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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행군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9. 21. 14:03
패전 전후 80년이 지났다. 패전의 기억이 멀어짐과 동시에, 패전이 일본에게 안겨준 생생한 지견이 사라지고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사료를 섭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필자에게 떠오르는 건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 나오는 대사 두 개다.
하나는 영화 〈피안화〉에서 사부리 신이 읊조리는 대사다. 아시노 호숫가에서 그의 아내(다나카 기누요)가 말하기를, 전쟁통에 일가족 네 명이서 방공호에 들어가 필사적으로 부둥켜안았던 일을 떠올리고서는 그때를 그리워한다. 그 모습을 남편(사부리 신)이 뿌리치고서, 내뱉는 말이 하나 있다. “나는 그 시절이 가장 지긋지긋했어. 물자도 부족했거니와, 별 시덥잖은 놈들이 뻗대고 다니지를 않나.”
다른 하나는 〈꽁치의 맛〉이다. 왕년의 구축함 함장(류 지슈)가 전쟁을 회고하며 “졌으니 망정이지 참 다행이잖나” 하고 미소짓는다. 그 말을 듣고서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한때의 수병(가토 다이스케)이 “그러세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바보 같은 놈이 설치고 다니지 않는 것만 봐도 말예요. 아이고, 함장님이 그랬단 게 아니고요” 라고 대꾸한다.
아마 이게 전쟁이 끝나고서 15년 정도 지났을 시점의 오즈 야스지로가 품은 솔직한 심정이었으며, 당시 이 영화를 봤던 대부분의 관객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전쟁의 기억만큼은, 오즈가 이해한 바로는, 대기업 월급쟁이든, 구축함 승조원이든 다 똑같다는 것이었다. 전선에서 싸웠던 병사가 되었든 후방의 근로자가 되었든, 전쟁이란 ‘별 같잖은 놈이 나대고 다니던 날들’이라는 점이다.
별볼일 없는 자식이 나라의 키를 잡고, 정책을 세우고, 군략을 모색했으며, 그것을 국민에게 밀어붙였고,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비도한 짓을 저질렀다. ‘상의하달’의 전반적인 층위(level)에서, ‘윗선이 멍청한 놈’이라는 인상을 남겼던 게 전쟁의 실상이다. 그것이 전쟁으로부터 15년 지나, 이런저런 고생을 한 끝에 겨우겨우 일본의 살림살이가 조금 펴진 시점에서 서민이 품었던 전쟁 회상이었던 셈이다.
물론, 이와 같은 ‘서민의 회상’이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거라고 필자가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전시를 살아온 사람들이 그 시대를 회고할 적에, 먼저 떠올리는 게 ‘그 시절은 멍청이들이 날뛰었지’라는 묘하게 생생한 감각이 담긴 발언이라는 점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의 아버지는 메이지 45년에 태어났고, 패전했던 해에 33세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난 해에 중국으로 건너가, 대륙에서 15년을 보낸 셈인데 패전 시점에는, 베이징에서 친일파 중국인을 조직하는 선전 활동에 관여하고 있었다. 전쟁통에 일본인이 중국에서 무엇을 저질렀는지 아버지는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패전 당시 난리통에 그때까지 군대나 민간의 중책을 맡던 인간이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도 너무나 잘 알았다.
필자가 열 살 정도였던 무렵, 아버지가 정색하며 가르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람을 볼 때 외견에 현혹되지 마라. 그 사람이 철학을 가졌는지의 여부를 봐라. 철학을 가지지 않은 인간을 믿어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철학’이라는 단어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에는 현실적인 감각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대충 알았다.
하나는 ‘지위나 학력, 재산과 같이 외형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규범을 가지고서 자신을 다스리는 인간은 믿을 만하다’는 점이었다.
필자는 어렸지만, 근엄한 아버지가 필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전하는 그 가르침을 오랫동안 스스로의 계율로 삼아왔다. 그로부터 수십 년, 사람을 볼 적에, 그 시절 아버지의 가르침을 한시도 잊은 적 없다.
