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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론과 조직론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8. 9. 17:39
어떤 매체에 긴 글을 기고했다. 무척 유별난 곳인지라 다른 사람들이 여간해선 볼 기회가 없을 것이 자명하므로, 차제에 옮겨둔다.
“현대 교육, 기술자 그리고 인재육성의 문제점과 개선점”에 관한 기고를 부탁받았다.
오랜 세월 교단에 섰으며, 스스로 세운 도장에서 문인을 기르고 있는 경험에 비추어 보면 ‘교육’에 대해 말할거리가 있다. 이렇게 대학과 도장에서 관리직을 맡아왔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할말이 참 많다. 근데, 교육론이든 조직론이든 필자가 그간 해온 말들은 ‘굉장히 이상한 이야기‘이다. 순전히 필자가 경험한 지견을 말하려는 것뿐인데, 유감스럽게도 거의 대부분이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 동의해주는 사람이 적은 그런 내용들이다. 따라서 아래 문장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이것이 소수의견이며 일본사회의 상식에는 등록되지 않았다는 점을 미리 양해 구해고자 한다.
학교교육에 대해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사항은, 학교란 본래 ‘아이들의 시민적 성숙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이며, 무슨 교육 활동을 하든지 간에, 그때마다 “이게 아이들의 시민적 성숙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의문을 음미할 것을 권해드리는 바이다.
‘시민적 성숙’이란 말 자체가 익숙지 않기는 하지만, 필자는 곧잘 쓰곤 한다. 한마디로 말해, ‘공사 구분’ 사이에서 갈등하는 예법을 몸에 익힌다는 말이다.
‘갈등하는 법’ 이란 말도 그렇지만 참 낯선 표현을 쓰고 있기는 한데, 그 뜻은 결국 이해가 되실 거로 본다.
‘공과 사’ 사이에는 심심찮게 대립이 있고, 모순이 있으며, 이익의 상반이 있다. 이 말도 너무나 당연하다. 공공이란 토머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쓴 바와 같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그만두기 위해 모두가 사적 권익의 일부, 사적 재산의 일부를 공탁하여 세운 공작물인 것이다. 자기 부담으로, 자신의 몫을 내어놓음으로써 비로소 공동체, 지자체, 정부, 국가 등 ‘공공’이 출현한다. 그것은 성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을 때에 옳고 그름의 판정을 내리고, 잘사는 자에게서 공출한 재화를 가난한 자에게 재분배한다.
공적 기관은 자연물과는 달리 세상에 원래 있던 것이 아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질린 시민들이 조금씩 제가 가진 권리와 재화를 공납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진짜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같은 역사적 사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최근 학설에 따르면 역사상 “그런 세상은 없었다”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근대 시민 사회의 토대를 다지기 위해서는 그러한 ‘설화’가 필요했으며, 실제로 ‘설화’는 제대로 기능했다. 덕분에 우리는 어찌됐든 근대 시민 사회 속에서 누군가에게 갑자기 생명, 재산, 자유를 빼앗길 염려 없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공’은 시민에게 갖가지 것을 요구한다. 법률과 규칙을 지키라, 세금을 내라, 병역을 져라,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라 등등. 이것이 ‘사’ 입장에서 ‘내어놓을 것’에 해당한다. 이를 공출하지 않으면 ‘공’은 성사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내어놓을 것’이란 필경 ‘자기가 가진 몫’인데 이걸 어떻게 산정해야 하냐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사적 재산을 공납해야 할까? 적절한 ‘내어 놓을 몫’이 얼마일까? 이걸 ‘얼마인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성숙한 시민이다. 아이들을 이러한 시민으로 기르는 것이 학교 교육의 사명이다. 필자가 이해한 바로는 그렇다.
