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미온적 코뮌주의자의 반추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7. 5. 09:06
계간 『정황』에서 5,000자 짜리 원고를 써달라 한다. 뭐든 쓰라고 하기에, 떠오르는 대로 쓴다. 독자층이 어떠할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30대 쯤 되는 사람을 상정 독자라 치고 쓰기로 한다. 젊은이들을 독자로 둔다는 건, 될 수 있는 한 친절하게 설명하겠다는 다짐을 이른다. ‘그거 있잖아 그거’ 라든가 ‘주지하다시피’가 항상 따라붙기 마련인 내부 전문용어(jargon)를 될 수 있는 한 쓰지 않기로 하겠다는 거다.*
ー
(* 이러한 취지에 발맞춰 주석도 최대한 달지 않을 것인데, 글 내용이 이해가 안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역자 탓입니다.
그리고, 우치다 타츠루 교수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글임을 밝힙니다. 오호. - 옮긴이)
『정황』이라는 잡지가 있단 사실을 처음 알려준 건 내가 1971년 겨울 고마바 캠퍼스(도쿄대학 교양학부가 있었다) 학내에서 새로운 운동단체를 만들려던 참에 접선을 시도한 O가(哥)였다. O가는 ‘분트 정황파’라는 당파의 활동가였던 바, 새로이 뭔가를 꾸미려면 “윗선의 허가가 필요”하다 했다. 그길로 고마바 인근의 다방에서 “정황파 소속 간부”라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가 시작하려는 운동이 뭔지를 내가 설명했다. 50년도 더 된 일이라서 자세한 내용은 똑똑히 기억이 안 나기는 하나, “민청(民青) 일원 지배 하에 있는 고마바에 새로운 조류를 트고자” 한다는 막연한 구상을 밝혔다. 이야기를 듣고서는, 필자의 구상이 분트 측한테 무슨 해가 될 것 같지는 않으리란 평가를 받았는지, “우치다와 활동해도 된다”는 허가로 말미암아 O가와 나는 둘만의 정치 조직을 꾸리기에 이르렀다.
O가나 나나 피차 무투파가 아니고, 언론을 통해 세상과 어떻게 해보자는 유형이었다. 말하자면 “활동가 동지들이여, 내부 투쟁은 관두시오. 당파는 달라도 『대학을 자유로운 공간으로』 만들자는 점은 일치가 되어 있으니까, 한정적이나마 정치적 목표를 내걸고서, 그때만은 서로 협력합시다” 하는 뜨뜻미지근한 정치적 입장을 취했다. 원래 기질 자체가 당파에 어쩌고 순화*되는 것이 좀 싫었다. 그러니만큼 나에게는 민청(民青)을 아우르는 거의 모든 당파의 친구들이 있었는지라, “어째서 다들 서로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 거람” 하고 무람없이 내뱉어 그들을 당혹케 했다.
ー
(* 순화: 정화한다는 뜻도 물론 있지만, 일본어 純化에는,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든다는 또다른 의미도 있다. - 옮긴이)
당혹스러울 만도 하다. 1971년 당시에는 “혁명의 기치를 내건 전 당파가 느슨하게 연대하는” 그런 (공상적이면서 반시대적인) 말을 하는 학생은 달리 없었다. 거의 전무했다. 그럼에도 필자는 동의해 줄 사람이 반드시 있다고 믿었기에, 대자보를 쓰고 캠퍼스에 게시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O가와 둘이서 어찌어찌 만든 정치 운동을 시작한 탓에 “정황파에서 너네를 모셔온 듯 군다” 하는 통고(痛苦)한 사실을 현량(現量)하기에 이르렀다.
ー
(* 직역: 정치 선전물을 쓰고서 캠퍼스에 뿌렸다. - 옮긴이)
하지만 나는 무반응으로 말미암아 어찌 된 일인지 후련했다. 나는 역시 소수파인 것이다. 맹우가 거의 없는 소수파라는 사실을 통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움직임을 그만두려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그보다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만들고자 “찔끔찔끔” 언론활동을 해나가자고 결의를 다졌다. 몇년이 걸리든 상관없다. 정히 혁명을 하려거든, 다수파를 형성해야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수한 정치사상을 한답시고 분파를 반복하여 조직 축소를 재생산하기보다는, 일단 대립점이 있다 치면 “모른 체 외면하고서”, 모두 사이 좋게 대동단결하는 게 제일이다. 그런 뜨뜻미지근한 정치 사상의 지지자를 늘려나가자, 그렇게 생각했을 따름이다.
