되고, 쾌감을 얻는 쪽으로 도피하는 습벽이 도지게 된다. ‘ 무시하기 중독증이라 있다.

     

    하지만 남을 계속 그렇게 깔볼수록 인간관계에 모종의 원심력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점점 떨어져나간다. 결국 태어난 보람이 있는가? 앞으로 계속 살아가도 되겠는가?” 하는 본질적인 불안감이 마음에서 떠나지를 않게 된다. 이를 떨쳐내기 위해 남을 무시하는 태도라는 이름의 마약에 다시 손을 수밖에 없다. “나는 다른 이에게 이해 받을 없을 정도로 고상한 사상을 갖고 있으므로 고독한 거다하는, 개똥 철학을 통해 자신을 달래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외로움은 내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하는 그런 논리의 껍질 속에 틀어박혀, 더이상 깨고 나올 수가 없게 된다. 참으로 lonely 논리다.

     

    자신은 개인적으로, 타인과 지지고 볶고 환장 난장을 벌이면서 인간관계가 오히려 굉장히 편해졌다. 타인으로 인해 내가 식겁하는 일이 생기면, 타인들은 좋아하면서도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는 동시에, 이번에는 내가 그들에게 인간관계의 노하우, 이런저런 궁리나 발견, 도전을 걸었다는 그들이 눈치채면, 그들은 나를 자못 제법으로 여겨줬다. ‘리스펙 주고받는 관계가 형성되는 셈이다. 타자를 괄목상대해주고, 때로는 감사해하는 건데, 상대 또한 나를 괄목상대해주고, 감사해준다. 어느 순간 이러한 종류의 관계를 손쉽게 만들 있게 되었다. “진짜 태어나길 했다. 앞으로도 살수 있을 같다 자신감을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얻을 있었으며, 바로 그런 점이 더욱 상대를 존중하게 했다.

     

    타자에게 존중받으면, 자기긍정감이 채워질 뿐만 아니라, 자기 평가도 높아진다.

     

    그러나 자기긍정감이 낮음에도 자기평가가 높은사람은, 타인보다 자신이 우위에 서야만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같다. 당연히 타인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것은 패배를 의미하니까 말이다.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는 꼴이나 마찬가지니까 죽었다 깨어나도 못한다.

     

    그래서 결국 계속 하던 대로 타인을 무시하면서 자신이 상대보다 위에 있다는 착각을 상기시켜 주는 ‘lonely 논리 더욱 매달리게 되는 같다.

    타자보다 뛰어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타자에게는 자신이 미처 갖추지 못한 다른 뛰어난 구석이 있다. 마음가짐을 만나는 사람한테마다 적용할 있다면, 이제 이상 lonely 논리는 채용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지 않고도 자신을 긍정하고, 타자에게 좋은 말을 들을 있는 세상의 이치일진대, 트위터의 안타까운 사람들이 사실을 하루빨리 알아주었으면 한다.


    “... 그것은 자기 옆에 있는 인간이 ‘원숭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정신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초인’은 ‘비웃음 당해 마땅한 원숭이’, ‘노예’의 속성을 지니는 ‘천민’을 가까이 두고서, 끊임없는 조롱과 매도를 일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격하게 증오하면서도, 그로부터 간절히 벗어나기를 바라는 심정을 니체는 ‘거리距離의 파토스’라고 일렀다. 이 혐오감만이 인간 ‘자기 초극의 열정’을 공여한다. 그래서, ‘초인’을 향한 의지를 북돋기 위해, 추악한 ‘원숭이’가 항상 옆에 대기해 있으면서, 혐오감을 반드시 불러일으켜야만 한다.”

     

    고등학생 어디선가 문장을 접하고서는, “ 우치다 타츠루라는 사람, 뉘신지는 몰라도 되게 날카롭고 어두운 사람임에 틀림 없을 거…”라는 맘을 품었던 기억이 납니다.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구절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대학 졸업반이 되자 발등에 불이 떨어져 어디 좋은 스승 없나 백방으로 찾아다니다 보니 바로 우치다 타츠루라는 사람이 제발 책을 읽는 다섯 꼴로 제대로 어른 되어준다면 그야말로 정말 원이 없겠다 하는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속으로 뭐야(なんーだ), 그런 거라면 나라도 있겠네?”라고 짐짓 태도를 불량히 했습니다.

     

    물론, 천학비재인 저는 우치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쓰신 종이책을 무려 원서로 수백 독파한다거나 학술적으로 엄밀히 논한다거나 하지는 못하지요. 쇤네는 그저 여염의 아시가루’(졸병)이온데, 선생님이 어디선가 말씀하신 가르침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현실에서 실천할 있다면, 저는 그걸로 족합니다. 정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