미숙한 시민은 애초에 ‘공공을 위해 자신의 몫을 내놓는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마지못해 내놓게 되었을 때에도, ‘나만 너무 많이 내놓는 거 아니냐’ 하고 툴툴댄다. ‘법을 안 지켜도 처벌받지 않는 놈이 있는데, 어째서 나만 법을 지켜야 하냐?’ 라든가 ‘버젓이 탈세하는 놈들도 있는데 어째서 나만 착실히 세금을 내야 하냐?’ 라든가 ‘다른 사람이 버린 쓰레기를 어째서 내가 주워야 하지?’ 등등.
이렇게 미숙한 사람들을 어느 정도까지는 성숙시켜 놓지 않으면 시민 사회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공적으로도 만족, 사적으로도 만족이 되는 합의점’을 꼭 보여줄 필요가 있다.
공과 사 어느 쪽에도 쏠리지 않고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는 것인 만큼, 그에 걸맞은 견식과 기술이 필요하다. 가장 간단한 기준은 ‘만약 이 사회가 자기 같은 인간으로 그득하다면?’과 같은 공상과학적 상정을 해보는 것이다.
법률을 지키지 않고, 세금을 내지 않고, 다른 이의 물건을 틈만 나면 훔치고, 다른 이에게 굴욕감을 안겨줄 기회가 제공되면 곧장 이용하는… 그러한 사람은 스스로 ‘항상 자기 이익을 최대화하는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여길지 모른다. 확실히, ‘법률을 지키지 않고, 세금을 내지 않고…’에 해당되는 게 ‘나 한 명’이고, 다른 모두가 ‘법률을 지키고, 세금을 내고…’ 하는 선량한 시민인 때에, ‘나’의 이익은 최대화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이를 테면 차가 막힐 때 고속도로 갓길로 다니는 운전자의 경우 다른 모든 이가 도로교통법을 지키며 갓길을 비워둘 때에 이익이 최대화하고, 모두가 제 것인 양 갓길로 다닌다면 이익이 줄어든다. 따라서, ‘갓길을 달리는 사람은 나 하나’이기를 그토록 바라게 된다.
하지만, ‘나 같은 인간이 이 세상에 될 수 있으면 없어야 한다’는 심보는,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데, 자기에게 거는 일종의 ‘저주’로 기능한다. 그 저주는 소량의 독성과 같아서, ‘나’의 심신을 조금씩 갉아먹게 된다. 처음부터, ‘나 같은 인간은 세상에 없는 게 낫다’고 본인 스스로 매일 그토록 바라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민적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어려운 한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추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저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해보면 될 일이다. ‘자기 같은 인간’만으로 구성된 사회에 살고 싶은지를, 스스로 물어보면 된다. 될 수 있으면 대부분의 시민이 법을 잘 지키고 친절하며, 낯선 것에도 관용적인 사회에 살고 싶다고, 보통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여럿이서 공공을 만들어 나갈 때에, ‘내가 보는 손해가 엄청나다. 무임승차자를 찾아내라. 우리 집단에 은밀히 숨어든 이물이 있다. 집단의 순수한 혈통을 더럽히는 자가 있다’고 눈에 핏발을 세우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구성하고 싶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러이러한 사람과 함께 살면, 자기 자신이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이 스스로 되면 된다. 시민적 성숙이란 그런 것이다. 윤리적으로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친절하고, 관용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하고, 공감능력이 높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과 조우해도 당황하지 않고서, 침착하게 그 대상을 포섭하려고 웃는 얼굴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다면, 사는 게 상당히 편할 것이다. 다른 게 아니라 ‘그런 사람으로 가득한 사회’에서 살고 싶다고 마음먹으면 될 일이다. 그렇게 하려면, 자기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힘쓰면 된다. 온 세상에 ‘자기 같은 인간’이 많이 있다면 안심하고 기분 좋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셈이다. ‘나같은 인간이 많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강력한 자기긍정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이치를 아이들에게 전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까다로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가르치려면 그만큼의 수고를 해야 한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교육의 존재의의가 있다.
