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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브룩스 <보보스>인용 2019. 8. 10. 19:01
* 그들은 16세부터 24세까지의 중요한 청춘 시절을 윗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 애쓰며 보냈다. 다른 아이들은 그 시기에 반항을 하거나 소외감을 느끼거나, 또는 그냥 자신의 특성을 모색하며 보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뉴욕 타임즈”의 웨딩 섹션을 장식하는 이들은 호르몬 충동을 통제하여 교사들을 감명시키며 청년기를 보냈다. 다양한 과외 및 봉사 활동을 했고, 우리 사회가 10대들에게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했던 것이다. 우리가 입학 심사관이라면 그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입학 심사관들도 그들을 좋아해서 적절한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시켜 사회 생활을 준비하게 했다.
* 넓은 부엌에 튼튼한 집기들을 갖춘다는 것은 스스로 요리를 함으로써 일상적인 삶의 까다로운 현실을 공유한다는 의사 표시이다. 간디와 카를 마르크스가 바로 그렇게 하라고 권하지 않았는가.
* 다시 말하면, 기업들이 직원들에게 개발시키려는 능력은 고전 시대에 ‘메티스(metis)’로 알려져 있던 것이다. … 그것은 실천적인 지식이나 수완, 혹은 육감적인 능력 같은 것이다. …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즉흥적으로 순발력을 발휘하는 능력 …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적 및 인간적 환경에 대응하는 여러 가지 실천적 기술과 후천적 지능.
메티스를 얻으려면,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심으로 보아야 한다. 자세하게 관찰해서 사물의 실제적인 현상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과정에 대한, 사물의 상호 관계에 대한 감각을 길러야 한다. 메티스를 습득하는 사람은 이론이나 상상이 아닌 행동으로 배워야 한다.
* 그것은 사물의 흐름에 대한 인식, 어떤 것들이 어울릴 수 있고 어떤 것들이 어울릴 수 없는지, 예상밖의 상황이 벌어질 때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 정말로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사야 벌린은 고전적인 에세이 <호저와 여우>에서 메티스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것은 과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우연히 있게 된 상황의 우여곡절을 인지하는 특별한 감각이다. 그것은 무언가 영구적인 조건이나 바꿀 수 없는 혹은 완전하게 설명하거나 계산할 수 없는 요인에 집착하지 않고 살아가는 능력이다.” 이와 같은 지식은 지속적인 순발력, 일종의 현명한 적응력으로 구성된다. 보편적인 해법을 거부하는 메티스의 예찬자들은 제인 제이콥스와 그 후의 모든 보보들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표현을 차용하여 말하자면, 접근법들의 다양성을 환영한다.
* 이것은 보보 자본주의를 정확하게 짚은 글이다. 대학, 배움, 성장, 여행, 오르기, 자기 발견. 그 모든 것들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글에는 도처에 ‘나’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이 짧은 글이 온통 ‘나’투성이이다. ‘조직 인간’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와이트가 묘사한 사회적 에토스는 ‘집단’을 가장 우선시했다. 현재의 에토스는 ‘나’를 가장 우선시한다.
그리하여 일은 평생 직업이 되고 천직이 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근로자들은 예술가나 활동가처럼 생각할 때 회사를 위해서 가장 열심히 일한다. 1960년대에 대부분의 사회 이론가들은 우리가 부자가 될수록 더 적게 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이 일종의 자기 표현 내지 사회적 사명이 되면, 당신은 절대로 멈추려 하지 않는다. 당신은 배우고, 자라고, 더 살아 있는 느낌을 갖기 위해 쉴새없이 일하고 싶어한다. 세련된 신사가 되기를 꿈꾸는 중역들은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는 중역들은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기업들은 보보들이 그들 자신의 영적인 자아와 지적인 계발을 위해 일을 한다고 생각할 때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리 클로우(Lee Clow)는 광고 회사 TBWA의 회장이다. 그는 수십 년 전이라면 파업이 일어났을 만한 과중한 업무를 직원들에게 기대한다. 이제는 그런 것이 바람직한 풍토가 되었다. “우리 회사에서는 주말이라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는 몇 년 전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그렇게 얘기했다. “때로 나는 직원들에게 무슨 말을 하길래 그들이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창의적인 직원들은 우리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곳에 기회가 있음을 잘 알고 있어요. 우리의 일터는 자극을 받는 장소, 재미를 얻는 장소, 상호 작용을 하는 장소, 그리고 사회적인 장소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그렇다. 이 곳을 감히 ‘닭장(sweatshop)’이라고 부르지 말라. 이 곳은 ‘놀이통(sandbox)’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이것은 놀이이다!
* 혹시 칼라에 단추를 채우지 않거나 책상을 단정하게 정돈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스스로에 대한 규제가 대단하다. 교육받은 계층의 구성원들은 종종 일을 자기 존재의 외적인 표현으로 본다. 그래서 그들은 당연히 엄청난 열정으로 일에 임한다. 대부분 일하지 않는 때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늘 생각을 한다.
