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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먼의 재탄생 — 홀로 선 뜰에서 시작하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6. 1. 6. 17:40

    <커먼의 재생> 한국어 번역이 나온다. 옮긴이 박동섭 선생이 역자후기를 써주었다. 박선생 언제나 고맙습니다.

     

     

    스승 우치다 다쓰루의 중요한 저작 <커먼의 재생> 한국어 번역을 마치고서 지금 감개무량하여 옮긴이 후기를 쓰러 키보드 앞에 앉아있다. 번역이라는 작업은 단순히 언어를 바꾸는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저자가 갖고 있는 사고의 숨결에 귀를 기울여, 그 사상이 태어난 흙의 냄새를 맡고, 그 언어가 과연 미래의 누가 받아볼지를, 자신의 신체를 통해 감득하는 여행이다. 이 여행을 통해, 나는 이 책이 현대 사회 통찰과 관련된 긴 사정거리, 그 근저에 흐르는 절실한 바람을 담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통감하게 되었다.

     

    이 책의 핵심적인 주제는, 제목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코먼(=공공적 성격의 것)’의 존재의의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잃어가는 현대에 다시금 어떻게재생할 것인가, 하는 점에 있다. 읽어나가는 동안에,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사항은, ‘그럼 그 재생은 도대체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었다. 제도인가, 교육인가, 정치운동인가? 이 모든 게 중요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이 질문에 천착해보면, 좀 더 근원적인, 한 사람의 인간이 가진자세와 같은 것에 귀착하는 게 아닐까. 이러한 생각은 나 자신의 소박한 연구자로서의 이력과 결코 불가분의 것이 될 수 없다.

     

    이 후기에서는 이 책의 번역자로서 또한 한국의 해변 도시 일광의 아파트에서 거의 나가지 않는 한 사람의길거리의 심리학자로서, 내가 매일 느끼고 있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그것은 이 책의 주제인공공성의 회복새로운 공공성의 창조가 사실 가장 홀로 선, 개인적인 장소에서 시작한다는 역설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도를 만드는 건축가와, 잃어버린 공공성

     

    오늘날 지의 세계, 특히 대학이나 연구기관같이 제도화된 아카데미즘은 일종의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처럼 적어도 필자에게는 보인. 말인 즉, 원래대로라면코먼으로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공재여야 할 지가, 일부 인간의 출세를 위한사유재로 변모해 버렸다는 위기이다. 이 상황을 나는지도를 만드는 건축가라는 비유로 파악한다.

     

    많은 주류 연구자들은 이른바지도 제작자이며, 동시에건축가로서의 역할을 기대받고 있다. 그들의 연구대상인 인간의 마음이나 사회란 자신들의 바깥쪽 저기 어딘가에 펼쳐진 객관적인 영역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의 사명은 통계라는 이름의 계량기구를 구사하여 그 영역을 정확히 측정하고 나서 누가 보더라도 히해할 수 있는 정밀한 지도를 그려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도를 바탕으로 선행 연구라는 이름의 도시 계획 가운데 새로운 건물을 하나 건설하는 것이다.

     

    그들이 쓰는 논문은 엄격한 심사라는 이름의 건축기본법을 통과하고, 학회라는 이름의 시의회로부터 승인을 얻어야만 한다. 그 건물은 탄탄하고 기능적이며, 도시의 경관을 해치지 않을 것이 요구된다. 이는 학문의 체계성을 유지하고 지를 착실히 쌓아 나간다는 차원에서 불가결한 작업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들 건축가가 세운 무수한 아성 위에서 안심하며 살아가며 사고할 수 있다는 듯이 처신한다.

     

    하지만 이 시스템 내부에서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연구는 본래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하는작업이어야 하건만, ‘이미 존재하는 평가 기준을 통과하기 위한일종의 게임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지의 공공성은 서서히 사라지고, 연구자들은 고고한 사상가가 되기보다도, 유행하는 이론과 수법을 능숙히 사용하여 해내는 관료일 것이 요구된다. 그 결과, 태어나게 된,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에서 괴리되고 전문가끼리만 통용되는 폐쇄적인 전문용어(jargon) 로 점철되어 가고 있다.

     

    이는 참말로 우치다 선생이 이 책에서 경종을 울린코먼의 상실의 일례가 되는 풍경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지의 공공성이 줄어들고, 학문은 진리를 탐구하는 마당에서 논문이라는 이름의 업적을 쌓기 위한 공장으로 변모했다. 그러한 가운데, 개개의 연구자는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바퀴가 되어, 자신의 언어로 말할 절실한 동기를 잃어간다. 지는 우리의 생활을 풍성하게 경작하기 위한 공유지(코먼즈)이기를 그만두고서, 교수 자신의 이익을 위한 사유지가 되었다. 이 황량한 풍경이야말로 우리가공공성의 회복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돌아보아야 할 출발점인 것이다.

