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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판 일본헌법론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6. 17. 10:38
일본 헌법 기념일이 조금 지났기는 했음에도, 호헌에 관한 사견을 다시금 개진해보려 한다. 필자의 호헌론은 여느 호헌론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 헌법은 ‘빈말(원문 空語 - 역주)’이라는 견지에서 바라보는 호헌론이다.
헌법 전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일본 국민은 … 이에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선언하며, 이 헌법을 제정한다.”
허나, 헌법 공포 시점에서 ‘일본 국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포 전날까지 존재하고 있었던 건 ‘대일본 제국 신민’이었으며, 그들은 물론 주권자가 아니거니와, 헌법을 기초할 권한도 없었다.
현행 헌법 전문 앞에는 ‘상유(上諭; 임금의 말씀 - 역주)’라는 것이 붙어 있다.
“짐은 일본 국민의 총의를 바탕으로 새일본 건설의 초석이 다져짐에 이르매 심히 흡족한 바, 추밀고문의 자문 및 제국 헌법 칠십삼 조에 따른 제국의회의 결의를 거친 제국 헌법의 개정을 이에 재가하였나니, 이를 공포하도록 하였노라” 라고 한다.
두 헌법 사이의 법적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천황에서 국민으로 ‘주권자의 이동’이 제국 헌법에 의해 행해졌다는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 옮긴이: 원문 お話.)
일본국 헌법은 허구임을 필자가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헌법학자들의 학설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헌법이라는 건, 갖가지 선언과 마찬가지로 ‘빈말’이라고 생각한다.
공산당 선언, 미국 독립선언, 초현실주의 선언, 다다이즘 선언, 미래파 선언 할 것 없이, 온갖 선언은 결국 빈말이다.
독립선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창조주에 의해 평등한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노예제가 폐지된 것은 선언 이후 87년이 지나서였으며, 공민권법이 제정된 것은 188년 후였고,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일어난 것은 237년 뒤였다. 오늘날조차 미국 내부에서는 엄연한 인종차별이 존재하고 있다. 그럼 독립선언이 ‘빈말’이며 아무 의미가 없다 할 수 있겠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빈말은 ‘바람직한 나라의 모습’을 제시한 생산적인 빈말이었다. 강한 지남력을 지닌 빈말이었다.국민이 전력을 다해 달성해야 할 과제를 보여준 빈말이었다. 이 선언이 있었던 덕분에 미국은 더딘 걸음으로 (때로는 후퇴하기도 하며)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나라를 지향해 왔다. 선언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일본국 헌법이 전문부터 맨끝까지 ‘그 공극(空隙)이 채워져야 할 대상으로서 주어진 빈말’이라고 생각을 한다.
이 세상 어디에 “공정과 신의”를 신뢰할 수 있는 “평화를 사랑하는 제국민”이 있다는 말이냐. 어디에 “평화를 유지하고, 전제와 예종, 압박과 편협을 지상에서 영원히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국제 사회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냉소하는 사람들은 ‘모든 나라가 자국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는*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헌법을 바꿔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에 맞춰서 이상을 내버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 맞춰 헌법을 바꿔 쓰고 나서 당신들은 일본을 어떠한 나라로 만들 셈인가. 아무런 이상도 내걸지 않고서 현실에 그저 적응해 나가는 나라가 되어야 된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 원문 喉首を掻き切り: 喉首 등 일부는 우치다 선생이 지어낸 말인 듯하다. 영어의 cutthroat와 완전히 통하는 뜻이다. - 옮긴이)
무도에서는 주어진 상황에 최적해로 응하는 것을 ‘후수에 든다’고 말한다. 후수에 들면 반드시 패한다. 따라서 선수를 취해야만 한다. ‘선수를 취한다’는 말은 적보다 먼저 공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어리석은 정치가들은 그렇게 알아먹겠지만). 그게 아니라 ‘어떤 세상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지남력 있는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을 이른다. 그 메시지가 비로소 현실을 바꾸는 것이다.
(『주간금요일』 5월 7일)
(2025-05-16 16:48)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용기론』 『목표는 천하무적』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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