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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먼의 재생』한국어판 들어가며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8. 30. 13:41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다쓰루입니다.
이번에, 『커먼의 재생』한국어판이 간행되었습니다. 이게 분명히 57권째 번역일 겁니다.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지난 달에 한국을 찾아서 강연을 했습니다. 그때 주최측에서 미리 준비하신 주제가 ‘한일 연대’ 였습니다. 이를 기회 삼아 ‘어째서 제 책을 한국에서 많이 찾는 걸까요?’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듣는 분에 따라서는 좀 점잖지 못한 질문입니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인기가 많은가?’ 하는 이야기는 보통 아무도 듣고 싶어하지 않지요). 하지만, 저는 이 논건에 흥미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제 책을 이렇게 정력적으로 번역해 주는 데는 한국 뿐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어로는 『일본 변경론』이나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등 몇 권 번역이 되어있지만, 그리 많은 종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제 책 가운데 외국어 번역이 되어 있는 건, 한국어와 중국어 뿐입니다. 신기한 일이지요. 프랑스어 잡지와 독일어 잡지, 스위스 라디오 방송국 등으로부터 제각기 과거에 한번씩 인터뷰를 받은 적은 있습니다. 서구 언어권에서 취재를 하러 온 건 이게 끝입니다. 영어권에서는 취재도, 원고 청탁도, 번역 제안도 온 적이 전혀 없습니다. 딱 한 번 홍콩의 영자 신문에서 인터뷰 제안이 들어오기는 했는데, 담당자의 태도가 너무나 오만불손해서 제가 중간에 그만뒀습니다.
한국어 번역이 속속 나오는 가운데 이렇듯 ‘영어권에서 받는 조직적인 무시‘에 대해 생각을 좀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래, 물론 단적으로 ‘형편 없으니까’라고 설명하면 충분히 합리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영어권 독자는 일본인이 쓴 ‘상황적인 논고‘에 전혀 관심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야, 무라카미 하루키라든지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문학작품은 끊임없이 영역되고 있으니까요. 문학에 관해서 일본인의 재능은 높이 평가받지만, 상황적인 논점에 대해 일본인이 한 분석은 ‘읽을 가치가 없다’고 영어권에서는 생각하고 있는 게 맞다면, 이러한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경애하는 ‘상황론‘적인 작가로는 반세기 일본에서 요시모토 다카아키, 하니야 유타카, 에토 준, 하시모토 오사무, 가토 노리히로와 같은 이름들이 제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선호가 상당히 치우쳐져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알 수 있지만 이 목록 가운데 영어 번역이 되어있는 건 에토 준의 책 한 권뿐입니다 (『닫혀진 언어공간』). 요시모토 다카아키, 다카하시 오사무, 가토 노리히로 등의 영어 번역은 단 한 권도 없습니다. (요시모토의 경우 『공동환상론』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특정 시기 이후 일본인이 정치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열띠게 토의하고 있는지를 서구 사람들은 알 턱이 없습니다. 영어권 정치학자나 사회학자 책은 결코 ‘일류’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 것도 간혹 일본어 번역이 나오는 판국에, 이러한 비대칭성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입니까.
결국 영어권 사람들은 (주로 ‘미국 사람은‘이 되겠습니다만), 일본의 지식인이 일본 사회와 전 세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만약 의미한다면, 그렇게 해석해도 좋을 겁니다.
일본은 미국의 군사적 속국입니다. 중요한 정책만 따져보죠. 안보, 외교,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해 미국의 허락 없이는 어느 하나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 특별한 ‘허락‘ 같은 것조차 필요 없어요. 어찌됐든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 배려하는 정치가가 아니고서는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없다’고 일본의 정치가는 (여당 뿐만이 아니고, 야당의 일부조차)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국에 충실히 예종하고 있는 나라를 보고서 ‘얘들은 어쩌면 이렇게 비굴할까‘와 같은 생각을 할 정도로 미국 사람들이 한가하지 않습니다. 더욱 생각을 집중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을 터니까요.
그러나, 제가 쓴 책에서 가장 빈번히 언급되고 있는 대상은 미국입니다. 미국의 정치, 미국의 영화, 미국의 음악, 미국의 문학…. 그러한 것들에 대해 저는 대량의 문장을 써왔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논고 가운데서도 미국 관련한 언급이 가장 많을 겁니다. 왜냐하면 ‘미국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는 속국민인 저로서는 비상히 긴급성 높은 논건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사람은 무엇을 ‘욕망’하는가를 찾아내는 것이, 일본의 앞날을 예측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미국 사람 입장에서 ‘일본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일본인은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는 여하한 지적 관심도 환기하지 않는 의문입니다. 물론 경제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일본차의 수입 대수라든가 일본 자본의 미국 기업 인수라든지) 다소간 관심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인은 어떠한 수단을 써서 돈을 벌려고 하는가‘ 하는 의문으로 축감되어 있으며, 그것은 무엇이 되었든 ‘미국인이라도 생각할법한 돈벌이 수단’ 리스트에 이미 등재되어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런 물음은 일본 연구의 동기 유인(incentive)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렇듯 미일 사이에는 지적 관심 사항에 놀랄 만큼 비대칭성이 있습니다. 이와 비교했을 때, 한일 국민이 이웃 나라에 갖는 관심의 정도는 놀랄 만큼 높은 수준(level)에 있습니다.
2024년에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880만 명입니다. 중국 700만 명, 대만 600만 명을 크게 웃돌고 있습니다. 같은 시기 한국을 찾은 일본인은 300만 명입니다. 인구 모수는 일본이 한국의 약 두 배이므로, ‘이웃 나라에 대한 관심의 정도‘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관광객에 한해 계측해 보면 (원래는 이렇게 하면 좋지 않지만), 한국 사람의 일본에 대한 관심은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관심보다 약 6배 (!) 라는 얘기가 됩니다. 놀랍습니다.
