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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절한 가부장제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6. 19. 08:49

    ‘친절한 가부장제’라는 말을 내세워 요즘 부쩍 열심히 전도하고 있는 참이다.

     

    가부장제는 오늘날에 와선 타기(唾棄)해야 마땅한 ‘만악의 근원’ 쯤으로 여겨진다. 그래도 가족제도란 것은 양부・선악의 판정에 따를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에마뉘엘 토드에 따르면, 가족관계는 “정치적인 관계에서 참고되는 원형으로 기능하는데, 개인이 권위와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정의한다” (『세계의 다양성』).

     

    세상의 다양한 가족제도는 ‘자유/권위’와 ‘평등/불평등’이라는 두 종류의 이항대립을 서로 엮은 네 가지 유형 가운데 어느 하나로 맞아떨어진다.

     

    일본에는 직계가족이라는 가족제도가 있는데, 이는 개인이 결단을 내린다거나 정치적 올바름을 가리는 식으로는 변경할 수 없다. 직계가족 제도는 맏형이 호주 지위(원문 家督 - 역주)를 잇고, 이에[]에 머무는 다른 구성원을 상대로 권위자로 군림하는데, 동시에 그 부양의무를 진다.

     

    일본에서도 최근까지는 그러했다. 하지만 출산율 저하와 핵가족화로 인해, 이 가족제도는 해체됐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족제도를 ‘정치적인 관계의 한 형태’로 여기는 사고 습관만큼은 존속하고 있다.

     

    따라서, 가부장제 해체를 외치는 사람 자신이 속한 조직이 ‘톱다운’인 것에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는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 ‘가부장이 내리는 지도는 받지 않겠다. 혼자서 살겠다’라고 말하며 가족 해체를 지지했던 사람이 ‘지금 정치판에 필요한 건 독재다’라고 떠벌리는 정치가에게 갈채를 보내는 것은 논리적으로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일본인에게는 ‘가부장제 심성(mind)’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가족 이외의 조직을 만들 때에도 ‘가부장적인 조직’밖에 떠올리지 못하며,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필자는 이런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입시다’ 하고 말씀드릴 따름이다. 그리고, ‘모두가 즐겁게 살 수 있는 친절한 가부장제’라는 것을 과연 만들 수 있을지, 그것을 음미해 보십사 제안드리는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지므로 다음주에 계속하겠다.

     

     

    ‘가부장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언명에 줄곧 논리적으로 반대해 왔다. 잘 살펴보자. 아버지’가 온 세상을 통제할 만한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발상 그 자체가 가부장제가 노리는 ‘효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현재 상태를 가부장이 과잉 개입해서 그런 거라고 설명하려든가, 아니면 가부장이 양육을 방기해서 그렇다고 설명하려거든 두 경우 모두, 그렇게 하니까 ‘설명이 딱딱 이루어지는군’ 하고 여기는 것 자체가 가부장제적 사고인 것이다.

     

    가부장제에서 사상적 이탈을 하려면 ‘아버지는 전능하다’는 전제 그 자체를 폐기해야지만 풀리기 시작한다. 결국은 이렇다. ‘아버지는 갖가지 방법으로 자녀에게 간섭한다. 아버지가 자녀를 크게 피해입히는 경우도 있고, 그정도는 아닌 경우도 있다. 드물게는 자녀를 행복하게 하는 수도 있다’ 하는 비원리주의적인 (거의 아무것도 똑똑히 설명하지 않는) 가부장제 언명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그런데, 가부장제를 원리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은 어떤고 하니, 만사 제치고 분명히 ‘모든 악’이 응집된 단 하나의 점이 있으며, 그것만 도려내면 모든 게 행복하게 끝난다는 스토리텔링*을 고집한다. 생각해보면 매우 위험한 사고방식이 아닐까. 그야 모든 배타주의가 이런 이야기 모델*을 끼기 마련이라서 그렇다.

     

    (* 원문 話型; 일본의 교육학 용어인 듯하다. – 역주)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은, 어느 집단에든지 ‘착한 사람’과 ‘개같은 놈’이 있고, 그 분포는 어딜 가나 크게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천사인 집단도, 모두가 악한인 집단도 이 세상에는 없다. 따지고보면 그런 식으로 다 설렁설렁하다. 그리고, 정히 집단을 보다 괜찮게 만들려거든, 선인의 비율을 늘리는 한편, 개자식이 권력을 가질 기회를 억제하는 것 말고는 확실한 방도가 없다.

     

    가부장제가 바로 서면 만사형통’인 것도 물론 아니거니와, ‘가부장제를 척결해야 만사 해결’도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가부장제를 보다 괜찮은 것으로 만드는 것밖엔 없다. (이어짐)

     

     