따라서, 교사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교사 자신이 성숙한 시민이 되도록 매일 노력할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러한 교사는 결코 아이들에게 권력을 휘두를 일이 없을 것이다. 깐깐하게 점수를 매기지도 않을 것이다. 아이들의 성장을 잔잔하게, 인내심 깊게, 그리고 낙관적으로 지켜볼 것이다.
필자가 교육에 대해 말할 내용은 이걸로 거의 다 끝났다. 교사가 ‘친절하고, 관용적’이라면, 아이들은 이를 본받아(role model) 성장한다. 교사가 성질이 나쁘고, 관용적이지 않다면 아이들 또한 그를 표준으로 삼게 된다. 교사가 빈약한 어휘로 아이들을 매도한다면, 아이들도 그런 말버릇을 따라하게 된다. 그런 법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교사를 해왔다. 그러던 어느 시점부터, ‘교육하다’라는 타동사로 학생들을 대하기를 그만두었다. 학생들은 자력으로 성장한다. 자력으로 성장할 환경을 정비하는 것이 교사가 할 일이다.
그들에게 무언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 그 내용을 말로 꺼내려 할 때,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학생들이 할 말을 찾지 못한다면, 그냥 계속 기다린다. 학생들의 말을 자르지 않는다. 학생들이 말하고 싶었던 바를 요약하지 않는다(‘요컨대 자네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군’ 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알겠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이는 곧 ‘알았으니까 입 다물도록’이라는 뜻이니까).
뭐냐, 그럼 교사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 아니냐 하고 쀼루퉁하는 사람이 간혹 있을지 모르겠다. 바로 그 말이 맞다. 교사는 그저 그 자리에 있으면서 ‘아이들의 성장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이게 생각보다 어렵다. 아니 ‘생각보다’ 어려운 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어렵다.
아이들이 ‘요 선생님한테는 마음을 열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따뜻하게 지켜보는’ 일 같은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선 ‘믿게 하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믿게 한다’고 말로만 하려면 쉬운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날 믿어라’ 명령한다고 아이들이 어른들의 말을 믿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곧바로 전해지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경의’이다. 타인이 자신에게 ‘경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들도 금방 안다.
경의는 거리감을 의미한다. 쉬이 가까이 오지 않는다는 안심감을 이르는 것이다. 곧장 남의 마음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곧장 남을 이해한 척하지 않는다. 그러한 행동거지가 뜻하는 바는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안다.
『논어』에 ‘귀신은 공경하되 이를 멀리할 일이다. 이를 지(知)라고 한다’는 구절이 있다. 귀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마저 인간의 경의는 전해지는 것이다. 이게 가능하기 때문에 멀리할 수도 있게 된다. 아이들은 귀신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이다. 반드시 경의가 전해진다.
사랑은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남을 사랑한대도 전혀 내 맘이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는데 거들떠보지도 않기에, 사랑이 살의로 바뀌는 경우마저 있다. 사랑은 다루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할 감정이다. 따라서, 교육하는 데에는 될 수 있으면 들고 오지 않는 게 좋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랑이 반드시 전해진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경의는 반드시 전해진다. 사랑은 때로 사랑받는 대상을 다치게 하는 경우가 있지만, 경의는 결코 상대를 상처받게 하지 않는다.
교육에 대해 말할 건 대강 이런 내용들이다. 두서없는 이야기라 면목없다.
이어지는 내용은 ‘인재 육성’. 이 또한 교육과 통하는 이야기이기는 하나, 엄연한 ‘조직론’이다.
어떻게 집단의 역량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 이 또한 답이 간단한데 ‘오버어치브(over-achieve) 하게끔 만든다’이다.
Over-achiever라는 단어는 일본 경영서나 조직론을 다루는 책에 애초에 나오지 않는 말이다. 그럼에도 ‘오버어치버’는 그야말로 집단이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존재이다.
