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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를 향한 우치다 다쓰루의 제안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9. 7. 17:09
얼마 전 타국으로 날아가 강연을 했었는데, 한국의 블로거 (1인 서점을 하시는 분)께서 긴 감상문을 써주셨다. 한겨레신문에 강연평이 실린 이래로 이번이 두 번째가 된다. 한국에서 이런 식으로 필자의 생각과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가 될법하다. 강연 내용을 정말로 솜씨 있게 요약해 주셨다. 넓은 아량에 깊이 감사드린다. 원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https://siilbw.com/inspiration/?idx=165108687&bmode=view&fbclid=IwY2xjawLC6bFleHRuA2FlbQIxMABicmlkETFDUTlKd3lpdUZobG10UGRBAR6npr9Vk3bFtoHJw5juuSY7hCquX7AdFAPltlmRmPT6GJ_w8cs4wZeiinbnBg_aem_114y64JYEEkCBu_GAKX4PQ)
사상가이자 무도가인 우치다 다쓰루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온갖 지성적 목마름과 공백을 통찰한다. IVE 매거진과 ‘책방 무사‘, 그리고 ‘도서출판 유유’가 공동으로 기획한 이번 서울 강연은, 단순히 그의 철학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았으며, 한국 사회에 고착되어 있는 삶의 방식이나 존재 방식 등 근본적인 의문을 살펴볼 수 있는 알찬 시간이었다. 마르크스 독해와 무도의 철학, 그리고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성을 통해 내면화 가능한 구도자적인 자세와, 거기에서 생겨나는 자유로움을 그는 일관되게 강조했다.
강연에서 그는 우리에게 지식 습득을 뛰어넘는 삶, 즉 줄기찬 배움과 성찰, 그리고 자기 자신을 비우는 ‘수행‘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이는 경쟁과 성과에 매몰된 현대 한국 사회에 필요한 깊은 성찰과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는 의미와 가치로서도 읽어낼 수 있다.
그는 청중을 향해 일방적으로 말을 건넸으나, 그것이 마치 그와 쉼없이 토의하는 시간 같이 느껴진 이유는, 그의 저작이 전하는 다양한 메시지가 죽은 지식이아니라, 살아 숨쉬는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닐까.
여하튼 이번 시간에는 박동섭이라는, 철학자이자 작가이고 누구보다 우치다 다쓰루의 철학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그의 말로 동시통역이 진행된 덕택이기도할 것이다. 이렇게 의미있는 시간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즐거운 대화의 향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한국과 일본을 넘나드는 지식인의 통찰을 강연에서 여실히 느꼈던 것은 물론, 노년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서 여전히 새로운 배움을 갈망하는 우치다 다쓰루의 싱그러움에 필자는 압도되었다. 이는 틀림없는 청춘과도 같이 보였다.
그의 눈빛과 표정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그의 잔상이, 현장에 오시지 못한 분들을 위해 어떻게든 그의 메시지를 소개하는 문장을 쓰고자 마음먹은 동기가 되었다. 우리가 현상을 통찰하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 그대로의 너머에 있는 ‘깊음‘에 용기를 가지고 뛰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그의 혜안을 살펴보기로 한다.
기획: IVE 매거진, 책방 무사 홍대, 도서출판 유유
일시: 2025년 5월 28일 17:00~19:00
장소: 서울 LG 아트센터 U+ 스테이지
MOVEMENT라는 제목으로 준비된 이번 프로그램은 전체적으로 오후 7시 종료라고 사전 예고되었으나 실제 현장에서 그의 이야기는 7시를 넘겨서까지 이어졌다. 무리하게 시간에 맞추기보다 그는 하고 싶었던 말을 전부 쏟아내는 듯이 (적어도 필자에게는) 보였다. ‘시그널과 노이즈‘라는 키워드로 우치다 다쓰루를 한국으로 불러들인 IVE 코퍼레이션 대표 송주환 씨의 ‘제안’과 ‘설득‘을 필두로 본격적인 토의 세션이 시작되었다. 동시통역을 맡은 박동섭 씨와 마치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이, 독백과 대화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그는 자신의 견해를 담담하면서도 힘있는 어조로 풀어나갔다.