     

     

    정원사의 홀로서기와 공공성의 회복

     

    그럼 공공성의 회복은 어디부터 시작하면 될까? 나는 그 첫걸음으로써 제도화된 광장에서가 아니라 사람의 인간이 자신의 삶과 마주하여 홀로 선 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나 자신을 지도를 그리는 건축가가 아니라 뜰을 가꾸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나의 연구 영역은 저기 어딘가에 있는 미지의 대륙이 아니다. 지금 여기 즉 나 자신이 살고 있는 일상, 이 신체, 이 집의 한칸 방안이라는 보잘것없는 뜰인 것이다. 내가 할일은 이 뜰을 구석구석 걷고 흙의 냄새를 맡고 바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작은 새싹이 난 것에 놀라는 것이다. 나는 연구 대상의 바깥에 처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 이 뜰을 구성하는 한 그루의 나무이며 흙에 묻혀 있는 미생물인 것이다.

     

    이를 테면 교실에서 발표를 못하는 학생이라는 주제와 조우했을 때, 정원사인 나는 우선 내면의 뜰을 깊이 더듬는다. 통계 데이터를 모으기 전에, 나 자신의 신체가 기억하고 있는 발표 못 했던 순간의 감촉을 흙 속에서 파내어 보려고 한다. 목구멍이 막히는 것만 같은 긴장감. 불규칙한 심장 박동.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무수한 목소리. 이렇듯,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신체적인 실감 그것이, 내가 연구할 적에 비로소, 그리고 가장 신뢰하는 데이터가 된다.

     

    이렇듯 생생하고도 실감나는 경험에서 출발하여 나는 비로소 바로 앞에 자리한 학생의 침묵 너머 내면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상상할 수가 있다. 내가 찾으려는 건 보편적인 법칙 같은 게 아니다. 이 학생의 침묵이 담지하는 유일무이한 질감, 색조, 그리고 영혼의 떨림이다. 이것은 지도에 새겨진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오히려 한 편의 시를 읊는 것과 같이, 이 학생의 무한한 경험에 대해 기술할 따름이다. 정원사의 작업이란 식물을 분류해 표본으로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 개체 하나 하나가, 하나의 정원에서 얼마나 뿌리를 뻗고, 양광을 바라며, 흔들리고 있는가를, 애정 깊이 말하는 것에 다름없다.

     

    이 책의 핵심적인 주제인 공공성의 회복은 참으로 홀로 선 정원사의 작업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한다. 잃어버린 공공성을 한탄하고 제도개혁에 열을 올리기 전에 우선 해야될 일 말이다.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경험해 가꾼 뜰을, 착실하게 주의를 기울여 돌볼 것. 추상적인 정론이나 남의 말이 아닌, 자신의 신체 감각에 뿌리박은, 절실한 말을 찾아내는 것. 이렇듯 고독한 작업이야말로, 지력을 잃은 지의 토양에, 다시금 생명력을 되돌리기 위한, 유일한 길이리라 필자는 믿는다.

     

     

    첫 발자취 그리고 새로운 공공성의 창조

     

    하지만 뜰을 일구어내는 것만으로는 고작 개인적인 사색 소위 사념에 그치고 만다. 언뜻 보면 이런데도 어떻게 공공성을 획득할 것인가. 바로 이 문제의식에 이 책이 말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 새로운 공공성의 창조에 이르는 이로가 숨겨져 있다.

     

    필자는 제 스스로 이르기를 아직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은 숲에 첫 발자취를 남기는작업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 필자가 따로 쓰는 문장들은 사실 완성된 건축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필자의 문장은 다름이 아니라, 나중에 등장할지도 모르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연구자를 위해, 필자가 남겨놓은 소소한 이정표인 셈이다.

     

    여기에 한때 필자라는 인간이 섰었다. 그리고 이렇게 울창한 숲에 나아갈 적에 무언가, 마음이 가는 게 있단 걸 느꼈다. 이 방향으로 가는게 옳은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자네도 이 숲의 고요함과 저 깊숙한 데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마음이 동했다면, 내가 남긴 이 서툰 발자취를 길잡이 삼아 한 걸음씩 걸어 보지 않을텐가.’

