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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사상은 부귀한 신분에서 나오지 않는다인용 2026. 2. 18. 08:37
죽는 말
입학식. 나에게는 마지막 입학식이다. 찬송가 412장을 부르는 것도 학장의 축하의 말을 듣는 것도 마지막이다.
4월 5일. 앞으로 360일.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카운트다운 바늘이 움직인다. 올해 경험하는 것은 모두 대학에서의 마지막 경험이다. 그렇게 주위를 돌아보니 퇴색해 가는 것에서 아쉬움이 느껴지고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덧없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이 땅의 옛사람들은 이러한 감회를 좋아한 듯하다.
‘미적 생활’은 서화와 골동을 가까이 두며 즐기거나 시를 짓거나 문인이나 묵객과 글솜씨를 다투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이것은 언젠가 사라져서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는 인간만상의 무상함, 앞당겨 맞이한 죽음을 생각하면서 밥을 먹고 일하고 놀고 만들고 부수고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욕망하거나 단념하는 것이 아닐까. [이상은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われ’를 의미한다. – 인용자]
꽃과 종이로 만든 조화 사이에는 어떤 미적 가치의 차이가 있는지 이전에 논한 적이 있다. 만약 두 종류 꽃의 형태, 향기, 촉감이 완전히 똑같다면 살아 있는 꽃과 죽은 꽃의 본질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그 차이는 하나밖에 없다. 살아 있는 꽃은 앞으로 죽을 수 있지만, 죽은 꽃은 더 이상 죽을 수 없다는 차이뿐이다. 미적 가치란 필경 죽을 수 있는, 사라질 수 있는 가능성 속에 숨 쉬고 있다.
우리가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삶이 즐겁기 때문이 아니다. 한번 죽으면 더 이상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적 가치를 잴 수 있는 도량형은 죽음이다.
죽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이 모든 인간적 가치의 중심에 있다. 우리가 정형적인 말을 싫어하는 까닭은 그런 말들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을 바꾸면 그런 말들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의 신체가 담보하는 ‘말’만이 죽을 수 있다. 따라서 여론은 죽지 않는다. 개인으로서 누군가 죽어도 여론은 죽지 않는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종이로 만든 조화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정형적인 어법이나 여론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으로 와 닿지 않는다. 가슴속 깊이 사무치게 스며들 듯 남는 것은 ‘죽는 말’뿐이다.
시라카와 시즈카는 공자에 관해 사마천이 쓴 전기는 허구라고 말하며 『공자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공자의 세손에 관한 『사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허구이다. 공자는 아마도 이름도 없는 무녀의 자식으로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비천하게 성장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인간에 관해 처음으로 깊이 관찰한 위대한 철학가를 탄생시켰을 것이다. 사상은 부귀한 신분에서 나오지 않는다.
시라카와 선생의 이 말씀에 관해 나는 선생을 추도하는 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상은 부귀한 신분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단정은 만 권의 책을 독파하고 모든 사료를 섭렵한다고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러한 말은 발화자가 자신을 걸고 ‘채무보증’하는 것 말고는 유지할 수 없는 말이다.
나는 시라카와 선생님이 어떠한 인생을 보내셨는지 약력으로 알 수 있는 사실밖에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부귀와 걸맞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사상은 부귀한 신분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명제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것은 한 노학자의 육신과 그가 고유명으로 살아온 시간뿐이다. 이 명제는 그것 자체가 일반적으로 ‘참’이 아니라 시라카와 시즈카가 말했을 때에만 ‘참’이다. 이 세상에는 그러한 명제가 존재한다. 그런 사실을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다.
―「시라카와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23가지」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똑 같은 언명을 해도 ‘참’으로서 통용되지 않는 말은 그 사람과 함께 죽는다. 자신이 그 말을 하지 않으면 달리 말할 사람이 없는 말만이 진정으로 발신할 가치가 있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과 삶과 죽음을 함께하는 말만이 말할 가치가 있고 들을 가치가 있다는 말이라는 뜻이다.
(2010. 4. 6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 뾰족하게 독해하기 위하여』425~4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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