한국 사회가 잃어버린 철학적 기반 ― 현 시대 이해에 빼놓아서는 안 되는 마르크스 독해안
우치다 다쓰루는 ‘마르크스를 읽지 않고서는 19세기 이래의 세계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는 말로 강연의 화두를 제시했다. 마르크스 사상이 19세기와 20세기,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불가결한 자양분이라는 점이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같은 세계사적 격동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통찰이 그 핵심에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 그치지 않으며, 우리가 지금 어떠한 역사적 문맥 가운데 놓여 있는지, 자신이 서 있는 위치와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마르크스 독해가 불가결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마르크스 독해의 ‘공백‘을 통렬히 지적했다. 이 공백은 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철학의 부재, 더 나아가 사상의 뼈대를 신체에 지니지 못하여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우치다 다쓰루의 발언에 따르면 마르크스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 주의자(Marxist)가 아니라 ‘마르크시언(Marxian)’이 되어야만 한다. 전자는 마르크스를 학술적으로 인용하는 반면, 후자는 마르크스를 자신의 삶 가운데 실천하고있기 때문이다.
우치다 다쓰루 자신이 ‘신체를 통과한 언어‘로 마르크스를 말하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한국 독자에게 사랑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해석했다. 난해한 어투 대신에, 일상의 감각에 밀착해 마르크스를 해석하는 그의 방식은 마치 헤르메스처럼 신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전달자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접하고 싶은 마르크스의 표상은, ‘현대 사상의 깊은 숲’에 발을 들여놓고서는 헤매게 만드는 난해한 철학자가 아니다. 굳이 말하면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매일매일의 생활과 땀방울로 번역해낸 사상가를 원한다. 우치다 다쓰루가 폭 넓은 한국 독자층을 얻은 이유 또한 그러한데, 그는 일종의 마르크시언으로서 온갖 지적 이해를 초월해 그가 스스로 살아낸 통찰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에 필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우치다 다쓰루야말로 철학을 죽은 상아탑의 철학으로서 사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론‘으로 변환하여 자기 인생과 문장을 통해 표현하는 인물이기도 하기에 더욱 그러했다.
‘수행’이라는 사유의 뿌리 ― 무도적 철학이 출동해야 할 사회
우치다 다쓰루는 한국 사회가 또 하나 빼먹고 있는 ‘무도적 철학‘을 언급했다. 매우 흥미로운 점은 한국 사회가 이러한 부재를 자각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는 그것을 갈망하고 있다는 그의 통찰이었다. 그는 이러한 결여가 ‘수행’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수행이란, 목적도 종착점도 모른 채, 오로지 스승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묵묵히 걷는 여로를 의미한다. 수행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 뿐이다. 일정표도 없고, 시간을 재는 사람도 없으며, 경쟁 상대도 없다.
아이키도가 되었든 철학이 되었든, 수행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둘 사이의 차이는 없다고 그는 역설했다. 시작하는 동기가 애매하고, 끝이 보이지 않으며, 성과가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 그러한 정진은, 성과 중심 사회 즉 승패에 민감한 시스템, 속도와 효율을 미덕으로 삼는 한국 사회에서는 너무나 낯선 개념처럼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낙관론을 제시했다. 한국 사회가 우치다 다쓰루를 통해 그토록 읽어내고 싶었던 것은, 아마 그게 맞다면, 한국인 자신이 잊고 있던 ‘무도적 사고‘와 ‘자기 형성’의 오랜 감각을 되찾고자 하는 무의식의 발로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무도의 최종 목표인 ‘천하 무적‘이야말로, ‘대오 각성’ 또는 ‘해탈‘이라는 방편으로 설명되는, ‘무한 소실점’을 향한 수행의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초심자는 자기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10년 이상 착실히 정진하고 나서야 비로소 한 걸음을 나아갈 수 있다. 수행의 역설은 진실로 여기에 있는 셈이다.
어떤 동기로 시작했든 간에, 맨 처음 이유는 사라지고, 새로운 목표와 동기가 끊이지 않고 생성되면서 스스로 성장해가는 과정이 수행의 본질이라는 그의 지론은, 성과와 효율에 열중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과정’ 그 자체의 가치와, 지속적인 노력이 갖는 힘을 의미하고 있다.
레비나스 철학과의 만남으로써 비로소 환해진 바람직한 수행과 그 자세
이번 강연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지점은 그가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처음 읽었을 때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그의 제자가 되고 싶었다’는 고백이었다. 더욱이 에마뉘엘 레비나스 철학과의 만남을 통해 직면했던 ‘수행’의 자세에 대해 한층 더 깊은 이야기를 꺼냈다. 말인 즉, 지식의 깊이를 재는 척도가 ‘인간적 성숙’이라는 그의 철학적 입장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그는 ‘연구자’와 ‘제자’의 차이를 명확히 구별했다. 그에 따르면 연구자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프레임에 사상을 끼워넣고서 다루는 사람인데, 제자란 자신의 지식과 정보가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버리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사람, 즉 자신의 프레임을 부수고 타자의 세계에 들어가려는 사람이다. 알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사람, 그것을 기뻐하며 배우려는 사람. 그것이 제자이며, 그 길은 항상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자세와도 일맥상통한다.