‘오버어치버’란 “월급 이상으로 일을 해주는 사람, 직무기술서에 쓰여 있지 않은 직무도 멋대로 해주는 사람”을 이른다. 이 사람들이 집단을 견인하고, 누차 혁신을 일으키며, 사기를 진작시키고, 이익을 안겨준다. 따라서, 조직 관리의 요체는 ‘어떻게 “오버어치버”가 기분 좋게 일을 하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거의 다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오늘날 조직론을 논할 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 그저 그런 ‘조직 관리 원리주의자’가 고작 한다는 게 그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사항들이다. 다시말해 ‘언더어치버’ 혹은 ‘무임승차자’를 찾아내서 질타하며 처벌하는 걸 ‘조직 관리’인줄로 굳게 믿고 있다.
한데, 받는 월급만큼 일하지 않는 인간이나, 다른 인간의 공헌만 바라보고 사는 인간이란 건, 어떠한 조직에도 반드시 일정 수는 발생하는 것이다(대체로 성원의 20%가 그러하다). 이를 줄일 방도는 없다(근무평정이 가장 낮은 20%를 해고하면, 나머지 80% 가운데 20%가 또다시 그 자리로 이행할 뿐이다). ‘일 안 하는 자’를 찾아내서, 괴롭히는 건 아무런 가치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순수한 소모 행위이다. 그런 데에 자원을 낭비할 수는 없다. 그럴 여유가 있다면 ‘오버어치버’들이 마음껏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정비하는 데 자원을 쓰는 게 낫다.
‘오버어치버’들은 딱히 엄청나게 큰 요구는 하지 않는다. 그들이 바라는 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뿐이다. ‘관리하지 말아 줘. 평가하지 말아 줘. 꼬치꼬치 토를 달지 말아 줘’ 뿐이다. 관리와 창조는 궁합이 좋지 않다. 조직을 창조적 성격으로 만들고 싶다면, 관리에 비용을 들이지 않을 일이다. 관리하면 조직에는 질서가 잡히겠지만 생산성이 낮아진다. 이건 당연한 얘기다.
군대에는 ‘독전대’라는 게 있다.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가 전황이 나빠지면 전선에서 이탈하게 되는데 이때, ‘전선으로 돌아가 싸워라’ 하고 총부리를 들이밀며 위협하는 일을 맡는다.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전선으로 돌아가 싸운다. ‘독전대’가 과반수를 차지하면(그럴 일은 없지만), 그 군대는 명령이 하달될지는 몰라도,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는 극단적으로 약하다(보시라, 병사의 절반이 전선에 안 나가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조직 관리 원리주의자가 상부에 있는 조직은 대체로 관리부문이 비대화해 있기에, 그곳에 권한, 예산, 정보가 집약되어 있다. ‘독전대’에 군사적 자원의 과반수를 투입하는 군대와 비슷하다. 따라서, 관리가 철저할수록, 약화된다. 가치 있는 무언가를 탄생시킬 힘이 스러진다. 원래 그런 법이다.
‘오버어치버’는 관리를 꺼린다. 따라서, 관리를 좋아하는 인간은 ‘오버어치버’를 되도록 두지 않으려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업무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징계도 한다. 하지만, 이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는 일이다.
또 한 가지 많이 안 알려진 건데, ‘오버어치버’라는 개념에는 ‘자신의 직무(job)가 아닌 일을 돌본다’는 특성도 포함된다.
회사 경영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찬스라는 건 ‘잡(job)과 잡 사이의 틈새’에서 발생한다. 위기도 또한 ‘잡과 잡 사이’에서 발생한다.