* 그들은 다른 것은 안 믿을지 몰라도 자기 몸을 망치지는 말아야 한다는 신념만큼은 확고하다. 그래서 그들은 음주나 마약, 그리고 방탕한 생활을 멀리 한다. … 그들은 조깅이나 사이클링 같은 자기 규제적인 활동을 선호한다. 운동을 함으로써 여가 시간조차도 자기 규제적인 활동으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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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 시대의 핵심적인 특성은 정보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결합시킨다는 점이다. 정보 시대는 마음의 산물을 시장의 제품으로 바꾸고 있다.
* 젊은 지식인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자본을 투자해서 최대한의 ‘수익’을 올릴 것인지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적으로 상승하는 전략을 수립해야만 할 것이다. 즉 누구에게 아부를 해야 하는지, 누구를 비판하고 밟아야 하는지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 스탕달은 이런 말을 했다. “사회에 진출하는 젊은이의 첫사랑은 대개 야망에 대한 사랑이다.”
* 과격한 지식인은 지지자들이 좋아하는 것만 말함으로써 자신의 경력을 쌓을 수 없다. 과격파 지식인은 자신의 반대자들이 미워하는 것을 말하거나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지지자들의 비위만 맞춘다면, 큰 성공을 거둘 수 없다. 반면에 반대자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면, 그 때는 지지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그의 편을 들게 된다.
* 일단 편집자가 기고문을 써 보라고 허락하면, 우리의 젊은 지식인은 네 시간만에 다 써야 할 것이다. 에드먼드 윌슨처럼 헛기침을 할 짬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타일을 본딴 글을 구상해야 한다. 글의 처음 두 단락은 대성당의 전면처럼 휘황찬란하면서도 포괄적이어야 한다. 다음 몇 단락은 성당의 후방으로 걸어 내려가는 듯해야 한다. 즉 예상 가능한 절정을 향해 곧장 나아가면서도 측면의 여러 흥미있는 예배당 건물들에도 눈길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끝으로 마지막 단락은 모든 방향으로 가볍게 돌출된 수랑(袖廊)에 도착한 듯해야 한다. 이와 함께 저널리스트 마이클 킨슬리(Michael Kinsley)가 충고했듯이, 세미콜론 부호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잘난 체한다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기고문에는 또한 나름대로 자서전적인 내용도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독자들이 더 관심있게 읽게 된다. … 가장 큰 관심을 얻으려면, 기고문이 틀려야 한다. 논리적인 글은 읽고 이해받을 수 있다. 하지만 비논리적이거나 틀린 글은 다른 저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대응하도록 자극한다.
* 우리의 지식인은 성공을 거두면 칼럼을 제의받을 것이다. 드디어 정점에 올랐다고나 할까. 그럴 수도 있지만, 칼럼을 써서 돈과 명성을 얻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아도 실은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노예처럼 칼럼을 쓰고 있다. 그들은 서커스의 동물들처럼 일주일에 한두번은 꼭 사람들을 즐겁게 해야 한다. 이 방면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한 가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즉 그들 자신의 마음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잘 알며, 자신들의 판단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것은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지적해 주기 전에는 자기 자신의 의견이 어떠한지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럼니스트는 뇌수술에 관한 기사를 20분 정도만 읽어도 즉시 달려가 뇌수술 전문의들의 모임에서 그들이 하는 일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강연을 할 수 있다.
* 책으로 성공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요소(그 책을 선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 외에도 저자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출판사, 제목, 그리고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하나의 문구이다. … 책으로 성공하려는 지식인들은 토크쇼 진행자들이 쇼를 진행하기 직전 몇 초만에 훑어보고 대담을 나누는 데 써먹을 멋진 문구를 만들어 놓고 있어야 한다. 교육받은 청중에게 그 문구는 지적이면서도 역설적인 듯이 들려야 하고, 또한 보보들의 반대되는 것들을 조화시키려는 욕구에도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 학계나 전문직 단체들에서 내놓는 소식지를 보면, 서너 명의 사람들이 포도주 잔이나 커피 잔을 들고 즐겁게 반원을 그리며 서 있는 모습을 찍은 흑백사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지식인들이 잡담을 하다가 찍은 사진이다. 그들은 일과 놀이를 맛있게 결합시켜 놓은 활동을 즐기고 있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보보 계층의 전형적인 조화이다.
* <전쟁과 평화>나 <존재와 무>같은 걸작을 쓰기만 하면 지적 거인이 될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이제는 TV에 나가 바버라 월터스(Barbara Walters)나 캐티 쿠어릭(Katie Couric) 앞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선전할 수 있어야 한다. …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TV프로듀서의 관심을 끌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들 섭외자들은 까다로운 광고주들의 요구와 시청자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남성 실직자들의 취향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 반어법이나 냉소주의는 TV에서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식인은 이제까지 살면서 이 순간처럼 좋은 시간을 보낸 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TV는 우리의 지식인을 쇼 비즈니스라는 마술로 인도한다.