이는 단순히 철학에 대한 태도만이 아니다. 온갖 인간관계나 학습, 인생을 마주할 때의 깊은 성찰과도 직결되어 있다. 우리 사회는 ‘뭔가를 모르면 불안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우치다 다쓰루는 그 반대 존재로서 ‘모름을 기꺼워하는 사람’을 제시한다. 이는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려는 참된 학문의 자세를 보여주며,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게 훨씬 많다는 ‘무지의 자각’이 배움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무지의 자각,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철학적 자세
그런 점에서 우치다 다쓰루는 도서관의 역할을 단순히 지식을 과시하는 공간이 아닌, 자신의 무지를 항시 자각시키는 장소라고 힘주어 주장한다. 책을 꽂아두는 행위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정보를 획득했는가를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무지한 존재인가, 얼마나 그릇이 작은인간인가를 ‘가시화해주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무지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 그것이 참된 독서의 자세이며 철학의 태도라고 그는 강조했다.
그는 경쟁사회에서의 왕도가 ‘적을 쓰러뜨리고 그 위에 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참된 자기 형성의 왕도는 ‘경쟁과는 상반되는 수행’이라고 단언했다. 무도는 강약을 묻지 않고, 승패를 묻지 않으며, 상대적 우열을 논하지 않는다. 이기면 이기는 대로 거기에 머물며 성장을 저해하기 때문이라며, 그는 승리의내재적 속성을 언급했다. 따라서 참된 무도란 ‘자유 자재’를 얻는 과정이며, 상대적 우열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자신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는 과정이다. 이는승패에 묶이지 않고서, 오로지 자신을 갈고 닦는 과정의 중요성을 의미하고 있다.
경쟁은 타자를 이김으로써 자기를 만들지만, 수행은 타자와 함께 걸음으로써 자기를 만든다. 그리고 그 걸음은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성숙을 위한행위와 다른 점이 없다. 승패를 묻지 않고 우열을 따지지 않고서, 그저 걸어가는 것 –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사회가 잃어버린 무도가의 철학이며, 우치다다쓰루가 가리키는 대체적 사유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의 강연의 의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한국 사회가 우치다 다쓰루를 통해 흡수하려고 하는 것
“어째서 한국 사람들은 제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요?”
우치다 다쓰루는, 한국 사회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무도적 사고’, 다시 말해 승패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상대적 우열을 따지지 않는 인생을 진심으로 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무언가를 한국에 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원래 한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를 상기시키는 역할을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한국 사회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심층부에서 끌어 올려주는 사람. 그것이 바로 자신의 역할이라고 한다.
그는 마르크스 사상을 자신들 사회의 언어로 혈육화하고, 무도적 사고의 예가 그렇듯 한국인의 심층을 탐사하는 젊은 연구자들, 즉 새로운 마르크시앙들이 한국에도 조만간 나타나리라 믿고 있으며, 그런 새로운 정신과 흐름이 한국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가 ‘외래 문물‘로서의 우치다 철학이 아닌 ‘이미 잠재하고 있는 철학’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 한국인의 아카이브 속, 잠들어 있던 사유의 감각을흔들어 깨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치다 다쓰루를 지금 한국에서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이는 또한 우리 한국인이 염두에 두어야 할 ‘수행의 철학‘이 아닐까.
우치다 다쓰루는 이렇게 말한다. “시대를 바꾸는 새로운 아이디어는 많은 경우 「처음 듣는데도 낯설지 않은」종류의 것입니다. 자기 문화 심층에 잠겨 있던 것을 발견했다는 작용 (혹은 발견했다는 환상) 이 필요합니다. 바깥에서 들어온 최신(brand-new) 사상이 현상을 설명하는 데 착착 들어맞을 수록 사회적 분열을 유발할 위험성(risk)이 있습니다.”
우리 대다수가 더 이상 눈을 돌릴 수 없는 사회의 공백을 메우고, 보다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하여, 필자는 그의 철학이 긴요하다는 점에 공감한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시대, 길을 잃은 독자, 성공이라는 한 방향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에게 우치다 다쓰루는 ‘주유 철학‘을 제시한다. 이것은 성과지향이 아니다. 그리고 합리와 효율만을 숭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정말로 추구해야 될 것은, 그저 끝없는 배움을 향해 정진하는 자세 말고는 달리 없다는 그의 철학은, 철학과 무도의 만남이기도 하거니와, 마치 철학과 인생을 잇는 다리와도 같다.
(2025-06-21 14:14)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용기론』 『목표는 천하무적』 등.
출처: 우치다 다쓰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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