아무도 맡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이게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도 ‘내가 알 바 아니잖아?’ 하고 방치한다. 거기에 뭔가 ‘대박(大化け)’의 조짐이 있어도 무시한다. 그렇게 사업적 기회를 놓쳐도 그건 누구의 실패도 아니고,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반대로, ‘아무도 맡지 않은 일’이 유발한 문제가 원인이 되어 시스템이 와해되어도 그것은 누구의 실패도 아니거니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줍는 일”로 바꿔 이해해도 된다. 이것은 본래 ‘하시모토 오사무’의 지견이다. 창의성 분야, 예술 매니지먼트를 하는 프로듀서가 할 일이라고 한다. – 옮긴이)
오버어치버는 이러한 ‘잡과 잡 사이의 틈새’에 자연스레 손을 뻗는다. 신경이 쓰여서 그렇다. 자신의 ‘잡’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신경이 쓰이니까 손이 나간다.
그렇게 결국 생각지도 못한 발명과 발견을 하는 경우도 있고, 방치해 둘 시 조직적 위기에 이를 수도 있는 ‘버그’를 초기 단계에서 수정하는 경우도 있다.
방치해 두면 조직적 위기에 이를 수도 있는 ‘버그’를 수정하는 사람을 이르러 ‘칭송받지 못하는 영웅(unsung hero)’이라고 부른다. 그 사람이 약간 손을 대서 시스템의 와해가 저지되었건만,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본인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저 마음이 쓰여서 손봐뒀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기계에서 소음이 나는 걸 알아채고 드라이버로 조금 풀어놓는다든가, 구멍이 난 둑에서 물이 새어 나오는 걸 알아채고서 살짝 돌멩이를 끼워놓는 등, 그런 ‘약간의 오지랖’ 덕분에, 시스템이 파괴적인 리스크를 회피하는 일이 자주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효과가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언성 히어로’를 많이 거느리고 있는 집단은 강하다. 당연한 일이다. 관리가 구석구석 통한다고 강한 게 아니다. 지시가 없어도 ‘할 필요가 있는 일은 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므로 강한 것이다. 시스템이 언제 어떻게 수정되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아주 조금 수정되었으므로 강한 셈이다.
이제 슬슬 알아차리셨을 텐데, ‘오버어치버’와 ‘언성 히어로’는 같은 분류에 속한다. 이 카테고리에 속하는 인재를 어떻게 양성할 것인가, 그것이 조직론의 요체이다. ‘양성한다’고 일단 썼는데, 특별히 ‘양성한다’ 할 정도의 타동사적인 행동은 불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마음에 담아두는 것, 딱 그것이면 된다. 그렇게 염두에 두고 있으면 조직 관리, 근무평정, 중장기 목표 등이 모두 다 ‘사실상 의미가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조직의 상부가 ‘친절하고, 관용적이며, 호기심 왕성’하기만 하면 조직 관리는 그게 끝이다.
뭐라고? 조직 상부가 되어가지고 ‘관리’ 업무를 하지 말라고? 말이 안 된다며 툴툴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괜한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필자는 대학이라는 조직에서 관리직을 오래 지낸 적이 있고, 지금은 수백 명 구성원을 품은 도장의 주재자이기도 하다. 서생 다섯 명에게 월급을 주고 있으므로, 어지간한 사업체의 경영자 같은 거다.
도장을 꾸릴 때 필자의 기본 원칙은 ‘관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될 수 있는 한 ‘자치’에 입각해 활동을 맡긴다. 문인들이 새롭게 뭘 하고 싶다고 말을 해오면 돈과 장소를 힘 닿는 대로 제공하며 응원한다.
이는 대학의 관리직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부하가 무슨 제안을 가지고 오면 ‘아 그러냐? 하세요. 실패하면 내가 책임질 테니’ 라고 대꾸했다. 한 번도 실패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반대로 ‘하고 싶으면 하되, 나는 책임을 지지 않을 테야’라고 말했다면, 아마 실패할 확률이 더 높아졌을 지 모른다. 그런 법이다. 북돋워 주면(encourage), 그렇지 않을 때보다 성공할 확률이 올라간다.