오즈 야스지로 역시 전쟁이란 무엇인가, 군대란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20세 때에 소집되어 1년 뒤에 오장(伍長)으로 제대했다. 33세 때에 한 번 더 소집되어 2년간 중국을 전전하며 중사로 제대했다. 39세 때에는 일본군 공보부 영화반원 신분으로 싱가포르에 파견되었는데 2년 뒤 게서 패전을 맞았다. 군대라는 데가 어떠한 조직이며 전쟁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오즈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경험은 ‘멍청한 자들의 허세’라는 한 구절에 집약되어 있을 것이다.
오즈 야스지로는 전쟁 그 자체를 한 편의 못 만든 ‘연극’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꽁치의 맛〉에 나오는 마지막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류 지슈는 술기운을 빌려 ‘군함행진가’를 이렇게 부른다. “치는 것도 막는 것도 강철함대다… 란 것일까. 떠다니는 요새처럼 든든하도다… 란 것일까.” 하고 내뱉으며 “… 란 것일까” 하는 파열음은 이 노래가 드러내는 서사에 일종의 ‘액자’를 덧댄다.
‘액자’란, ‘여기 안쪽에 있는 것은 그림일 뿐이지 현실이 아니다’ 하는 고지 기능을 이른다. 전에 요로 다케시 선생이 그렇게 가르쳐 주셨다. 유럽 도시 어딜 가나 가장 장려한 건물은 교회와 극장이다. 그 이유를 아느냐고 요로 선생이 물어보셔서 모르겠다고 했더니, “그것들은 일종의 액자야. 그 안에서 나오는 얘기들은 전부 거짓이라는 점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저렇게나 과장되게 지어놓았어.” 란 점을 배울 수 있었다.
류 지슈가 가사의 ‘인용부호’로 덧댄 ‘… 란 것일까’ 라는 파열음은 직업군인으로 살아왔던 그의 전쟁 기억을 송두리째 둘러싼 ‘액자’인 것이다. ‘이 노래는 전부 가짜다’라고 딱 잘라 말하는 ‘… 란 것일까’인 셈이다.
패전 뒤 80년 지난 오늘날, 전쟁을 경험했던 선인들이 남긴 지견 가운데 우리가 거듭 떠올려야 할 사항은, 전쟁이란 한마디로 ‘바보들의 행진’ 같은 상황이며, 전쟁 때에 유독 큰 목소리로 떠드는 내용들은 ‘전부 거짓이다’ 하는 점이다. 그게 거의 다다.
따라서, 만약 전쟁을 시작하려는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날뛰고 싶어하는 멍청이’이며, 그들이 큰 소리로 주장하는 것들은 ‘다 거짓말’이라는 점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상식에 등록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
1950년에 태어난 필자가 기억하는 한,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그것이 ‘시민적 상식’이었다. 하지만 80년대가 되어 전쟁 경험 세대가 사회의 전면에서 차츰 모습을 감추었고, 그들의 말이 매체에서 사라지며, 결국 20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거의 모두가 저 세상 사람이 되었고 보면, 그 ‘상식’도 잊히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을 알고 있는 세대가 죽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비상한 전쟁지도자’ 라든가 ‘진솔한 병사’의 모습을 망상하는 사람들, ‘액자 속의 거짓’에 과몰입하며 떠들어대고 다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전쟁 경험 세대가 봤으면 ‘또라이’라는 한 마디로 일축당했을 무리떼들이, 매체의 총아가 되었으며, 언론의 어떤 기수가 되었고, 종국에는 국정을 논하는 곳의 의석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지하에 있는 전쟁 경험 세대가 이 모습을 본다면 “멍청한 놈들이 두 번 다시 용약하지 않는 세상”을 조금씩 만들어 둘 걸 하고 개탄할 일이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두고 후회해 봤댔자 아무 소용없다. 전쟁 세대가 매듭짓지 못했던 과업은, 몸소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자란 우리 일본의 70대가 이어받을 수밖에 없다. 이 세대조차 이제 후기 고령자가 되어 여론 형성에 관여할 시간이 한참 모자라다. 전쟁 세대가 우리에게 맡아놓은 것은 단적으로 ‘전쟁이란 멍청이들이 미쳐 날뛰는 상황’이라는 언명이다. 그것을 다음 세대의 옷자락을 붙잡고서라도, 끈질기게 전할 수밖에 없다.
(2025-08-09 10:58)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용기론』 『목표는 천하무적』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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