* 이와 같은 부류의 지위-소득 불균형 환자는 집에서 자신의 가난을 만끽하려 한다. 그는 자신이 이웃과 어울릴 수 있는 동네에서 산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위네트카나 파크 애비뉴같은 부자 동네에서 살 여유가 없는 것이다. 특히 그는 재정적 보상이 크지 않은 직업에 몸담고 있는 것을, 자신의 삶을 돈벌기에만 열중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정작 자신이 가령 투자 은행가가 되는 데 필요한 계량적 기술이 부족하고, 지루한 일에 집중하는 능력이 모자라서 변호사의 길을 가지 못했다는 사실은 무시한다. 그에게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분야에 진출할 좋은 기회가 한번도 없었으며, 따라서 일부러 자신을 희생시킨 적도 전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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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보보들은 노력과 성공이라는 부르주아의 가치를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려는 보헤미안의 충동과 결합시켰다. 그 결과는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유용한 즐거움을 권장하고, 그렇지 않은 즐거움을 억제하는 일련의 사회적 규제들이다. 이렇게 해서 ‘신교도 근로 윤리(Protestant Work Ethic)’는 ‘보보 놀이 윤리(Bobo Play Ethic)’로 대체되었는데, 후자의 윤리도 전자의 윤리만큼이나 규제적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자기 계발과 발전이라는 삶의 소명에 부합해야만 한다.
* 하지만 보보들에게는 일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일은 도전적이고 흥미롭다. 그러므로 그들이 일과 놀이를 결합시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보보들은 결합과 조화의 명수들이다. 그런 만큼 그들이 업무와 즐거움을 분명하게 구분짓지 않는 것도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일은 더 즐겁게 하고, 즐거움은 더 부드럽게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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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몬태나의 정신이 무언가 가시적인 것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 그것은 땅과 사람의 연결 관계는 합리성이나 선택보다 훨씬 더 깊다는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같은 연대감은 여러 해, 나아가 여러 세대 동안의 노고를 통해 힘들게 얻어지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플렉시독시’라는 말은 적절하다. 그것은 몬태나의 영적인 윤리가 갖는 혼합적 특성을 잘 나타낸다. 그것은 ‘탄력성(flexibility)’과 자유로움으로 시작되며, 권위를 배척하고 자율적으로 살겠다는 욕망을 곁들인다. 하지만 그것은 또 두 번째의 반대되는 충동, 즉 ‘정통성(orthodoxy)’을 지향하는 충동도 나타낸다. 다시 말해, 가시적인 현실, 엄격한 규칙, 그리고 합리성과 선택보다 더 깊은 곳에 뿌리를 두는 결합적인 연결성 안에서 영적인 삶의 뿌리를 내리려는 욕망이다.
* Robert Bellah et al., Habits of the Heart (1985)
“우리는 교육받은 미국인들의 ‘자아’에 대한 생각, 우리의 대학들과 상당수의 중상층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지배적이 된 그 생각이 부적절한 사회과학, 빈약한 철학, 그리고 공허한 신학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가 과격한 개인주의의 언어를 사용할 때 보지 못하는 진실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제도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절대로 혼자서 자아를 발견할 수 없다. 우리는 일과 사랑, 그리고 배움에서 남들과 얼굴을 맞대고 나란히 걸을 때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제도적인 구조들이 지시하는 관계, 집단, 협의체,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며 그들의 해석을 받는다.
* Francis Fukuyama, The Great Disruption (1999)
“경직된 믿음 체계의 부산물로서 공동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욕구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적인 믿음으로 돌아간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종교적인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은 반드시 어떤 종교의 교리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의 부재와 세속적인 세상에서 사회적 연결성의 불안함이 그들에게 의식(ritual)과 문화적 전통에의 갈망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난한 사람이나 이웃 사람들을 돕는 것은 종교적인 교리가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에 봉사하고 싶은데 종교적인 조직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전통적인 기도를 반복하고 오래된 의식들을 재현하는 것은 하느님의 지시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녀들이 적절한 가치를 갖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그런 것에서 비롯되는 공유된 경험의 감각과 의식의 편안함을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어느 면에서 그들은 종교를 그 자체로 진지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종교는 의식과 행사가 사라진 사회에서 그러한 것의 원천이 되었으며, 그럼으로써 모든 인간의 본성인 사회적 유대감에 대한 자연적 욕망의 합리적 확장이 되었다.”
* Vaclav Havel
“주요 종교들은 기본적인 출발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세상과 우리의 존재는 우연의 장난이 아니라 우리가 그 원천과 방향, 그리고 목적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스러운 행위의 일부라는 믿음이다.”
* Alexis de Tocqueville, Democracy in America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사적인 삶의 사소한 집착들 속에서 야망이 힘과 위대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인간의 열정은 더 온건해지면서, 동시에 더 저속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 사회는 일상적인 측면에서 더 조용해지겠지만, 국가적인 측면에서는 야망을 잃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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