필자가 주재하고 있는 ‘가이후칸’은 일종의 ‘코먼(공유지; 커먼)’이다. 필자가 땅을 사고, 건물을 세웠으며, ‘다같이’ 쓰게 한다. 커먼을 세운 것은 곧 필자가 ‘내어놓은 것’이다. 필자는 다다 히로시 선생님이라는 위대한 무도가에게서 아이키도와 관련해 귀중한 지식과 기술을 배웠다. 이를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것이 필자의 의무이기도 하기에, 자비를 들여 도장을 세웠다. 이 모든 일은 ‘필자가 내어놓은 몫’이다. 누가 ‘이거 좀 해달라’는 말을 들어서 그렇게 한 게 아니다.
조직론과 관련해서 한마디 덧붙이면, 조직의 자기 쇄신에는 성원의 다양성이 필요하다. ‘절대로’ 필요하다. 조직에는 능력주의・성과주의라는 ‘측량도구’로는 고량할 수 없지만 집단의 역량(performance)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구성원(member)이 필요하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는 조직론의 교과서 같은 영화다. 그런데, 일곱 사무라이 가운데 세 명, 기쿠치요(미후네 도시로), 가쓰시로(기무라 이사오), 헤이하치(치아키 미노루)는 오늘날 영리기업에서 뽑아 주지(recruit)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세 명이 없었다면 일곱 사무라이는 어떤 경지(level)의 전투는 아마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쓰시로는 유약한 젊은이이다. 그러나 ‘다음 세대’를 맡을 인물이다. 따라서, 그를 살아남게 하는 것은 다른 여섯 명 ‘어른’들의 의무이다. 그리고, ‘어른’들이 가쓰시로의 목숨을 남겨주려는 이유는, 이 젊은이가 살아서 죽은 사무라이들의 무용담과 그 기억을 후세에 전하며 기리는 일을 이어받아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헤이하치는 ‘중하급 실력’을 지닌 바 전투력이 낮다. 하지만, 그를 데려온(recruiter) 고로베에(이나바 요시오)는 무릇 헤이하치와 이야기를 나누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고 보고한다. ‘길게 보면 귀하게 쓰일 사내다’.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를 분명히 마음에 새겨두지 않은 사람은 ‘긴 안목’이라는 개념을 견딜 수가 없다. 헤이하치는 ‘자신들의 미션을 간단명료하게 이해시키는 재능’이 있다. 어중간한 개인적 전투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집단의 역량(performance) 향상에 기여한다.
기쿠치요가 가진 재능은 너무나 복잡하므로 여기서 언급하기는 어렵다. 다만, 오늘날 일본의 조직은 이 세 사람과 같이 ‘미숙한 젊은이’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는 사람’ ‘파격적인 사람’을 집단에 필수적인 성분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을 잃어버린지 오래되었다고만 말해두겠다.
일본 사회는 능력을 개인적 단위로 고량할 뿐이다. 그 사람이 집단에 보탬이 되는 때 얼마나 ‘화학변화’를 일으키는가에 대해 사량하는 습관을 잃고 말았다. 능력주의와 성과주의의 함정(pitfall)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개인의 능력이나 업적을 단순히 산술적으로 더한다 하더라도 그 집단이 어떠한 역량을 보일지를 예측할 수는 없다. 집단을 관찰할 때에는, 집단을 하나의 ‘생물체’로서, ‘다세포 생물’로서 그 기능이나 소업을 보아야만 한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협력(collaborate)함에 따라 완전히 다른 행태를 보인다. 그 당연한 사항을 일본인은 아주 오래 전에 잊어버렸다. 오늘날 일본 대부분 집단에서 보이는 질적 하락의 많은 이유가 그 점에 있다.
이상, 교육론과 조직론에 대해 겸손한 의견을 서술했다. 두서없는 이야기라서 참으로 죄송스럽다. (6월 12일)
(2025-06-13 09:20)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용기론』 『목표는 천하무적』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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