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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는 고결하지만 순수주의는 추잡하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6. 1. 11. 19:27
박동섭 선생이 어느날 『일본변경론』(우치다 다쓰루 저)을 책장에서 꺼내 읽다가 그만 주체를 못하게 되어, 다 읽어버린 다음에 수필 1편을 일필휘지해 주었다. 작금의 일본 사회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던져주는 논고이기에, 널리 알리고자 한다. (현대 한국 사회에도, 물론이지요. – 옮긴이)
우주 정거장의 향취
인간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 가운데 아마 가장 ‘청결’한 장소로 국제우주정거장(ISS)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구에서 반입해 온 모든 보급품은 최첨단 기술을 적용해 철저히 제균되었기에, 우주비행사들은 엄격한 위생관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온갖 오염으로부터 격리된, 순수성의 요새와 같은 곳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ISS에 머물고 있는 우주비행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곳은 결코 냄새 없는 클린룸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플라스틱 냄새, 음식물 쓰레기 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체취가 뒤섞인, 결코 쾌적하지는 않은 냄새’로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외부 미생물의 침입을 극한까지 차단한 결과 그 폐쇄공간은, 우주 비행사 자신의 몸에서 방출되는 상재균만이 균일하게 존재하는, 일종의 치우친 생태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양성이 상실된 세계에서는 특정한 균만이 번식하여 독특한 불쾌성을 띤 환경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순수함을 무리하게 획득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순수주의’라는 이름의, 또다른 종류의 오탁(汚濁)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주정거장과 그 딜레마 이야기는, 우리 사회와 정치에 내포한, 어느 위험한 병리를 상징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한마디로, ‘순수’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순수주의’는 본질적으로 더럽혀져 있으며,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역설입니다.
순수와 순수주의 사이의 치명적인 차이
애초에 ‘순수’와 ‘순수주의’는 같은 듯하면서도 또 다릅니다. 순수란 있는 그대로의 상태입니다. 이를테면 갓 태어난 아기의 웃는 얼굴이나, 깊은 숲속에서 솟아난 샘처럼, 유동적이고 생성되는 과정의 일단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은 ‘동중정(動中静)’, 즉 끊이지 않는 움직임 속에 나타난, 짧은 순간의 정적이나 조화의 상태를 이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순수주의’는, 그 아름다운 한 단면을 사진으로 찍어 액자에 넣고서, 그것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선언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그것은 어느새 자신의 근거를 의심하기를 멈추고, 고정화된 교의로 화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러하듯이, 순수주의는 인생과 세상의 복잡하고도 다양한 토양을 무시하고서, 만사를 선과 악, 순수와 불순, 아군과 적군 등 이원론으로 단순화하는 과오를 범합니다. 이는 마치, 아름다운 정원에서 특정한 꽃 이외의 모든 식물을 ‘잡초’로 단정하고 근절하려는, 어리석은 정원사의 작태와 비슷합니다. 그 결과 남는 건, 생물 다양성을 잃고서 취약하고도 불모지로 변한 토지뿐입니다.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 나치즘의 교훈
이렇듯 단순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한 번 폭주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역사는 우리에게 통렬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나치 독일의 비극입니다.
‘독일은 세계 최고의 국가이다’라는 그들의 자기환상과, ‘현실상으로는 제1차 세계대천제 패배하여 경제적으로도 피폐해진’ 간극을 메우기 위해, 나치는 모종의 단순한 ‘해답’을 도출해내었습니다. 바로 ‘독일이 참되지 못한 것은, 독일적이지 않은 불순물, 즉 유대인이 독일 국민이랍시고 섞여있기 때문이다’는 식의 설명이었습니다. 순수한 아리아 인종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내고서는, 그 신화를 더럽히는 ‘불순물’로서의 유대인을 상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논리의 귀결로 그들은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순수는 아름다울지도 모르지만, 순수주의는 이토록 한없이 간단히 배제와 차별, 그리고 막대한 폭력과 결부됩니다.
나치의 가설이 옳았다면, 독일 관할 지역의 유대인이 거의 절멸된 시점에서 ‘진짜 독일다운 독일’이 출현하여 독일은 절정기를 맞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땠나요? 전황은 악화일로를 걸었습니다.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와 현실 사이에 생긴 엄청난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나치는 곤혹한 나머지 한층 기묘한 논리를 고안해냈습니다. ‘스탈린과 처칠 역시 모두 유대인의 끄나풀이다’라는 게 그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파탄난 논리를 호도하기 위해 한 술 더 뜬 음모론을 채용한 셈입니다. 순수주의는 이렇듯 한 번 내달리기 시작하면 스스로는 멈출 수 없는, 말하자면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관차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베를린 함락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치자, 선전담당관 괴링(혹은 괴벨스)은 이 모든 난국(아포리아)을 설명할 수 있는, 궁극적인 ‘최종 해결’을 떠올리기에 이르렀다고 전해집니다. 그것은 바로, ‘히틀러 자신이 독일을 멸망시키기 위해 유대인이 비밀리에 파견한 스파이였던 거다’라는 경천동지할 해석이었습니다. 이 말대로라면 모든 퍼즐이 다 맞춰지게 됩니다. 이 궁극의 자기기만에 다다른 그는, 모종의 안도가 섞인 한숨을 쉬며, 그 생애를 마쳤을지도 모릅니다. 순수주의의 논리적 귀결은, 이토록 기괴하며 자기파멸적인 셈입니다.