     

    이렇듯 불분명하고 개인적이며 홀로 선 호소. 이야말로, 사적인 경험이 공공성을 획득하는 기적적인 첫 순간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의 스승 우치다 다쓰루가 제창한 바 있는, 본서의 의논과도 깊이 공명하는 사상가와 이데올로그 사이의 차이라는 개념을 거론해 보자. 무릇 사상을 논하는 자는 이런 내용을 말하는 사람이 일단 나밖에 없으며, 설혹 이를 그친다면, 나의 존재와 함께 이 사상은 사라진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사상의 공공성을 담보하는 것은 홀로 서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우치다 타츠루의 지견이다.

     

    정성을 다하는 정원사이자, 첫발걸음을 내딛는 용기 있는 자의 사고방식은 우선 홀로 서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필자가 자택의 방 안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 이것들을 말하기를 그만둔다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사정이 이렇기에, 한 마디 한 마디를 갈고 닦아, 죽을 힘을 다해 텍스트를 자아내는 것이다. 이 절실함이 있음으로 해서, 끝끝내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아, 필자의 생각이 사념이기를 그치고 공공성을 획득한다 하는 그런 유일한 길이 된다는 것을 믿기에.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데올로그는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인간이 부지기수이며, 내가 설령 그만 말한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대신해서 말해줄 것이라 여긴다. 이런 압도적 다수를 상정한 근거 없는 신빙, 제도화된 학문 세계에 도사리고 있는 그림자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발언의 발로를 절실함이 아닌 소속 집단의 정당함으로 삼는다.

     

    여기에, ‘새로운 공공의 창조가 간직한 비밀이 있다. 그것은, 거대한 조직이나 제도 따위가 하향식으로 설계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홀로 선 정원사가, 실존적 고독을 걸고서, 숲속에 발자국 하나를 남겨놓는 데서 비롯한다. 그리고 그 발자취를 다른 장소에서 고독하게 뜰을 가꾸고 있었던 누군가가 목도하고서, ‘아 여기에 동지가 있었구나하고, 이제는 자기가 스스로 다음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 소리 없는 공진(共振), 각기 홀로 섰던 목소리와 목소리가 서로 울리는 자리에, 온갖 제 시스템과는 전혀 동떨어진, 새로운 공공성이 창조되는 셈이다.

     

    연구의 본질은, ‘기성의 잣대에 따라 평가받는것이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가짐만 갖추고 있다면, 앞으로는 무엇을 써야 할지 스스로 깨닫게 된다. 내가 왜 이 주제에 이렇게 홀렸는가, 그 필연성을, 전문가들끼리 하는 게 아니라 일반인에게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말로, 자신의 뜰에서 거둔 말보따리에서 시작하는 것. 그것 말고 참된 연구의 길은 없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 ‘새로운 보통을 위해

     

    이 책 코먼의 재생을 한국의 독자에게 선보이겠다는 번역자의 작업도 또한, 아무리 미력할지라도, 이러한 발자국을 남기려는 하나의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우치다 선생님이 일본이라는 토양에서 씨를 뿌리고 길러 거두어 올린 텍스트를, 한국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뜰에 옮겨 심는 셈이다. 이러한 말과 글이 이국의 풍토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울지 지금으로서는 번역자 역시도 전도가 요원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한국에 있는 독자 하나하나의 내면 속 뜰에 자그마한 파문을 일으킬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단순히 제도권에서 벗어난 차원을 넘어서서, 지의 본래 방향성을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 홀로서기를 자처한 사람들이 지금, 소리 없이 그러나 확실히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필자처럼 길 위의 심리학자’, ‘동네 사회학자(실제로 이렇게 자칭하는 벗이 있다)’, ‘독립연구자’. 그들의 존재가 당연시되는 것, 그것이 내가 꿈꾸는 새로운 보통[new normal]’이다. 무릇 연구란, 화려한 직함이나 윤택한 예산이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결같이 자신의 뜰을 묵묵히 가꾸어 나가는, 그런 절실한 마음가짐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는 세상. 논문 발표건수가 아니라, 그 텍스트가 얼마나 깊으며, 또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장래의 누군가에게 지적 흥분을 휘몰아치게 할 것인가, 그 가치를 알아주는 세상.

     

    그날이 오면, 학문은 다시금 제도의 벽을 뛰어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과 접속될 것이다. 또한, 방구석에서 발하는 홀로 된 목소리가, 결국 사회의 코먼을 비옥케 할 것이다. 그렇게 소박하면서도 분명한 희망을, 이 책은 우리를 향해 제시하고 있다. 그러한 희망을 믿고, 필자는 오늘도 안락의자에 앉아 세상을 줄곧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2025 8 17일 부산 일광신도시 해변에서

    옮긴이 박동섭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합기도 개풍관 관장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용기론』 『목표는 천하무적』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