    가부장제는 일본같은 직계가족 제도에 고유하게 박혀 있는 틀이다. 우리가 ‘가족’을 말할 때, 우리는 그것밖에 떠올리지 못한다. 가부장제를 부정할 수도 있고, 수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부장제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가족을 상상하는 건 어렵다(아마도 불가능하다). 구성원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사이 좋은 가족만이 최선이라고 입으로는 갈파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완벽한 가족상이 확연히 체감될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가족을 그린 문학 작품, 영화, 연속드라마 등을 우리는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한국 영화 『국제시장』을 볼 적에, 일본인 입장에선 ‘우리 얘기 같다’고 짐짓 느끼게 된다. 한국 역시 직계가족제라서 그렇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부탁으로 가부장의 책임을 떠맡은 장남이,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는데, 종극의 늘그막에, 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보며 ‘아버지, 나 진짜 힘들었거든요’ 하고 눈물을 자아내는 심상이야말로 일본인이 잘 아는 그거다. 허나 미국 사람이나 프랑스 사람에게 과연 그 슬픔이 절실히 느껴질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웬 자기 인생인데 동생들한테 송두리째 바치는 거냐. 어리석기로소이’ 하고 도리어 분개할 것이다. 가족 제도가 다르다는 건 그런 걸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있는 가족제도 가운데 태어났다. 이를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개선만은 할 수 있다.형편 없는 가부장’이 초래하는 해악을 억제하고, ‘선한 가부장’이 자아내는 장점(메리트)을 최대화하는 방도를 궁리하는 게 ‘가부장제 철폐’를 위해 싸우는 것보다 일이 착착 돌아갈 거로 나는 본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선한 가부장』이 기어코 존재한다’는 점에 동의를 일단 받아두어야 한다. 가부장제 철폐론자로서는 수용하기 어렵겠지만, 이 지점만은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이리하여 ‘친절하고, 무사(無私)하며, 자녀의 성숙 지원을 주무(主務)로 삼는 가부장’을 일본의 역할모델로 관철하련다.

    (이어짐)

     

     

    친절한 가부장제’ 이야기를 오늘로서 끝맺는다.

     

    아마 오해하고 있는 분이 많을 것이지만, 제가 말씀드릴 ‘친절한 가부장제’는 성별과 상관이 없다. 집단을 이끄는 리더를 성별과 관계없이 ‘가부장’이라고 필자는 부른다.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 사람들은 기회만 있다 하면 누군가에게 굴욕감을 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성추행, 갑질, 악플 등이 다 그렇다. 이것을 필자는 가부장제가 ‘열화’하고 있는 징후라고 생각한다.

     

    가부장의 중요한 소임 중 하나는 ‘모두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부장제 그 자체가 부정되고 말았다. 가부장이 다른 구성원(멤버) 위에 억압적으로 군림한다든지, 그 자유를 제약한다든지 할 권리를 결코 보유해서는 안 된다는 데 필자도 동의한다. 하지만, 다른 구성원을 위하는 희생을 자신의 역할로 여기는 사람이 집단을 유지케 하는 데 필요하다는 사실만큼은 물릴 수 없다. 누군가가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된다.

    (* 이동연구소장 박동섭 선생에 따르면 ‘허리띠 졸라매기’. 원문이 瘦せ我慢, 곤궁을 참는다는 뜻이다. 예전에 유키치가 ‘야세가만’을 보다 큰 맥락에서 논한 바 있는데 박 선생은 당신의 어휘꾸러미로 그리 번역하였다.- 옮긴이)

     

    하지만 오늘날 일본에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적다. 신자유주의 이념 아래에서 구성원 전원은 똑같이 자유로우며, 똑같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자원 분배 문제를 둘러싸고 구성원들은 다투는데, 게서 이긴 자는 자원을 점유하는 데 거리낄 게 없다(패배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의무가 없다)고 설한 바로 그 이념이 가부장제의 숨통을 끊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명을 다한 건 가부장이 짊어졌어야 마땅한 ‘집단 성원을 도와줄 의무’ 뿐이었다. ‘동생이나 자식들을 지배하고, 그 자유를 제한하며, 굴욕감을 줄 수 있는 권리’에 관한 집착만큼은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온 일본의 집단은 죄다 비효율적이고 쟁그랍게 되어버렸다.

     

    일본인은 가부장제의 어두운 면만을 선택적으로 남겨둔 셈이며, ‘가부장은 친절하고, 무사(無私)하며, 집단 내 약자를 부양하고, 그 성숙을 지원하는 것을 주무(主務)로 삼는다’는 사상만큼은 부정한 것이다. 필자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진다. 오늘날 일본의 집단적 열화는 가부장제를 너무 쉽게 본 귀결이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라는데, 필자는 딱히 가부장을 부활시키라는 복고적인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게 아니라, 일본인은 사실 한 번도 가부장제를 사상적으로 똑바로 직면했던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직면한 적 없는 제도는 반드시 우리를 농간하기 마련이라고 말할 따름이다.

     

    (시나노 마이니치 신문 58~30)

     

    (2025-05-16 17:05)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용기론』 『목표는 천하무적』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옮긴이: 시나노는 오늘날, 올림픽도 열렸던 나가노 현을 이릅니다. 하여튼 이런 옥고를 실어주는 신마이는 まとも, 즉 참언론입니다.

     

     

    엄숙한 자리인데 뜬금없이 팬질을 해서 죄송하지만, ‘자랑스러운 신마이 인’ 상을 근년에 영화감독 신카이 마코토가 수상한 바 있답니다.

    각종 OTT에서 절찬리에 만나보실 수 있으니, 돌아오는 주말에 가볍게 맥주라도 한 캔 하시면서 아무 작품이든 부디 관심 가져주시어요.

    , 신카이는 성장형 감독이라 최근 작품일수록 더욱 좋습니다. 다 좋기는 하지만요. 『너의 이름은.』이 바로 그 가부장을 다루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런 면에서 특히 수작입니다. 신카이 마코토 본인이 장성한 딸을 둔 가부장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