우리집은 미생물들이 판치는 정글 속이다
이런 순수주의를 향한 갈망은 단지 국가 단위의 정치 담론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와 아주 가까운 생활공간에도 그 잔영은 도사리고 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의 응용생태학자인 롭 던 교수가 쓴 『Never Home Alone』(한국어 제목: 집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는, 그 사실을 소름 끼칠 정도로 상세히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 수행한 오랜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매일 머무르는 집 안에는 무려 20만 종의 생물 (세균, 진균, 절지동물 등)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몸에서 떨어져 나온 각질이나, 음식 부스러기, 그리고 집이라는 건축물 자체를 먹고 사는 그들 입장에선 인간의 집은 쾌적한 서식지인 셈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란 나머지 집안을 샅샅이 청소하고 소독하며 가능하면 무균 상태로 만들고 싶을지 혹 모릅니다. 그러나 던 교수에 따르면 그런 건 절대 불가능하며, 오히려 매우 위험한 시도라고 단언합니다. 왜냐하면 집은 일종의 ‘생태계’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집이나 마당에 살충제를 뿌리고서 거기에 살아 숨쉬던 다양한 생물을 다 죽여버린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경쟁상대가 사라진 것을 웬 떡이냐 하고 호기로 삼는, 살충제에 내성을 보유한 특정 해충이 물 만난 고기처럼 번식을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혹은, 인체 표면에 붙어있는 무해한 상재균을 살충제로 뿌리뽑으려 들면, 이때다 싶어 경쟁에서 해방된 병원균이 정착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수돗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지하수에 존재하는 유익한 미생물까지 죽여버리면 결과적으로 인간의 건강에 유해한 균이 증식해 버린다는 아이러니한 현상 또한 보고되었습니다.
이렇듯, 우리 몸 주위에 있는 생물의 절대다수가 무해함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불결’하고 ‘불순’한 것으로 취급해 배제하려 함으로써, 우리는 무의식 간에 정말로 우리에게 유해한 생물이 독주하게 만드는 환경을 조성해버리는 것입니다. 내친 김에 더 말해보면, 인간이 아무리 완벽하게 통제된 환경에 있더라도 결국 면역계의 정상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서, 알러지라든가 만성 염증 질환에 걸리기 쉽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습니다.
공격을 하면 할수록, 상대는 진화 속도를 높여 저항성을 띠게 되고, 결국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게 됩니다. 항생물질이 무력화되는 약제 내성균이나, 온갖 살충제를 극복해낸 ‘독일바퀴벌레’ 와의 전쟁은, 이렇듯 의연한 사실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택은 이미 지구상 가장 진화 속도가 빠른 장소 중 하나로 변모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나치 정권이 유대인을 배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광범한 ‘적’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구도와 정말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인간 중심주의’라는 또 하나의 순수주의가 우리의 건강과 생활환경을 오히려 취약하고 비위생적인 성질의 것으로 몰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미국제일주의’와 ‘일본 퍼스트’라는 이름의 순수주의
위에서 언급한 ‘순수주의’라는 이름의 병은 현대 정치판에도 역시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미국제일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이라든가, 한편 일본의 경우 ‘일본 퍼스트’를 표방하는 참정당 같은 세력의 대두는 그 상징적인 현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놀랄 정도로 단순한 구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원래의 위대함을 잃어버린 건 나라 안에 있는 혹은 나라 밖에서 유입된 「불순물」 때문이다’라는 서사입니다. 트럼프에게 그 불순물은 멕시코에서 들어오는 이민, 중국산 제품이기도 하고, 국제 협력을 제창해 온 세계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건 마치 능구렁이 같은 셰프가 왜 자기 요리는 맛이 없는지 항변하기를 몰래 주방에 섞여든 외국산 향신료 때문이라고 목에 핏대를 올리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복잡한 경제 문제나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부터 시선을 피하고, 모든 책임을 특정한 ‘불순물’에 억지로 떠넘김으로써, 그들은 사람들에게 속 편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합니다.
일본 참정당이 내거는 주장 역시 이런 순수주의의 계보를 따릅니다. 그들은 2차 대전 이후 일본이 본래의 생기를 잃은 까닭은 국제 자본과 특정 외국 세력, 혹은 일본 국내에 암약하는 ‘반일적인’ 세력이라는 ‘불순물’에 오염되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리고 이런 ‘불순물’을 베제하고서, 첨가물이 일절 없는 유기농 채소를 먹는 것과 같이, ‘본래의 「아름다운 일본」*을 되찾자는 주장을 일삼고 있습니다.