이것에 미일관계를 얘기하며 써봤던 도식(scheme)을 적용해 보면, 한국 사람들은 ‘일본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일본인은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절실한 관심을 내비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본은 예전에 반도를 식민지화하고, 격심한 수탈을 행했으며, 조선인의 인권을 짓밟았던 과거를 가진 ‘가해국‘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아직까지 충분한 사죄와 보상을 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 (개중에는 집권 여당의 국회의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은 재일 코리언을 향해 배외주의적 언설을 남발하며,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까지 합니다. 현대 한국인들이 이러한 ‘위험’한 이웃나라에 대해 무관심할 수가 없는 게 당연합니다.
이러한 연고로 일본의 언론인과 지식인들의 ‘한국론‘에 대해서는 상당히 정밀한 연구 조사(research)를 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위험한’ 일본인 사상가의 위험성에 대해 한국에는 충분히 경계심을 품을 만한 역사적 이유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아마 그러한 조사 과정에서,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언론인 (바꿔 말하면, 일본 국내의 식민지주의자, 역사수정주의자와 싸우고 있는 일본의 언론인을 이릅니다)’ 목록(list)에 제 이름이 들어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고베와 오사카를 관할하는 한국 총영사로부터 먼저 연락(contact)이 와서 함께 식사하며 우의를 다진 일이 있었으므로, 그러한 ‘리스트‘가 분명 존재할 겁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의 일본인에 대한 관심은 그러한 ‘경계심‘이나 ‘의구심’ 층위에 한정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일본 전통문화의 오랜 지층에 ‘한반도의 전통문화와 상통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하여, 친근감을 느끼는 사람 또한 있습니다. 도리어, 저는 한반도의 이런저런 문화 가운데에 일본과 통하는 것을 느낍니다 (제주도에서 ‘흰쌀밥과 김치 그리고 고등어조림’을 맛보고 나서 ‘같은 식문화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중화제국의 ‘변경‘이며, 중국 문화의 강한 영향 아래 제각기 고유한 문화를 형성해 온 유교권 국가이므로, 깊은 문화적 ‘친근감’을 느끼는 게 당연합니다.
또 한 가지 일본과 한국을 묶이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안전 보장입니다. 한일은 미국과 동아시아 전략의 ‘최전선‘을 맡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지라 ‘같은 배’에 타고 있습니다. 미중 전쟁이 일어나면 한일 양국은 군사적으로 참여하기를(commitment) 요청 받을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국 내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한 위험성(risk)을 한일 두 나라는 떠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일이 있든 미중 전쟁을 회피할 것이 요구됩니다. 이 안전보장상 최우선 과제를 한일 양국은 공유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함께 억제적으로 처신할 것을 한일 양국은 한마음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한일동맹이야말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안정을 위해 가장 합리적인 해답이라고 믿습니다.
두 나라가 함께 하면 인구 1억 7700만 명, GDP 6조 달러가 됩니다. 이렇게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 경제권이 됩니다. 인종적 동일성 측면에서도, 문화적 친근성 측면에서도, 지정학적 이해 측면에서도, 한국과 일본만큼 ‘공동체‘ 형성에 적합한 정치 단위는 달리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에 관해서는 다소간 고찰이 필요합니다. 양국 내에 메이지 시대 초기부터 아시아의 합종연횡책에 관해 다양한 의논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다가 당초 마음먹은 연대와 우애라는 순수한 뜻을 잃었던 것은 자명합니다. 이렇듯 초기의 논의가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 정당화 논리로 옮아갔었던 과정(process)에 관해서는, 최근에 낸 『일본형 코뮌주의의 옹호와 현창: 곤도 세이쿄 인물과 사상』에 제가 생각하는 바를 썼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전날 ‘한일합방론‘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 가운데 하나로 메이지 시대 당시 대일본제국과 대한제국 사이의 ‘대등한 합방’을 가로막는 군사력 및 경제력 측면에서의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본의 GDP는 620억 달러였고, 대한제국은 추정치 70억 달러였습니다. 열 배 가까운 차이였습니다. 군사력의 차이는 한층 더 컸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상황을 보십시오. GDP는 일본이 4조 달러이고, 한국은 2조 달러입니다. 군사력 순위에서 한국은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에 이은 세계 5위입니다.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를 이어 8위입니다. 민주주의 지수를 살펴보면 일본이 지수 8.48, 세계 16위 ‘완전 민주주의 국가‘, 한국이 지수 7.75로 세계 32위의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가까운 장래에 뒤바뀔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은 통계 지표가 나타내는 한, 국력 차원에서든, 국제사회에서의 지위에 있어서든, 두 나라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그런 가설(scenario)은 존립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21세기의 국제정치를 논할 때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한일 공동체‘ 구상은 충분히 검토할 만한 논건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러한 가능성이 육박해 왔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한일 양국에 일정 수 존재하여, 이 구상을 조금 더 해상도가 높은 비전으로 다듬어주기를 바랍니다. 그게 제 책이 한국에서 읽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왜 한국에서 제 책이 읽히는지에 대해 생각한 바를 나열하여 보았습니다. 두서 없는 이야기가 되어놓은지라, 죄송합니다. 앞으로도 제 책은 계속 번역될 것인데, 그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제 자신에게 되풀이해 보고자 합니다.
끝으로 드릴 말씀으로, 항상 제 책을 번역해 주시는 박동섭 선생님의 진력에 감사드립니다. 이 책이 한일 양국의 우정과 상호이해 증진에 보탬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2025년 6월
우치다 다쓰루
(2025-06-18 17:47)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용기론』 『목표는 천하무적』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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