여하한 유아체험의 귀결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남들에게 친절히, 모두와는 사이좋게” 하는 따위 초등학교 벽에 붙여 놓는 학급 목표 같은 것을 정말이지 이상으로 삼은 인간이었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 되니, 왕년의 활동가들은 다들 짠 듯이 머리를 이대 팔 가르마를 타고서, 정장과 넥타이 차림으로 취업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나는 경악했다. 너희들, 바로 요전까지만 해도 ‘일제 타도’라고 하지 않았었냐? 어느 당파가 가장 혁명적인가를 앞다투어 논쟁하며 주먹도 서슴지 않았느냐. 도대체 그건 다 무슨 푸닥거리였냐. “활동가 전적이 있는 이상, 취업 준비는 하면 안되고 직업 혁명가가 되어야지” 따위 원리주의적인 말을 나는 물론 하려는 게 아니다. 그래도 한 번 “혁명”이라는 문자열을 입에 담은 인간이 ‘일제 기업’이든 정부기관이든 훌훌 취직해버린다는 건 결국 “전향”을 이르는 것이 아니냐. 아니 전향이라고 할 정도의 내적 갈등조차 너희들은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 깨달았다. 그들이야말로 고등학생 때는 대입 시험 점수를 다투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정치 활동에서의 선명성을 겨루고, 대학을 나올 무렵에는 취업 준비를 통해 높은 수준의 곳에 들어가려고 다투는… 결국, 항시 동학 연령 집단 속에서 상대적 우열을 겨루고, 그 경쟁에서 기어코 이기고서는 대단한 사람처럼 굴고 싶었을 뿐이었구나, 그걸 알게 되었다.
나는 취업 준비를 할 생각이 없었다. 기질적으로 봉급생활자가 못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뜨뜻미지근하다지만 한번 혁명을 하기로 기치를 올린 이상, 내뱉은 말에 책임은 나름대로 져야 했었다.
우선은 대학원에 가서 사회인이 될 시기를 유예키로 했다. O가는 수재였으므로 미술사를 전공하기 위해 대학원에 무사히 진학하여, 연구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도쿄대 예과 3년 동안(* 1년 유급하셨음 - 역주)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았으므로, 별 생각 없이 본과 때는 불문과에 진학했는데, 같은 학년 불문과 삼십 여명 가운데 가장 프랑스어를 못하는 학생이었다 (확신할 수 있다). 텍스트를 소리내어 읽어보라 하기에, 끙끙거리며 읽었더니만 “삼인칭 복수형 어미에 붙는 est를 발음할 정도로 열등한 학생이 들어올 줄이야…” 하고 교사가 불그락푸르락할 정도였다. 따라서, 휴식기를 염두에 두고 쳤던 대학원 시험에 붙을 리가 없다. 다행히 연구생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대학원을 재수하더라도 학생증 비슷한 것을 발행해 주었기에 번듯한 신분은 되었다.
졸업은 했지만 할일이 없다. 졸업하자마자 곧장 백수가 된 셈이다. 당분간은 번역과 과외 아르바이트로 먹고살았다. 그때는 일본 경제가 활황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믿기지 않겠지만) 일 같지도 않은 근로 수입만으로도 방세를 내고, 세 끼를 챙겨먹으며, 드라이브나 해수욕, 스키타러 가고, 매일 밤 가까운 술집에서 (스낵바라는 업태였는데 너무 옛날 분위기이기는 하다) 근처 사는 나쁜 애들하고 술판 벌이는 데는 충분할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렇게 놀고 먹는 사이에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즈 야스지로와의 만남이 그 계기가 되었다.