(* 故 아베 신조 씨 정치 세력이 유행시킨 표현이기도 하다. 美しい国、日本 – 옮긴이)
하지만 애당초 ‘본래의 아름다운 일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 선생은 저서 『일본 변경론』 내용을 통해 이런 종류의 순수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자기모순을 갈파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애초에 ‘일본’이라는 공동체(집합)은 그 내부에 무언가 고유하고 순수한 본질이 있다는 전제 하에 정의되는 게 아니라, 항상 ‘외부’ (비일본적인 것)과의 경계선 확정에 따라 그 윤곽을 가까스로 형성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일본 사람’이라는 의식은, ‘우리가 아닌 그 무언가’를 외부에 설정해 둠으로써 사후적으로 성립하는 환상인 셈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순수주의자들의 행동거지가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바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불순물’을 배제하여 ‘순수한 일본’을 현출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자신의 윤곽을 규정해주고 있는 경계선 그 자체를 지워 없애는 행위나 다를 바 없습니다. 외부를 지워 없애면 내부 또한 소멸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잘라내려고 자신의 신체를 썰어버리는 것마냥 웃기고도 슬픈 자해행위입니다. 살아 있는 세포가 세포막을 통해 외부와 물질을 교환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같이 건전한 문화나 국가도 또한 이질적 성격의 문물 및 사람과 쉴 새 없이 교류하고 때로는 긴장관계를 가짐으로써, 그 활력을 본질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밀폐되어 외부의 교류를 끊어낸 ‘순수한’ 세포가 죽은 세포인 거나 마찬가지인 이치로, ‘순수한’ 국가도 역시 죽은 국가입니다.
그들이 몽상에 취해 있는 ‘순수한 일본’이란 역사상 한 번도 존재하지 않은 만들어낸 천국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집안의 20만종 되는 미생물을 모조리 내쫓아 무균의 이상향을 만들려는 의도와 똑같이, 비현실적이며 또한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들은 백신이라든가 식품의 안전을 거들먹거리며 사람들의 내면 깊은 불안을 솜씨 좋게 끄집어내서는,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움직이는 불순한 세력’ 이라는 장대한 음모론을 갖다댑니다. 이는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처칠과 스탈린 모두 유대인의 끄나풀’이라고 보다 광범한 음모론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나치의 모습과 소름 끼칠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순수주의는 그들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항상 새로운 ‘불순물’과 ‘적’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다양성 속에 오히려 넉넉함이 깃든다
우리는 지금 다시 한번 국제우주정거장의 냄새를 떠올려봐야 하겠습니다. 순수함을 추구한 결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균 낙원이 아니라 치우친 미생물이 발하는 불쾌한 냄새로 충만한, 숨막히는 폐쇄공간이었지요.
순수주의는 우리 마음에 언뜻 쏙 드는 이데올로기입니다. 복잡하고 귀찮으며 때때로 모순에 가득찬 세상을 ‘선과 악’, ‘순수와 불순’이라는 단순한 이항대립으로 분절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야말로 사고정지와 배타성, 그리고 폭력으로 나아가게 하는 관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집 안에서 다종다양한 미생물과의 공존을 통해 더욱 건강하고 안정된 생태계를 지킬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사회도 또한 다양한 가치관, 문화, 유래를 가진 사람들 이른바 ‘불순물’이 혼재함으로써 그 넉넉함과 강인함이 담보될 수 있습니다.
지금 제 눈 앞에는 일광 바닷가가 펼쳐져 있습니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여름 바람은 은은한 바다 냄새를 실어다 줍니다. 막 청소기를 돌린 바닥에는 그럼에도,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으며, 방 한구석에는 먼지가 쌓여 있습니다. 제가 있는 방은 우주정거장에 비하면 틀림없이 ‘불결’한 장소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제 신체가 발하는 균의 수를 압도할 정도의 다양한 생물체가 존재하고 있거니와, 창밖의 곤충들이나 현관에 남아 있는 모래알을 보듯, 방 안의 공기는 우주정거장보다도 훨씬 생동감 있고 쾌적하게 느껴집니다.
‘미국제일주의’나 ‘일본 퍼스트’나 결국 매한가지로, 자신을 순수한 피해자로 자리매김하고, 세상의 복잡함으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한, 감미로운 자기연민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 강하다는 건, 자신 안에 있는 ‘불순물’을 껴안고서, 모순과 갈등을 받아들이며, 그럼에도 타자와 서로 공존해 가는 지혜와 용기 속에 깃드는 게 아닐까요? 지금이야말로 용약하는 순수주의라는 이름의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에 몸을 싣기 전에, 우리는 자기 운신의 폭을 넓히고, 넉넉하면서도 조금은 때가 탄 그런 생명의 다양성에, 다시 한번 시선을 주어야 할 때입니다.
(2025-08-21 12:33)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용기론』 『목표는 천하무적』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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