세밑 무렵 방안에서 뒹굴거리며 티브이를 보는데 『안녕하세요』라는 영화가 나왔다. 쇼치쿠의 예술 영화인지 뭔지에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일어나서 채널을 바꾸러 가기가 귀찮았기에(* 리모콘이 드물던 시절 - 역주) 그대로 누워서 보았다. 시작하고 나서 몇 분 뒤, “이런 영화는 생전 처음 봤다”는 걸 깨달았고, 자세를 고쳤다. 화면을 응시하며, 대사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때때로 배를 잡고 웃으며, 다 보고 난 때에는 깊은 감동에 휩싸였다. 그날부터 도쿄의 모든 영화관, 시네마테크를 돌아다니며 오즈 작품을 보았다. 그리고, 거의 모든 작품을 다 보았을 무렵, ‘착실하게 살아가자’고 다짐했다.
오즈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은 대체로 대기업 임직원이거나 의사 아니면 대학 교수이다. 이 남자들은 밤이 되면 긴자의 바라든가 소박한 요릿집에 줄줄이 몰려들어 한 잔 기울이면서, 지인이 둔 딸애의 시집을 주선해준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별로 재미 없어 보일 수도 있는데, 진짜 엄청 재밌는 영화들이다. 하지만 여기는 영화를 논하는 지면이 아니다보니 자세히 쓰지는 않겠다.
어찌됐든 이 남자들은 술을 정말로 맛나게 먹는다. 일을 마치고 나서 (종종 점심 때도) 참으로 멋들어지게 술을 마시고, 하잘것없는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영화를 보던 와중에 문득, 나 자신 역시 낮에는 일을 하고 나서 밤이 되면 악우悪友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없이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가 되고 싶다고, 진심으로 원했다. 땀흘려 일하는 삶의 무게감과 보람을 나는 오즈 야스지로에게 배웠던 것이다. 오즈 감독 자신은 땀흘려 일해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모든 영화는 그가 만들어낸 공상이다. 하지만 공상이라 할지라도 생판 남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당년이 저물 무렵 나는 아이키도 지유가오카 도장에 입문해 다다 히로시 선생의 문인이 되었다. 이제껏 해왔던 흐트러진 생활을 정리하고서, 일단은 ‘스승 밑에 들어가 수행하는 인간’이 되자는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입문한지 얼마 안 되어 망년회가 있었고, 다다 선생께서 참석하셨다. 선생께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맥주를 따르며 자기소개를 했다. 다다 선생이 “우치다 군은 어째서 아이키도를 시작하려 했지?” 라고 물어보시길래 “네, 길거리 싸움 났을 때 이거 써먹고[強く] 싶어서요”라고 즉답했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 캠퍼스 분위기는 만나기가 무섭게 주먹을 나누는… 그런 거친(wild) 공간이었기 때문에 호신술이 필요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보다도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 선생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서 도발적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정말 성질 더러운 젊은놈이었다). “이 자식이 장난하나!” 하고 혼난다든가, 이거 안되겠네 싶어서 쫓겨난다든가, 정색하고 설교를 온종일 듣는다든가… 그런 식으로 스승의 기량을 가늠해보려던 것이었다. 참으로 불손한 젊은이였다 (나는 원래가 좀 바보다). 그랬는데 뜻밖에도 선생은 웃으시며 “그런 게 동기라도 상관 없지”라고 대답해 주신 것이다. 나는 경악했다.
무리를 무릅쓰고 다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바꿔서 말해보면 “그런 동기로 시작한다 할지라도 내 문인이 된 이상 적절한 수행의 길을 걷게 되었기 때문에 문제는 없다. 애초에 초심자한테 무도 수행의 목적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올바른 정답」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자네가 앞으로 나한테서 지금의 자네가 사량(思量)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은 것, 자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어휘 꾸러미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습득하게 될 테니까” 하는 식이 된다. 무도의 세계가 얼마나 굉대하고, 심원하며, 또한 바람이 잘 통하는 것이던가. 나는 이 한 마디로 눈 앞의 구름이 일거에 맑아지며, “이 선생님한테 일생 배우자”고 결의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났다. 선생님은 올해로 95세이시건만 아직 장건히 도장에 서 계신다. “이 선생님한테 일생 배우자” 하는 결의는 거의 성취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스물 다섯 살때 여태껏 ‘싸우는 남자’(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태도불량한 남자’, ‘홀로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쯤이 적당하겠다) 였던 간판을 내리고서, 비로소 ‘수행하는 남자’로 거듭났다.
그렇게 장한 마음을 먹은 탓인지도 모르겠으나, 입문 2년 째 되는 때 나는 삼수 끝에 도쿄도립대학 불문과 대학원에 입학을 허가받았다. 그리하여 비로소 ‘수련과 연구’ 측면의 겸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쭉 오늘날에 이른다. 그러는 와중에 27세 때에 친우 히라카와 가쓰미와 창업하여 한때 회사 경영에 나섰으며, 그때는 ‘스리잡’을 뛰게 되었는데,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길어지므로 애석하지만 생략.
‘정황’이라는 문자열을 보고 나서 O가를 떠올렸으므로, 결국 이야기가 길어져 버렸다. 장황설을 듣느라 고생 많았다. O가는 훗날 무사히 미술관 큐레이터와 대학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 가끔 만나도 정치 얘기는 거의 안 한다.
여기 잡지는 정치적인 이슈를 다루는 매체임에도, 정치 얘기를 왜 전혀 하지 않았느냐 하고 화를 내시는 분도 있을 거로 생각된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내가 고등학교를 구태여 중퇴(dropout)했던 까닭은 대입 공부가 함양하도록 시키는 ‘경쟁적 심성(mind)’이 도무지 싫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분주히 뛰어다닌 이유는 ‘모두가 사이 좋게 지내자’ 하는 식의 미온적인 정치사상을 전도하려 했기 때문이다. 아이키도가가 되었던 건, 아집을 버리고, 상대적인 우열을 다투지 않는 그런 수행의 길을 걸어가고자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비교적 수미일관한 태도를 견지했던 것이다.
‘무도는 상대적 우열을 겨루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뭔 뜻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게 뭔지를 설명하려면 얘기가 매우 길어지기에, 다음 기회(가 만약 있게 된다면)에 밝힌다. 우선 알아두면 좋을 게, 다쿠앙 스님이 쓴 『태아기』는 “병법자는 무릇 승부를 놓고 싸우려 하지 않고, 강함과 약함에 개의치 않는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승부를 놓고 싸우면, 진다. 강함과 약함을 의식하면, 약해진다. 이렇듯 “무도가 내포한 역설”이란 게 있는 거다.아무쪼록 나의 74년 인생을 돌이켜보면, “우열을 다투지 않음. 승부를 놓고 싸우지 않음.”에 관해선 “매우 수미일관” 했던 것이다.
나는(내 원래 전공인 학계 관련을 포함해) 논쟁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다. 심사 평가는, 하는 것도 당하는 것도 아주 싫어한다. 이것이 나의 “정치 사상과 실천”이다. “모두 사이좋게 서로 도와가며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듭시다” 하는 장한 노력을 나는 그만둔 적이 없다. 딱 이거 하나는 자랑할 만하다.
봉직하던 대학을 퇴직한 다음에 나는 ‘가이후칸’이라는 도장 겸 배움터라 할 수 있는 교육공동체를 세웠다. 이곳을 “서로 돕는 협력체”가 되게끔 일궈냈다. 나는 아주 뼛속까지 “코뮌 주의자(communist - 원주)”인 것이다. 그래서, “코뮌 주의란 무엇인가?”를 떠들기 시작하려면 또 한참 걸리므로,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다.
(『정황』 3월 31일)
*이게 첫 연재였는데, 이 글이 실린 당해 잡지 권두에 다치바나 다카시(立花孝志)가 보무도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고, 이렇게나 견식이 부족한 매체에는 결코 글을 쓰지 않겠소 하고 밝혔다.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용기론』 『목표는 천하무적』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1. 다치바나 다카시란 자는 협잡꾼이고, 『정황』은 똥같은(クズみたいな) 데입니다.
(사실, 유튜브 채널 Arc Times를 통해 쌍판대기를 너무 자주 봐서 정이 들 지경이기는 합니다. 굳이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정황』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반성하기를 촉구합니다.)
2. 그리고 이곳 오길비의 자료기지는 번역 블로그라기보다는, 개인 일기장에 가깝습니다.
(근데 여기는 제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니까,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육론과 조직론 (0) 2025.08.09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두 가지 공백 (0) 2025.07.31 목소리와 배음Harmonics (0) 2025.06.21 일본국 헌법의 주체 (0) 2025.06.20 친절한 가부장제 (0) 2025.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